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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무적 오마르 1권(5화)
제2장 눈을 떠 보니……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3)


***

“더러운 밤이었다.”
어젯밤은 참으로 끔찍했다. 불덩이가 나를 공격하는 꿈을 꾼 것이다.
내 몸이 활활 탔다. 온몸이 불에 휩싸였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가까스로 불을 끄고 한숨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시커멓게 생긴 괴물이 나를 잡으러 왔다. 나는 기겁을 해서 도망쳤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늪에 빠지기라도 한 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정신 나간 놈처럼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몸부림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빠져나갈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검은 괴물에 잡히고 말았다. 엉엉 울면서 발버둥 쳤다. 창피하게도 살려 달라고 괴물에게 빌었다. 울면서 애원했다.
그러다 깬 것이다.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줌을 싸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을 웅크린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꿈인가 현실인가! 내가 곽비가 맞기는 한 것인가?”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림 열사인 내가, 분신 옥쇄로 천하를 구한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어제부터 시작해서 오늘 이 순간까지, 머릿속으로 생경한 정보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루 만에 나는 내가 몰랐던 정보, 처음 접하는 문화와 풍습, 생소한 언어와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 무공 같긴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실로 괴이한 마법들, 기(氣) 같기는 하다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마나(Mana) 등을 기억해 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것들이 다 뭐지? 뭔데 내 머릿속을 헤집으며 나를 괴롭히는 것이냐! 전부 꺼져 버렷!”
비록 단편적이고 서로 연관이 없는 흩어진 정보들이기는 했지만 나의 뇌는 격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회오리에 빨려 올라가는 물처럼 소용돌이쳤다.
아마도 주기적으로 나를 엄습하는 두통은 이전 몸뚱이가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정보 때문일 성싶었다.
“…….”
아침의 태양은 강렬했다. 하지만 퇴창을 통해 들어오는 찬바람은 무척 따가웠다.
나는 계속해서 창문을 열어 두었다.
차가운 바람이라도 맞아야 살아 있다는, 꿈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까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일어나셨어요?”
역시 식사 때가 된 모양이었다.
처음 나를 깨웠던 예쁜 소녀가 다시 찾아왔다.
“너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를 찾는구나. 너의 끈질김에 상이라도 주고 싶다.”
소녀는 나의 비꼬는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어제는 온종일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더군요. 왜 식사를 안 하세요?”
‘정신 나간 계집. 너 같으면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겠느냐?’
차마 그러한 말은 할 수 없었다.
싸울 힘도 없었고 상대하기도 싫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은 꼭 드세요. 그러다 병이 날지도 모릅니다. 다이닝 룸에 가시기 싫다면 여기서 드세요.”
그녀가 쟁반에 담아 온 음식을 내 침상에 두며 그렇게 말했다.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창백한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는 그냥 나가고 말았다.
밥을 보았지만 먹을 수 없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어제 하루를 굶고 결국 오늘 아침마저 굶었다.
점심 때쯤 찾아온 소녀는 쟁반 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음식을 보자 뭔가가 크게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혹시 단식 투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지금 시스크에 안 계세요.”
하도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네 이름이 뭐냐?”
“저요?”
소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그래. 네 이름을 알고 싶구나.”
“빅토리아예요. 빅토리아 카먼. 설마 놀리시려고 제 이름을 물은 것은 아니죠?”
뇌 속의 정보를 찾았고, 조각조각 흩어져 부분만 남은 그 정보를 내 감정과 확인해 보았다.
정보는 지금 나의 생각과 비슷했다.
‘음. 빅토리아 카먼이라. 이 녀석의 기억 속에는 저 계집에 대한 좋은 감정이 없다. 오만 간섭을 하고, 매우 잔소리가 많은 계집. 딱 그렇게만 기억되고 있군. 약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흐흐. 남자는 역시 잔소리에 약한 모양이다.’
그녀를 향해 힘없이 물었다.
“내 이름은 뭐지?”
“공자님요?”
소녀가 부엉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내 이름. 좀 가르쳐 줄래?”
이때의 내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으며, 온통 울상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뜻이다.
장난 같지 않았던지 소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오마르 알 칸트. 공자님의 성함은 오마르 알 칸트입니다. 마르틴 왕국의 재상이자 오우거 슬레이어이시며, 철혈의 재상으로 불리시는 구스타프 칸트 공작 각하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시죠.”
‘제법 신분이 있는 놈이었구나.’
약간 놀라면서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은 향후 시스크의 영주가 되실 귀한 몸입니다. 그리고 과거 한때 천재라고 소문이 난 분이셨기도 하죠. 마르틴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됐습니까?”
삐딱한 말투였다.
“너는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구나.”
소녀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자님이 또 꾀를 부리시는 것 같아서……. 밥을 굶는 것은 꾀 중에서도 가장 미련한 행동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어요.”
“꾀가 아니다. 다만 정신이 혼미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할 뿐이다.”
“그럼 아프신 거예요?”
그녀의 표정에서 걱정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아프다?”
잠시 눈을 들어 허공의 한 점을 보았다.
“아프다라.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소녀의 말이 도전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하다니?”
“공자님은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도 회피하고, 훈련도 받지 않으신다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공작 각하께서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어쩌면…….”
“어쩌면 뭐?”
소녀가 석상처럼 굳은 얼굴로 말했다.
“쫓겨나실지도 모릅니다. 알겠어요? 소영주의 존귀한 자리에서 박탈당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쫓겨난다라. 흐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구나.”
소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졌다.
“자꾸 그러실 거예요? 왜 그렇게 염세적으로 변하신 것입니까. 이전의 공자님은 말썽을 피우긴 했지만 비관적이진 않았어요.”
“나이는 몇 살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녀가 화를 참는 표정을 지었다.
“열여섯요. 왜요? 왜 갑자기 제 나이를 묻지요? 제 대답을 회피하려고 그러신 것이죠?”
내가 피식 웃었다.
“네 나이를 물은 게 아니다. 내 나이가 궁금해서 물은 것이다. 너는 참 착각도 잘하는구나. 지랄같이 성질만 부리는 너와 딱 어울린다.”
소녀가 고양이처럼 눈을 빛냈다.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입니까? 세상에 맙소사.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니죠?”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든지.”
소녀가 졌다는 표정을 했다.
“공자님은요. 저랑 나이가 같아요. 사실 우리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됐다. 그만 나가 봐라. 너를 계속 보니 짜증만 날 뿐이다.”
“흥!”
소녀가 붉게 상기된 뺨을 실룩이더니 몸을 획 돌렸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나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그녀가 몸을 돌리며 되물었다.
“네?”
“네 신분 말이다. 내 시비냐?”
“시비요?”
무척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가 쓰러질 듯이 비틀거렸다.
“그래. 내 밥을 차려 주고, 하루에 세 번씩 들러서 나를 살펴 주니 종인 듯 보이는데, 종치고는 이러쿵저러쿵 간섭이 많은 것을 보니 종 같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이다. 만약 종이라면 너처럼 건방진 종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다, 당신……!”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바들바들 떨었다.
매섭게 째려보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던 소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정말 구제 불능이군요. 구제 불능!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앞으로 다시는 나를 볼 생각도 하지 마세요!”
소녀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왜 저러지? 종치고는 정말 건방진 아이야.”
너무 황당하고 기가 차면 현실감이 떨어져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게 된다.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빅토리아라 불리는 소녀가 왜 울상을 지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얼핏,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에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
문득 소녀가 말한 ‘염세적’이라는 단어가 단도처럼 내 폐부를 찔러 왔다.
“그래.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비록 엿 같은 상황에 처하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실,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그 자체는 상당히 기쁜 것이기도 했다.
또한 곽비는 능동적인 인간이었지, 수동적 인간이 아니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나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런 상태야말로 절대 기연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현실을 직시하고 이 삶에 최선을 다하자.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다.”
비록 허약하고 게으른 몸뚱이지만, 알지 못할 땅에서 알지 못하는 문화와 풍습, 언어 앞에 놓이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삶이 아닌가.
무공은 다시 수련하면 된다. 어색한 언어는 다시 배우면 되고 풍습과 문화는 공부하고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이계의 정보와 기억은 확인하고 되새겨야 내 것이 된다. 그래야 단편적인 정보들이 모여 완전해진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은 온전하게 남아 나의 뇌에 조각처럼 새겨져 있다.’
나의 동물적 감각이 그렇게 충고했다.
“그래! 이계의 지식은 그렇다 치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 머릿속에는 과거의 지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천하제일을 다투던 무공! 그것이 있다. 이미 배우고 수련한 경험이 있으니 다시 시작한다면 과거보다 더 빨리 이전의 경지를 얻게 될 것이다.”
생각을 바꾸자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축기를 통해 단전에 내공을 쌓는 것은 사람의 자질에 따라 성과가 다르다.
그러나 이미 천하제일을 다투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바람의 둔] 구결을 이용해서 운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내 몸의 단전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작다. 아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부터 실수를 한 것이다. 축기할 장소가 없는데 축기를 하려 했으니, 미약한 열기를 느꼈을 수밖에.’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하단전을 살펴보았다.
역시 텅텅 비어 있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바람의 둔]은 건곤무상공의 두 번째 단계다. 지금은 건곤무상공의 첫 단계부터 밟아야 한다. 축기가 아니라 기를 느끼는 것. 그것이 먼저다.’
건곤무상공의 일 단계 구결을 읊조리며 기를 느껴 보려고 애썼다.
핏기 없던 파르스름한 전신에서 혈색이 돌고, 미약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것까지는 이전과 동일했다.
‘운기조식은 이른바 조화의 수련법이다. 기(氣)를 느끼고 그 기를 내 몸과 일치시킨다. ―지각의 현(絃).’
감각적인 판단은 올발랐다.
나의 자존감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던 나른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기의 파장도 시간이 지나자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진했다.
뭉클거리는 느낌이 피부를 통해서까지 느껴졌다.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상체를 흔들었다. 느릿하게 흐르던 피가 혈관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속도는 점점 가속되었다.
‘역시! 맞았어. 몸속에서 일어나는 혈행이 느껴진다. 이것이야말로 일 단계의 시작을 알리는 현상이 아닌가.’
분명 알고 있는 것이었고, 이미 경험한 것이었지만 참으로 신기했다.
몸속에서 흐르는 피는 마치 작은 물방울이 또르르 소리를 내며 피부 위를 굴러가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물방울은 조금씩 커지며 탄력을 받아 갔다. 혈행의 움직임도 야생마가 질주하는 듯했고, 고맙게도 내 심장은 더운 피를 무차별적으로 펌핑(Pumping)하고 있었다.
또르륵! 또륵!
수백 개의 작은 물방울이 몸 위를 굴러다녔다. 그러나 간지럽다거나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시원했다.
그렇다고 신기함을 즐기며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지각의 현에 더욱 집중했다.
단전을 의식하며 배꼽 아래를 내관했다.
시간은 흘렀고 배꼽 아래는 점차 충만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
탄지간의 짧은 시간 동안 내 몸은 작살에 꿰뚫리는 충격을 받았다. 불에 달군 쇠젓가락이 배꼽 아래를 지지는 느낌.
고통 어린 타격은 과거 나를 희열에 들뜨게 만든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성공했다. 이전의 나로 돌아왔다.’
드디어 단전이 만들어지자 가슴이 뭉클했다. 눈동자가 뜨거워지며 눈앞의 사물이 온통 성에가 낀 듯 보였다.
‘첫걸음의 나로. 하단전을 만들며 기뻐 웃음 짓던 그때로 돌아갔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허리를 세우며 어깨를 폈다.
뿌듯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두근두근.
역동하는 심장의 울림이 천둥처럼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이제 시작이다. 제2의 삶. 중원제일인이자 천하제일마인 곽비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지 사위는 거뭇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꿈 같은 한나절이 찰나같이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