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불사무적 오마르 1권(4화)
제2장 눈을 떠 보니……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2)


***

‘정신을 놓았고…… 그런 다음 눈을 떴다. 그런데…….’
처음 보는 녹색 눈동자의 소녀가 눈앞에서 조잘거리고,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생소한 언어는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바뀐 것은 분명한데 뭐가 뭔지 이해되지 않았다. 멍하기만 했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으으, 내가 왜 살아 있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부터 알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낯선 침입자를 어서 내보내야 했다.
“공자님?”
소녀의 의혹 어린 눈길을 손사래 치며 무시했다.
“으음, 지금 내가 몹시 혼란스럽다. 갑자기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여. 그러니 너는 나가 봐라. 혼자 있어야겠다.”
말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내가 이러한 말을 줄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소녀가 냉랭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런 수법 안 통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러니 어서 일어나기나 하세요. 벌써 8시가 넘었어요. 이 시간이면 모두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란 말입니다.”
“알았다고 했잖아. 지금은 조금의 생각할 시간이 나에게 필요하단 말이야. 15분만 시간을 줘.”
15분?
15분은 또 뭐지?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지?
내 말에 내 자신이 놀라고 말았다.
“15분 전에 15분이 지났어요. 15분 후에는 아마 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실걸요?”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이 일다경이고 그것은 15분이다. 그렇다면 일다경의 삼 분지 일이 5분이군.’
나도 모르게 시간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었다.
“그럼 5분. 5분만 조용히 내버려 둬.”
“지금 즉시 일어난다면 5분을 벌 수 있어요.”
소녀의 고집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얼른 안 나가?!”
고함을 지르자 소녀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곱게 눈을 흘겼다.
“금족령에 벌까지 받고 계시면서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군요.”
“금족령?”
“그래요. 이번에도 꾀를 부리시면 엄청 혼이 나실 거예요. 영주님이 무척 화가 나셨단 말입니다.”
“혼이 난다고? 내가? 이, 나를? 중원제일인이자 천하제일마인 나를 감히 누가 꾸중한다는 말이냐.”
소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또 시작이군요. 또 시작. 공자님의 그 망상과 잘난 척 병이 또 도졌군요. 도대체 중원제일인은 뭐고, 천하제일마는 또 뭐예요. 이보세요, 공자님. 제발 좀 정신 차리세요. 공자님은 이곳 ‘고블린의 숲’에서 벌을 받은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이미 경험이 많은 듯, 소녀는 나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모르겠다니요. 지나가는 늙은 노인을 왜 그렇게 두드려 팼어요. 그것도 고작 1실링(화폐 중 가장 낮은 단위)을 훔치려고 그랬다니…….”
학생을 훈계하는 선생님처럼 소녀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떤 변명이 있다 해도 그건 남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나이가 행하여야 할 바른길 중 가장 우선이 노약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와 주군에 대한 충성의 복무와 비견할 만한 것이란 말이에요.”
“내가 노인을 두드려 팼다고? 그것도 돈을 훔치려고? 참으로 어이없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뺏어도 있는 놈의 것을 빼앗지 없는 사람의 돈을 뺏은 적은 없다.”
소녀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물론 저는 이해합니다. 공자님의 말씀을 믿어요. 그 노인은 공자님 주장대로 도적이었을 것입니다. 공자님은 늙은 도적으로부터 돈을 찾으려 했을 거구요.”
하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남들은 저와 다르단 말이에요. 오해가 많아지면 이해로 바뀝니다. 진짜가 되어 버리는 거지요. 모두들 공자님을 향해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거야 원…….”
내가 힘없이 눈을 껌벅거리자 소녀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이 만든 오해는 그것만이 아니랍니다. 얼마 전에도…….”
“그만.”
나는 소녀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잔소리를 듣는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제발 좀 나가 줘. 알겠어?”
머리가 깨어질 듯 혼란스럽지 않았다면 소녀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쳤을 것이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호통치며 소녀의 심장에 구멍을 뚫어버렸을 것이다.
무영마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러나 눈을 뜬 나는…… 곽비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한 톨의 내가진기도 끌어올릴 수 없었을 뿐더러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조차 힘들었다.
“알았어요.”
소녀가 새침하게 나를 째려보더니 몸을 획 돌렸다.
“그러나 저로 하여금 공자님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마세요. 봐주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귀찮게 구는 소녀가 나가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후…….”
숨을 내뱉으며, 다시 들이켰다. 그러기를 수차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정리가 필요하다.’
허리를 펴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조금씩 정신이 차려졌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은 방에는 달랑 하나 놓인 탁자와 내가 앉아 있는 침상밖에 없었다. 별다른 장식도 없는 단조로운 방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사방을 살피다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으헤헥!”
너무나 놀라서 하마터면 침상에서 자빠질 뻔했다. 눈에 보이는 손은 분명 내 손이건만 처음 보는 손이었다.
때에 절어 있는 손은 작았고, 부은 듯 통통했다.
“이, 이게 내 손인가? 이게?”
팔을 들어 흔들어 보았다. 분명 내 팔이었다.
“으으. 쇠처럼 강인해야 할 손이 어째서 어린애 같은 손이 되었단 말인가.”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크으으으……. 괴상한 소녀도 그렇고, 알 수 없는 언어도 그렇고, 내 팔도……. 악몽이야! 이건 악몽이라고! 으아아아악! 내 몸이 왜 이렇게 변해 버렸단 말이냐!”
절규를 터뜨리며 온몸을 만졌다. 미친 듯이 더듬었다.
허리며 허벅지에 두툼한 살집이 잡혔다.
상당히 통통한 몸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다. 평생을 통해 무학을 수련한 내 몸이 새끼 돼지같이 부드럽고 퉁퉁하다니. 나,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냔 말이닷!”
한참 동안 바보처럼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미친놈처럼 실실 웃기도 했다.
“허허, 참……. 허허.”
계속해서 헛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곽비가 아니다. 아니, 곽비가 맞는데 곽비가 아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흐흐.
그러니까 영혼은 곽비인데 나를 담고 있는 이 몸뚱이는 곽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중원제일인이자 무림삼마 중의 하나가 나였다. 군림천하를 외치며 천하를 질타하던 자가 나였다. 장안의 제일가는 갑부가 되고 싶었고, 무림의 패왕이 되려고 했다. 나중에는 지상의 최고 악마가 되고자 했다.
그것은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확실하게 곽비가 맞았다.
그런데 변해 버린 것이다.
―꿈도 아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통도 가해 보았으니, 꿈이라면 벌써 깨고도 남았을 것이다.
“분명히 뭔가가 잘못됐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나서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망혼곡의 번개로 인해 새로운 운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어. 분명히 맞아!”
육체는 생각보다 젊었다.
아니, 어렸다. 한 15∼16세 정도 되었을까?
발달되지 못한 몸은 살이 올라 작은 돼지처럼 통통했고, 피부는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러웠다.
“아까 공자님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부잣집 도련님이었어. 그랬으니 피부가 이리 고운 것이야.”
가려운 머리를 긁자 비듬이 떨어졌다. 계속해서 긁자 굵은 비듬이 우수수 떨어졌다.
“손에 묻어 있는 새까만 때, 머리의 비듬. 고약한 녀석이군.”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게을러빠진 녀석의 몸에 내 영혼이 깃든 모양이다.
내가 왜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되었지?
너무나 한심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허탈해 하고 있는데, 베개 머릿밑에 삐죽이 튀어나온 책이 보였다.
“뭐지?”
쑤셔 둔 책을 빼 보니 여인의 나신을 그린 음서였다.
“흐흐, 더러운 취미도 가졌군. 흐흐흐. 가지가지 하는 놈이다.”
미친놈처럼 껄껄 웃었다.
“무림의 열사인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혹시 나의 악행에 대한 천벌인가? 인육을 먹고, 피를 빨았던 죄를 받고 있는 것일까? 제기랄! 세상은 칭송하는데, 하늘은 왜 나의 분신 옥쇄를 인정해 주지 않느냔 말이닷!”
너무나 억울했다.
엿같이 더러워 저주의 말이 절로 나왔다.
“네미, 썅! 좆같은 하늘. 문둥병에 걸려 온몸에 종기가 나고 매독에 걸려 새까맣게 타서 죽어라. 모조리 뒈져 버려라. 창녀보다 못한 놈. 포주보다 독한 자식! 자손 대대로 앉은뱅이에 꼽추만 낳아라.”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땅을 향해 욕을 뱉었다.
“더러운 새끼. 쳐 죽일 놈.”
차가운 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서 그런지 피가 천천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뻣뻣해지고 있었다. 퇴창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 때문에 몸은 점점 차가워질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몸이 아니라 사고(思考)조차 꽁꽁 얼어 버릴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군.’
머리를 좌우로 돌리고 팔을 움직이며 어깨를 털었다.
허리를 움직이고 상체를 흔들었다. 그러자 내 몸은 마치 사나운 바람에 흔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바람을 잡으며 그 바람을 내 몸속에 가둔다. 바람의 둔(屯).’
건곤무상공의 내가 운기법이었다.
사실 추위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는 몸을 격렬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운기라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운기를 시작하자 전신으로 미약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약간의 열기는 꺼지는 불씨처럼 사라져 버렸다.
“역시…….”
과거의 곽비였다면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힘으로 인해 매미 날개처럼 몸이 진동했을 것이다. 몸에서 발산하는 활화산 같은 열기로 인해 방 안은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비록 과거처럼 용솟음치는 희열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몸이 바뀌어 걱정을 했지만 이 몹쓸 놈의 새끼는 단전도 없구나.”
내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짐작대로 하단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니, 단전이라는 존재감 자체를 느낄 수가 없었다.
지독한 상실감이 나를 괴롭혔다.
“공든 탑이 무너졌다. 평생을 통해 노력한 3갑자의 내공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하아, 이제 나는 끝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시간들이 또다시 지나갔다.
어쩌면 이대로 미쳐 버리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괴롭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공자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세요.”
녹안의 소녀가 들어와 그렇게 말했다.
“알았다.”
내가 일어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소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공자님?”
“알았다고 했잖아. 그냥 나가!”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쫓아냈다.
내가 미친놈처럼 눈깔을 번뜩이며 발광을 하자 소녀는 가득 실망한 표정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그래도 살았으니 이것만 하더라도 어딘가. 흐흐. 똥구덩이에서 비빌지라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했다. 내공이 없으면 또 어때? 그까짓 내공! 흐흐. 엿 같은 내공! 다 필요 없어! 모조리 필요 없다고!”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뿐이었다.
“…….”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서 따스한 기운을 비추고 있었다.
“왜 아침을 드시지 않았어요?”
점심 무렵쯤, 방 안으로 들어온 소녀가 따지듯 물었다.
“필요 없다.”
“필요 없다니요. 밥을 드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차려 놓은 점심은 꼭 드세요. 비록 말썽은 피웠지만 공자님은 이제까지 식사를 거른 적은 없잖아요.”
한동안 쫑알거렸지만 허망한 표정을 한 채, 계속해서 무시를 하자 소녀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정말 어린애 같은 분이셔. 그런다고 제가 쩔쩔맬 줄 알았어요?”
“그냥 나가라. 알았지?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마라. 조용히 꺼져 주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다.”
“흥!”
매몰차게 말하자 소녀도 기분 나빴는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리 묵직하지? 마치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기분이잖아.’
흉부가 답답해서 숨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두통도 일어났다.
처음에는 이것이 새로운 육체를 얻은 상태라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그것으로 기인한 두통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좌측 뇌가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머리의 통증은 두 시간에 한 번, 5분씩 계속되었다.
“…….”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계속해서 누워 있기만 했다.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다가 정신병자처럼 혼자서 킬킬거리기도 했다.
결국 그날 저녁까지 굶은 나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