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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第五章 강호은원(江湖恩怨)(4)


패기 가득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피골이 상접한 사내만이 남아 있었다.
괴기한 마기를 뿜어내던 그 당당함도 없었다.
단지 눈빛만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 모습에 자운룡이 이를 갈았다.
“여기서 나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가능하겠나?”
“지금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 합니다.”
“넓디넓은 북해에서 도망갈 곳이 있을까?”
순간, 자운룡은 고심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더니 검을 뽑아 족쇄를 잘라 냈다.
하지만 독고천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자운룡이 그런 독고천을 업고는 신형을 날렸다.

* * *

자운룡은 북해빙궁에서 살아온 소궁주답게 비밀 통로들을 잘 알았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한 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고, 두 사람은 무사히 북해빙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제야 고통이 느껴진 듯 독고천이 신음을 터뜨렸다.
“크윽.”
자운룡은 독고천을 내려놓고 복부를 훑어보았다. 단전을 뽑아낸 후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아 상처가 곪아 있었다. 심지어 구더기가 알을 낳을 정도였다.
순간, 자운룡은 품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독고천의 복부를 헤집었다.
독고천이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검은 핏물이 흘러나오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붉은 선혈이 보이기 시작하자 자운룡은 금창약을 독고천의 복부에 바른 후 붕대를 감았다.
금창약은 무림인들의 필수품과도 같았다.
지혈 성능이 뛰어나 응급치료로는 탁월한 효과를 보여 주는 약이었다.
어느 정도 치료를 끝낸 자운룡은 독고천을 다시 등에 업고는 신형을 날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의 거대한 산이었다.
“형님, 제가 전에 얘기해 드렸던 전설 중 하나를 기억하십니까?”
“어떤 전설 말이냐?”
“노한산이라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실종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예. 그래서 아무도 이 산에는 접근하질 않습니다.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일 겁니다.”
자운룡은 독고천을 업고는 산을 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자 가파른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부터가 노한산의 초입입니다. 제가 이곳에 초옥이 하나 있는 것을 봐 두었습니다. 저 말고는 그 누구도 초옥의 위치를 모르지요. 아주 교묘히 숨겨져 있더군요.”
아니다 다를까, 절벽과 절벽 사이의 아주 교묘한 위치에 초옥이 숨겨져 있었다.
매우 낡았지만 거처로서는 충분했다.
“제가 커서 기분이 꽁할 때면 이곳에 와서 기분을 풀고는 했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얼씬도 못했지요.”
자운룡은 독고천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내 한 무더기의 벽곡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본래 북해에서는 솔잎이나 다른 재료들을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북해빙궁의 거의 모든 곳의 지리를 아는 자운룡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장독대에 들어갈 만큼의 벽곡단을 만든 자운룡이 초옥 한 켠에 쌓아 두었다.
“벽곡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찾아오지 못하는 날에는 벽곡단으로 식사를 해결하셔야 할 겁니다. 초옥 바로 옆에는 물길이 있으니, 그곳에서 갈증을 해소하시면 될 겁니다.”
독고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없어 보이는 모습에 자운룡이 다시금 울컥했지만, 애써 흘러나오는 눈물을 삼켰다.
“형님, 저는 지금 본 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운룡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초옥 밖으로 나갔다.

자운룡은 한 달이 지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독고천은 하루하루 육체 수련에 집중했다.
자운룡이 두고 간 약이 떨어지자 살수 수업을 받을 때 익혀 두었던 지식으로 약초들을 캐 상처에 발랐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여전히 흉터는 짙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독고천은 산속을 뛰어다니며 이를 악물고 수련에 열중했다.
떨어진 체력과 몸의 근력을 다시 키웠다.
그리고 항상 잠들기 전에는 가부좌를 틀고 연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내공은 모이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깎아 목검을 만들어 하루 종일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둘러 손목이 얼얼해질 때까지 휘둘렀다.
그렇게 평상시처럼 가부좌를 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순간, 독고천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마룡지체라 함은 어떤 특별한 혈도와 몸이 지닌 특성으로 인해 역혈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단전이 아니어도 다른 곳에 내공을 담을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독고천이 운공을 할 때마다 단전에서는 약간의 거부감을 보였다.
내공은 온전히 쌓이긴 했지만 무언가 거북한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이십 년 가까이 내공을 쌓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기분보다는 거북한 기분을 더 많이 느껴왔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원래 널리 알려진 단전은 사실 독고천을 위한 단전이 아닐 수도 있었다.
판단을 마친 독고천은 온몸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몸 마디마디를 눌러 보고 눈으로 살폈다.
아니다 다를까, 단전 오른쪽에서 자그마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살짝 튀어나온 듯 보이는 그곳에서 단전과도 같이 묵직한 무언가가 만져짐을 느꼈다.
순간, 독고천은 기쁨에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이다!’
독고천은 천천히 외워 두었던 혈마심법(血魔心法)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본래 심법이라는 것은 한 번 익힌 후에는 바꿀 수 없었다.
바꾸기 위해서는 예전에 익혔던 모든 내공을 포기해야만 가능했다.
그러니 삼류 심법에 속하는 악마혈천심법을 익혔던 독고천은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본래 명가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가장 최고의 심법으로 어렸을 적부터 벌모세수(伐毛洗髓)까지 받아 가면서 자라난다.
즉, 어릴 때부터 환골탈태와 맞먹는 신체로 무공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단기간에 고수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독고천에게는 그런 혜택이 없었다.
심지어 심법마저 천마신교의 아무나 익히는 심법이었으니, 웅후한 내력을 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혈마심득에서 혈마심법의 구결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익히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뛰어난 심법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동안 쌓아 온 내공을 날릴 수는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악마혈천심법을 운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단전이 파괴되며 새로운 심법을 익힐 수 있게 되었으니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하나로 뭉치니, 그것이 바로 무형지기라……. 무형지기는 하나의 기운인 동시에 하나의 기운이 아니니, 그것이 합쳐져 단전을 이루리라. 그리고 그 단전이 이루어져 천지인의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내공이니라.’
순간, 독고천의 몸속에 아주 가느다란 기 한 덩어리가 들어섰다. 독고천은 기의 덩어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초옥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발자국이 있다! 그놈이다!”
순간, 독고천은 눈을 번쩍 뜨고는 망설임없이 초옥 뒤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무사들이 초옥에 들이닥쳤다.
“놈이 도망친다!”
무사들이 경신술을 사용해 도망치는 독고천을 쫓았다.
독고천은 열심히 뛰었지만, 금방이라도 무사들의 손아귀에 잡힐 듯 보였다.
그 순간, 독고천은 이를 악물고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사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다니.”
“독한 놈이군. 어찌 보고하지?”
“이곳에서 떨어지면 십 중 십은 죽었다고 봐야지.”
무사 한 명이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에 암흑(暗黑)만이 보였다.
무사가 슬쩍 돌멩이를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휘이잉.
바람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무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휘유, 이런 곳에서 떨어졌다간 뼈도 못 추리겠군.”
무사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자.”

* * *

독고천은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팔다리가 부러졌는지 엄청난 고통만이 엄습해 왔다.
“으으.”
독고천이 밀려드는 고통에 침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기를 찾아 헤맸다.
다행히 아직 기 덩어리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거기다 자리를 잡았는지 기묘한 기운이 연신 펄떡거렸다.
독고천의 몸에서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아주 옅고 은은한 붉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공했구나! 혈마심법을 익혔다!’
혈마심법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붉은 마기였다.
혈마가 한창 전성기 시절일 때는 붉은 마기만 보아도 모든 정파인들이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독고천은 손에 만져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주위를 훑어보았다.
천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팔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부러진 팔다리에 부목이 받쳐져 있었다.
현재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은 동굴 안이었는데, 의외로 밝았다.
“너.”
순간, 갑작스런 음성에 독고천은 흠칫 놀랐다.
동굴 입구 쪽에 초라한 의복을 입은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어 왔다.
“너, 혈마 님하고 무슨 관계냐?”
그러자 독고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니오.”
그러자 노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독고천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그와 함께 닭 모가지조차 꺾을 힘도 없어 보이던 노인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혈마 님의 마기를 흘릴 수 있는 거냐?”
“컥컥.”
독고천은 숨이 막히는지 기침을 토해 냈다.
그러자 노인이 독고천을 내려놓았다.
철푸덕.
몸을 가누지 못한 독고천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독고천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흠흠, 혈마심법을 익혔기 때문이오. 그래서 붉은 마기가 흘러나오는 것이오.”
“혈마심법은 어디서 어떻게 익혔지?”
“우연히 운남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운 좋게 얻게 되었소.”
“운남?”
“그렇소.”
독고천이 담담히 대답하자 노인이 진실 유무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흘겼다.
“해남(海南)은?”
해남이라는 말에 독고천이 사실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아마 상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독고천, 자신을 판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거짓을 말하게 되면 이런 상황에서는 너무나도 불리했다.
팔다리가 부러진 상태라 아무것도 못하는데, 거기에 공격마저 당한다면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