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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무적 오마르 1권(6화)
제3장 이계 적응기(1)


샐쭉해서 다시는 나를 찾지 않겠다고 선언한 빅토리아(녹안의 소녀)는 하루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잖아요. 배…… 안 고프세요?”
긴장한 표정과 미안함이 그녀의 얼굴에 역력했다.
“왜 안 고프겠어. 배고파 미칠 정도야.”
잔소리를 뱉을 때는 그렇게 꼴 보기 싫더니만, 지금은 와락 안아 줄 마음이 들 정도로 그녀가 반가웠다.
“사실은 너를 기다렸다. 잘 왔어. 하하.”
내가 껄껄 웃으며 배를 두드리자 빅토리아가 얼굴을 폈다.
“그럼 얼른 식사를 준비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뛸 듯이 나가는 그녀를 불렀다.
“그것보다 말이야.”
내 몸의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좀 씻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정신을 차리고 나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몸을 깨끗하게 씻는 일이었다.
그러나 목간통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어디서 데우는지도 몰랐다.
주변 지리도 몰랐기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빅토리아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던 것이다.
사실은 단전을 만들고, 기를 느끼며, 느낀 기를 모으는 축기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아예 나돌아 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핑계를 대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아, 좋은 생각입니다. 이제 철이 들었군요.”
그녀가 예쁘게 코를 찡긋거렸다.
“사실 공자님 옆에만 가면 지독한 냄새가 났거든요. 옷도 갈아입으실 거죠?”
말하는 그녀는 맑은 물속에 솟아난 산호처럼 싱그러웠다.
‘자세히 보니 참 예쁜 아이구나.’
순간 내가 주책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내심을 감추며 얼른 대답했다.
“응. 그것도 준비해 줘.”
빅토리아가 일러 준 목욕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목간통에 담긴 물은 미지근했지만 견딜 만했다. 아니, 시원해서 더 좋았다.
사실 이 정도 추위 따위야 그간의 경험과 고통에 비한다면 우습기만 한 것이다.
시원하게 목욕을 한 다음 빅토리아가 준비해 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에 맞게 상쾌함이 밀려왔다.
“식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다이닝 룸에서 식사를 하실 거죠?”
“그래.”
기분 좋게 걸어 다이닝 룸으로 갔다.
빅토리아가 준비한 요리는 맛있었다.
고기 한 점, 한 점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작고 귀엽게 생긴 빵은 설탕처럼 달콤했고, 오렌지를 뿌려 향을 듬뿍 낸 숭어찜은 농익은 여인의 가슴처럼 내 배를 충족시켜 주었다.
계피로 비린내를 제거하고, 부추로 맛을 낸 보드라운 사슴 요리는 만족한 여인의 입김처럼 황홀했다.
좀 놀라웠던 사실은 이 모든 요리를 그녀가 전부 준비했다는 것이다.
“네 요리 실력이 보통이 아닌데?”
내 말이 듣기 좋았는지 빅토리아가 살포시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요.”
“말이기는. 진짜야. 정말 맛있다고.”
빅토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흘릴 정도로?”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이런, 나도 모르게 주책을 부렸어. 그런데 너는 식사를 안 하느냐?”
“저는 공자님이 식사를 한 다음에 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랬군. 신분이 어울리지 않으니 겸상을 못하는 것이야. 참 예쁜데, 요리도 잘하고 예절도 바른데 어쩌다 종이 되었을까?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 보기에는 부잣집 외동딸같이 생겼는데 생각보다 신세가 불쌍한 아이였구나.’
마음 같아서는 식탁 위의 모든 요리를 다 먹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천히, 긴장을 풀 듯이 차근차근 밥을 먹었고, 딱 적당할 정도로만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보니 내 방이 너무 지저분했다.
곰팡이 냄새와 쾨쾨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하는 김에 방 청소도 시작하자.”
놔두면 빅토리아가 알아서 청소를 하겠지만 숨겨 논 음서를 들킨다면 창피도 창피지만 잔소리를 또 들어야 할 것이다.
“가만 보면 이 녀석은 엄청나게 미친놈이었어. 이렇게 많은 음서를 어떻게 다 구했을까.”
이 방 저 방, 구석구석에 찔러 넣은 음서를 모조리 찾아 마당에 쌓았다. 쌓고 나서 보니 거의 이십여 권에 달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음서에 불을 질렀다.
타닥. 탁. 탁.
책이 타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불꽃이 피며 탁탁거리는 소리가 참 듣기 좋구나.’
환생 직후에 느낀 절망감과 끈적끈적하고 까칠했던 과거가 저 불길과 함께 모조리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괜히 마음이 들떠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타탁!
불똥 하나가 튀어 날아가다 마치 눈처럼 내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화아악…….
불똥은 갑자기 강렬한 빛을 발했고, 곧 재가 되어 바람결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불이 좋아. 왠지 내 손길에 따라 불길이 더 치솟는 느낌이 든다.’
그 생각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손을 오른쪽으로 움직여 보았다.
화르르르…….
불길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춤추듯 넘실거렸다.
“진짜네? 생각처럼 불이 움직여. 불길도 이전보다 더 거세졌고 말이야.”
너무너무 신기했다.
다시 다른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화르르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드세지도 않는데, 마치 맞바람을 맞은 들불처럼 책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다.
탁탁 튀는 불똥도 흩날리는 눈처럼 너울거렸다.
그 불똥이 손이라도 갖다 댈라 치면 화아악! 하고 강렬한 빛을 발하고는 재가 되어 날아갔다.
‘흐흐. 이계(異界)의 이곳은 역시 알지 못할 곳이야. 이상한 현상들이 이렇게 내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잖아.’
원래의 몸뚱이 주인은 불과 인연이 있는 듯했다.
좀 더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불은 곧 꺼지고 말았다.
음서가 모조리 불타자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작은 불씨 하나라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타다 남은 흔적이 행여 빅토리아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내가 욕을 먹게 될 것이다.
나는 하지도 않은 일에 욕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내 방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빅토리아가 들어와서 그렇게 말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 어쩐 일이야? 금방 식사가 끝났잖아. 아직 점심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 않아?”
빅토리아가 입을 삐죽거렸다.
“누가 밥 때문에 왔을까요?”
“그럼 왜 왔느냐.”
그녀가 척 하니 팔을 허리에 올렸다. 예의 도전적 자세다.
“도대체 언제부터 공부를 하실 참이지요?”
“공부?”
“네. 공자님은 엄연히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오전에는 공부와 마법 수련, 오후에는 체력 훈련을 받아야 해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마상 훈련도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군.”
아무렇게나 대충 대답한 다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시 빅토리아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칸트 가문의 비전 마나 수련법과 승마술은 마르틴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것입니다. 마법을 수련하셔야 하기 때문에 칸트 마나 수련법을 본격적으로 배우시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승마술은 반드시 배워 두셔야 합니다.”
퍼뜩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배워야 할 것이 왜 그리 많지?”
“소공자시니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다재다능하면 더 좋지요. 지도력 플러스 재능, 그리고 뛰어난 두뇌.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노력이겠죠. 이런 것들이 모여야 기사들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공작 각하는 순전히 스스로의 능력으로 오늘의 자리에 오른 분입니다. 공자님은 그분의 아드님이시고요. 부디 공작 각하의 위명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비로소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이계의 지식에 대해 참으로 어둡지 않은가.’
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정보들은 거의 단편적일 뿐이었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
믿을 수 있고,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해 줄 훌륭한 스승을 눈앞에 두고서 망설일 필요가 뭐 있을까. 빅토리아를 통해 뇌 속의 단편 정보를 모으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공부는 말이야. 좀 늦추면 안 될까?”
“늦춰요?”
“그래. 한 보름 정도. 그쯤이면 복잡한 머리도 좀 해소가 될 것 같은데 말이지.”
“음.”
빅토리아가 입 안에 공기를 넣어 볼을 볼록하게 만들더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꼭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좋게 생각해 보라고. 나는 지금 무척 곤란한 상태에서 막 벗어났단 말이야. 네가 나를 도와줘야겠어. 만약 지금같이 혼란한 정신 상태에서 공부를 하다가는 내가 미쳐 버릴지도 몰라. 너도 봤잖아. 그동안 나는 미친놈처럼 정신이 나갔어. 밥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설마, 내가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 말이 결정타였다.
“무, 무슨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십니까? 미치다니요.”
빅토리아가 창백한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나에게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능하겠지?”
“알았어요.”
빅토리아가 선선히 대답했다.
“대신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보름?”
“네. 보름 후부터는 짜여 있는 일정표대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알고 보니 나보다 더 권한이 있는 종이군 그래. 흐흐. 종에게 사정을 하다니, 내 꼴이 우습게 되었어.’
“좋았어.”
즉시 손을 들어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손을 수평으로 후려치듯이 그으며 내가 말했다.
“맹세하지. 보름 후부터는 꼭 공부를 하겠다고.”
빅토리아가 깔깔 웃었다.
“그게 뭐지요?”
‘뭐야, 이거! 울상을 짓더니만 금세 깔깔거리고 웃어? 나이가 어려서 잘 웃는 거야? 아니면 내 행동이 그렇게 볼품이 없었다는 말인가.’
“뭐긴 뭐야. 준엄한 맹세의 형식이지. 이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에 대고 맹세를 하겠다는 표시야. 맹세 중에서도 가장 무게 있는 맹세지.”
“그런 맹세도 있나요? 처음 봐요. 너무 재미있어요. 호호.”
‘쩝. 여기서는 이런 맹서가 없는 모양이군.’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 처음 본다니 좀 그렇군. 하여튼 내 마음이 그만큼 확실하다고 이해를 하면 돼. 그리고 너무 쉽게 웃지 마. 여자가 웃음이 헤프면 아무도 좋게 보지 않아.”
“억지, 또…….”
빅토리아는 잘 웃기도 했지만 나를 좀 쉽게 보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았다.
“부리시네.”
“이거 참.”
찌그러진 냄비처럼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입맛만 다시고 말았다. 한참을 깔깔거리던 빅토리아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쿠퍼 경이 공자님에 대해서 계속 물어봤거든요. 공자님이 공부하러 오시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공자님이 아프다고…… 대충 둘러댔습니다.”
핑계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아프다, 아팠다는 핑계가 최고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을 정도로 한 방에 직방이다.
“잘했어. 역시 빅토리아야.”
잘했는지 잘못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일단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칭찬이 기뻤는지 그녀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쿠퍼 경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보름이 좀 길지만 보름 있다가…… 공자님이 열심히 공부를 하신다면 그분도 좋아하실 거예요. 제임스 경도 있지만 그는 공자님이 수련을 안 하신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은 해 놓겠습니다.”
“그래?”
듣고 보니 마지막 말은 기분이 좀 나빴다.
‘제임스라고? 내가 노는 것을 좋아한단 말이지? 그 녀석 나중에 손을 좀 봐야겠군.’
“그렇게 알고 저는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방을 나가려 했다.
“잠깐.”
얼른 그녀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본격적인 볼일은 이제부터였다.
“아직 내 얘기가 끝나지 않았거든?”
그녀를 불러 세운 나는 탁자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흉내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빅토리아는 아주 재미있어 했다.
“이것도 장난이죠?”
그녀는 나와 한참을 놀았으며(?), 나는 그녀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 덕분에 단편적인 정보들이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어때? 이런 시간이 즐겁기도 하지?”
“네, 그래요. 호호. 아무것도 모르는 공자님이 바보 같아 보여 더 재미있어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참아야 했다.
웃는 얼굴로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하루에 꼭 한 번은 이렇게 하자. 알았지?”
“네, 좋아요. 호호. 공자님과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빅토리아가 손뼉을 치며 아기같이 좋아했다.
‘가까워지기는……. 아서라, 아서.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야.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단다. 이, 내가! 천하제일마인 내가! 어린애와 마냥 노닥거릴 수야 있겠니?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기에 져 주는 것이다. 너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다. 볼일이 끝나면 너는 찬밥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껏 기뻐해라.’
얼굴은 웃고 있지만 나의 속마음은 딴생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상황을 알고, 나를 알며, 내 능력을 되찾는다면……. 흐흐. 세상 사람들은 위기와 두려움이 나의 동지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서의 나는 그저 통통하고 힘없는 어린 색마에 불과했다.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권위를 믿고 함부로 까불다가는 새롭게 다가온 인생을 즐기기도 전에 진짜 지옥행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말이다.
그래서 악마적 본성은 당분간 감추어야 했다.
곽비 때도 그랬지만 무영마 때는 더 그랬다. 사실 뭔가를 감춘다는 것은 나의 특기가 아닌가.
어린 계집 하나를 어르고, 달래며 속이는 것은 나에게 일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