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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무적 오마르 1권(10화)
제4장 돌고래 제임스(2)
“…….”
눈을 떴다.
퇴창 밖으로 보이는 해시계는 어느덧 4시간이 흘러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약속되어 있던 시간에서 4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저 멀리, 서산이 붉게 노을 져 있었다.
사위도 거뭇해서 얼마 안 가 어두워질 것이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의 겨울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단전을 만들었고 상당한 내가진기를 축기할 수 있었다. 이제 단전에 축기된 진기를 응축하는 과정에 도전할 단계가 된 것이다.”
[진기의 선풍]
나는 지금 응축의 초입 단계의 도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상당히 늦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흐흐. 제임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구나.”
오늘부터 제임스와 오후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약속된 시간인 2시까지 가지 않았다.
지금은 6시 경.
아마 기다리다 지쳤을 것이다.
보름 동안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으니 어쩌면 연무장에서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 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돌고래라 불릴 정도로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그이니 잔뜩 인상을 그리며 기다리고 있을 확률도 있다.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문득 내 모습이 보고 싶었다.
눈앞에 놓인 거울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10대의 앳된 얼굴이 거울에 나타났다. 외모는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턱이 각이 져서 전체적으로 딱딱해 보이지만 이것 또한 거침없던 곽비의 성격과 유사하지 않는가.
마음에 들었다.
“코가 뾰족하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사각형에 가깝다. 음……. 눈도 좀 찢어져 있고, 입술은 제법 두텁구나. 이런 외형은 칸트 핏줄이 가지는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나는 주워 온 아이는 아니라는 말씀이군. 흐흐. 오마르 알 칸트, 네 이놈아. 살이 빠지니 훨씬 사내답구나. 보기가 좋다. 흐흐흐흣.”
몸의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다. 팔도 다리도,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위용을 감추고 있는 튼실한 그놈도 건드려 보았다. 모두가 싱싱하고 생고무처럼 탄력 있다.
팔다리에 근육도 제법 붙어 있었다.
보름 만에 새끼 돼지에서 날씬한 몸이 된 것이다.
내 몸, 나의 내공, 머릿속의 무공구결, 그리고 새로운 삶.
만족감이 충만해졌다.
“오마르야, 너도 나도 이제 과거처럼 살지 않을 테니 우리 잘 한번 해 보자. 알았지?”
성큼 걸어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빅토리아 말을 들어 보면 제임스는 제법 괜찮은 녀석이라던데, 과연 그럴까?”
다만 문제는 그 녀석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쿠퍼는 나를 찾아왔지만 제임스는 아직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나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겠다는 행동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마땅찮으면 두드려 패지 뭐. 흐흐. 실컷 얻어맞으면 녀석도 정신을 차릴 거야. 이전의 소악마들처럼 나를 존경하며 따르게 될 것이다. 벌벌 떨며 아부할 것이다.”
껄껄 웃으며 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공자님, 식사 준비되었으니 식사를 하세요.”
빅토리아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식사?”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프긴 했다.
배를 툭툭 치며 내가 말했다.
“싱글싱글 웃는 것을 보니 요즈음 너를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이 있는 모양이지?”
빅토리아가 예쁜 고양이처럼 깔깔거렸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공자님이 쉬지 않고 노력하시니 제가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최근에는 그 좋아하던 잠도 마다하고 책을 보시잖아요.”
“내가 그랬나?”
“한꺼번에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저번처럼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쉬엄쉬엄 놀아 가면서 공부하세요.”
‘공부를 안 한다고 그렇게 닦달하더니, 이제는 놀으라고?’
기가 차서 내가 웃고 말았다.
‘이, 계집애야. 내가 왜 골 아프게 책을 보겠느냐. 알아야 될 정보는 많은데 너하고 있으면 여간 어색하지 않다. 자꾸 붙으려 하는 것도 성가시다. 가까이 있으면서 부담을 가질 바에야 나 혼자 책을 통해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단 말이다. 알겠느냐?’
쿠퍼에게 빅토리아와 나 사이에 대해서 들은 이후로 나는 빅토리아를 대하기가 어려웠다. 괜히 민망했다.
처음에는 살갑게 굴고, 챙겨 주고, 참견하고 하는 것들이 그저 귀찮기만 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는 것이다.
주책이야 정말!
그렇게 나를 책망했지만 보석처럼 예쁘고, 아침 햇살처럼 싱그러운 빅토리아가 내 곁에 바싹 붙으면 묘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임스 경과의 훈련은 어땠어요?”
“제임스?”
“네. 훈련이 고되지 않았나요? 그는 원칙이 뚜렷한 사람이라서 공자님이라고 하더라도 봐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은 아직 안 갔어.”
“안 갔다고요?”
빅토리아가 성난 살쾡이같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갔어요?”
내가 얼버무렸다.
“그냥. 좀 그랬어.”
“흥.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또 꾀를 부리시려는 것은 아닙니까?”
빅토리아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그만 하지 그래. 또 잔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러면요?”
“네가 저번에 제임스 그 녀석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잖아. 그따위 녀석이라면 좀 기다려도 돼. 일부러 그랬어.”
빅토리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임스 경은 도련님이 중시해야 할 인재입니다. 그는 아직까지 도련님께 충성의 서약을 하지 않았어요. 그를 무시하지 마세요. 도련님의 미래를 위해선 그가 필요합니다. 또한 그는 시스크의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 캡틴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그 정돈가?
그렇다면 그때는 왜 그런 식으로 말했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계집이군.
“그러나 말이야. 진정한 믿음에선 충성의 서약이니 신뢰에 대한 봉사니 하는 것들이 필요 없다고 한 사람이 너잖아. 그런 것은 형식이나 예절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그런 말씀 마세요. 양질전화의 법칙, 즉 형식이 쌓이면 내용을 만들어 낸다는 학설도 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에게 예절이 필요한 것입니다. 형식을 너무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지만 없어서도 안 됩니다. 특히나 제임스 경과 같이 군신 관계가 되어야 할 사이에서는 반드시 예절이 필요합니다. 신하에게 대하는 예절, 주군으로서 지켜야 할 예절. 보통의 기사들처럼 그도 자존심이 무척 강한 사람이에요.”
보지도 못한 아버지 구스타프의 관심 덕분인지, 아니면 그녀의 자질이 원래 뛰어난지는 몰라도 빅토리아는 나이답지 않은 배움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가 공자님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이유라는 것이 뭐지?”
빅토리아가 손가락을 창처럼 세워 내 코를 가리켰다.
“바로 공자님 때문이지요.”
그 순간, ‘이크, 하마터면 이 계집애의 손가락에 코를 찔릴 뻔했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14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자님은 마르틴이 감탄하는 영재였어요. 모두가 공자님을 칭송했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스크의 신민들은 공자님이 구스타프 공각 각하를 뛰어넘는 영주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런 말은 많이 들었지. 흐흐. 오늘 아침에도 쿠퍼가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고.’
괜히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전부터 공자님은 변했단 말입니다. 기억 안 나세요? 그 이후로 쭉 공자님은 말썽만 피워 왔어요. 안타깝게도 그간 공자님이 숱하게 저지른 잘못 때문에 칸트 공작성의 기사들뿐만 아니라 마르틴의 기사들까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의심스럽게? 나를?”
“차기 시스크의 영주가 될 자격이 있을까? 우리들이 충성을 맹세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렇게 말입니다.”
“흠.”
‘요 계집애가?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 해도 말이 좀 심하잖아.’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 몸뚱이의 주인인 오마르는 그만큼 골치 아픈 놈이었다는 말이 된다.
“공작 각하께서 제임스 경을 고블린 산장으로 보내 체력 훈련을 맡기신 이유는 그와 공자님을 가깝게 만들려는 공작 각하의 깊은 생각 때문입니다. 공자님은 아버님의 그러한 믿음을 저버리시면 안 돼요.”
“알았어. 알았다고.”
손을 회회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으니까,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
“식사는 훈련을 마치신 다음에 하세요.”
매몰찬 말이었다.
“알았어. 그런데 제임스가 기다리고 있을까?”
“염려 마세요. 그는 돌고랩니다. 며칠이고 기다릴 사람이에요.”
결국 빅토리아에게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연무장으로 가게 되었다.
‘젠장! 조금만 일찍 나섰더라도 잔소리를 듣지 않았을 텐데. 저 계집의 입을 닫게 만들 무슨 묘안이 없을까?’
나는 연애는커녕 여성과 마주 앉아 본 적도 거의 없다.
손?
이성의 손이라 생각하고 여성의 손을 만진 적도 없다.
‘연애를 해 봤어야 여성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알 텐데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참 예쁘고 귀여운데 입만 열면 짜증이 난단 말이지. 아이고, 맙소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견과 잔소리를 막아야 해. 안 그러면 이 나이에 대머리가 되고 말 것이다.’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스트레스였다.
***
마르틴 왕국은 예부터 풍족한 자원과 비옥한 땅, 거기에다 사시사철 적당히 내려 주는 비 때문에 해마다 풍년이 드는 땅으로 유명했다.
영토도 제법 넓어 웬만한 제국의 오 분지 일 정도에 해당한다. 인구는 무려 천만.
수도 말보 시티를 비롯해서 서부의 팔만, 동부의 마르크, 남부의 시스크. 이렇게 4개의 대도시와 10여 개의 중규모 도시, 백여 개의 소도시와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자급자족이 가능한 왕국이 마르틴이다.
문제는 마르틴이 젖과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한 땅이라는데 있었다.
외세의 침략이 끊이질 않았다.
3차 대륙통일전쟁 때에는 왕국이 거의 멸망당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용병과 어쎄신의 나라 베이킨 왕국은 수시로 마르틴을 침공했다. 북부의 바탄 제국도 무리한 요구를 하며 압력을 가해 왔다. 칭신을 강요하며 조공을 요구했고, 불응하면 침공할 뜻을 비치며 위협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드래곤 산맥 덕분이었다.
실로 험악한 드래곤 산맥은 마치 호로병처럼 마르틴을 둘러싸고 있었다. 드래곤 산맥은 블랙 드래곤 알프세스의 땅이자 몬스터의 땅이었다. 허락 받지 않은 인간은 발을 디딜 수 없는 곳.
그래서 마르틴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황금마차 들판을 지나야 한다. 왕국으로 통하는 입구가 하나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다.
황금마차 들판의 입구는 한껏 기울어진 언덕으로 되어 있어서 이 언덕을 방어한다면 그 누구도 황금마차 들판에 발을 디딜 수 없다.
거기다 황금마차 들판을 가로막고 있는 언덕은 곳곳이 파여 있거나 늪으로 덮여 있었다.
거대한 암석들이 길을 막거나, 잘못 디디면 뼈가 부러질 정도로 험준한 벼랑들이 즐비하다.
해서 대륙에서 마르틴으로 통하는 길은 마르틴의 선대왕이 만들어 놓은 널찍한 대로가 전부였다.
과거, 침입자들과의 전투는 이렇게 만들어진 대로나 기울어진 언덕에서 펼쳐졌다.
아래에서 위를 향해 공격하는 것은 실로 한 수 접은 채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다 마르틴은 물자 또한 풍부하다. 버티기만 해도 이긴다는 말이다.
역대 마르틴의 왕들은 제법 현명했고 뛰어나서 재정은 탄탄했고 군세의 힘도 강했다.
용감했던 왕들은 주변 강국의 칭신 요구를 묵살하고 조공을 거부하며 싸움을 선택했다.
결과는 참혹했지만 마르틴은 지지 않았다.
특히 마르틴 왕국의 현왕은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여건을 발판으로 삼아 마르틴을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마르틴에 군침을 흘린 침략자들은 자신만만하게 진격했다가 비 맞은 개처럼 꼬리를 말고 퇴각해야 했다.
몇 차례의 대단위 침공이 무위로 끝나자 그들은 결국 마르틴을 별세계로 인정해 버렸다.
현왕 하이드 랑게의 뛰어난 능력이 그들의 욕심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끝난 후, 마르틴의 현왕 하이드 랑게는 절대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