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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무적 오마르 1권(20화)
제7장 구스타프와 거래를 하다(2)


‘아마도 내가 마법보다 마나 수련에 더 관심을 기울이자 수작을 부린 것일 테다. 자신이 마법사이니 나와 구스타프의 관심을 은근슬쩍 마법 쪽으로 몰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너를 보니 한 달 전과 또 다르구나. 네가 화염계 마법의 친화력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나를 다루는 투사의 자질도 가지고 있는지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뭔 말이 이렇게 많지? 도대체 대련을 하겠다는 것이야, 아니면 말겠다는 뜻이야.’
까딱하다가는 내 자식이 째보나 꼽추가 될지도 몰랐기에 나는 조급했다.
“그러니까 저를 테스트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저와 대련해서 제 능력을 직접 확인하십시오. 제 생각은 6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법이 싫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마나 수련이 맞습니다. 마나 수련을 더 좋아한단 말입니다.”
약간의 도발까지 감수했다. 그러나 나의 의도는 여지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구스타프가 손톱으로 탁자를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허락하겠다.”
“네?”
“너의 마나 수련을 허락하겠다는 말이다. 마법을 공부하는 것은 당분간 미루도록 해라. 단, 쿠퍼 경과의 공부는 빼 먹으면 안 된다.”
“하루에 한 차례씩 꼬박꼬박 말입니까?”
나를 인정해 주겠다는 뜻인데, 어리벙벙해서 기쁘고 자시고도 없었다.
“네 진경을 보니 그것은 무리겠지? 일주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쿠퍼 경에게 공부를 하도록 해라. 쿠퍼 경같이 박학다식한 인재도 드물다. 또한 그는 마법사라서 너에게 많은 도움이 있을 것이다. 네가 내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마법사든 투사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를 통해서 마법사들도 많이 만나 보도록 해라.”
어느 정도 기간의 여유까지 주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크게 선심을 쓰는 것 같다. 그러나 ‘물려받으려면’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의심쩍게 생각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기도 한가 보다.
“이왕 하기로 했으니 마나 수련에 매진하도록 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지원해 주겠다. 네 성과를 보고 난 다음, 너를 마르틴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겠다. 그곳에서 너의 기량을 갈고닦아라. 너의 꿈을 마음껏 펼쳐 보도록 해라.”
과연 구스타프였다. 결단도 빨랐지만 결정을 하고 난 후에는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와 대련은 꼭 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구스타프는 단호했다.
“그것은 허락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너와 대련을 하겠느냐. 나는 또다시 자식을 때리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
‘꼴통이라더니 지난 3년 동안 많이 맞고 지냈나 보군.’
“아닙니다. 아버지는 저의 목표였습니다.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구스타프의 눈썹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내가 너의 목표였다고?”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통해 변한 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설령 또 맞으면 어떻습니다. 상처는 포션으로 치료하면 그만 아닙니까?”
“마음은……? 마음의 상처도 포션으로 치료되더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하.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잠을 못 이룬다고 했습니다. 맞는 것이 뭐가 두려울까요. 저에게는 그따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따위?”
갑자기 구스타프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폭사되었다.
얼핏, 나의 야수적 감각은 그가 살기마저 띠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씻어지지 않았구나. 나는 네가 변한 모습을 보여 그때의 일은 다 잊은 줄 알았다.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느냐?”
‘그 일’이 뭔지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풀풀 날리는 무서운 기세도 나의 투지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지 말고 저와 한번 비무해 주십시오. 딱 한 번이면 됩니다.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몇 수를 견뎠는지는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부도 곁들였다.
“못된 녀석, 나와 꼭 싸우고 싶으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제가 왜 그렇게 열심히 수련을 했겠습니까. 그게 다…….”
“시끄럽다.”
구스타프가 사납게 탁자를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오동나무 탁자가 부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구르다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구스타프가 불같이 노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버지인 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이냐? 그래서 나를 꺾고 싶으냐? 아직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지?’
나는 구스타프를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그게 구스타프의 화를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구스타프가 벌떡 일어서더니 크게 소리쳤다.
“멍청한 놈, 그 아이는 창녀의 딸이었다. 그것도 숱한 귀족들과 놀아난 더러운 계집의 딸. 그런데 결혼시켜 달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했느냐?”
이상한 말에 멍했고, 곧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런 하찮은 계집의 딸을 사랑한 것이 자랑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세상에 맙소사. 나에게 도전하겠다니, 그 말은 나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뜻이 아니냐. 대련을 빌미로 아버지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뜻이냐?”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치도 않는…….”
“닥쳐라. 창녀와 그 딸을 비롯해서 일가친척까지 씨 몰살을 시켰다. 말리는 네 삼촌까지 죽이려 했다. 그런데 눈 밖에 난 너를 용서할까? 어림도 없다. 네가 그 천한 것과 몰래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너는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작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삼촌?’
갑자기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기억의 편린들이 칼날 달린 풍차처럼 빙빙 돌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치미는 화를 주체할 수 없어 모든 연을 끊으려 했다. 그 정도로 참았던 것도 최후의 순간에 네가 멈추었기 때문이다.”
구스타프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얼굴을 비롯해 목덜미까지 후끈 달아올라 홍시처럼 빨개 보였다.
“네가 나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욘에 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다.”
‘그래, 욘.’
마르틴의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욘.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비극의 발단은 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창녀와 그 창녀의 딸인 계집아이를 죽이고 괴소문을 수군거리는 자들만 골라서 죽인 것도, 다…… 너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원한으로 여기고 있었구나. 너를 용서하고, 네 과거를 덮으려 한 나의 결단이 그렇게 한이 사무쳤더냐? 대련을 빌미로 삼아 복수를 하고 싶더냐? 그렇게 행동해서 아비의 가슴에 못을 박으려고?”
불현듯 구스타프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렸다.
그의 두 눈은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아느냐? 그 계집아이의 몸에 너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데 그 결혼이 가당키나 한 것이겠느냐?”
그 말이 결정타였다.
“크으윽.”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극심한 두통으로 인해 눈앞의 사물이 하얗게만 보였다. 속이 메슥거리고 둔기에 미간을 맞은 듯 눈앞에 불꽃이 어른거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천재가 왜 바보가 되었는지, 왜 색욕에 빠져 허우적거렸는지, 왜 마약에 절어 세월을 탕진했는지, 부모자식 관계가 왜 이렇게 서먹서먹하고 이상한지.
‘에밀리…….’
갑자기 기억의 편린들이 뭉쳐지며 어떤 소녀의 모습을 그려 냈다.
참한 소녀였다. 귀엽게 생겼고 행실도 발랐다.
동그란 눈과 복스러운 코는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눈빛은 연한 녹색을 띠고 도톰한 볼은 풋풋한 햇과일이 익은 것처럼 발그스름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오마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애달파 하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 고백을 받아 줬을 때, 오마르는 벅차오르는 희열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함성을 질렀었다.
미친놈처럼 공작성을 돌며 껄껄 웃었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기뻐했다.
그런데 그만…….
채 사랑의 결실을 보기도 전에 그녀가 죽은 것이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녀는 펀치 가문의 피가 아니라고요. 외모를 보고도 모릅니까? 외삼촌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뇌리 속의 오마르가 그렇게 절규했다.
‘아버지는 단지 그녀가 싫었을 뿐입니다. 시스크의 소영주가 창녀의 딸과 결혼한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죠. 어머니가 산고로 죽자 내가 싫었던 것입니다. 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밉고 나를 감싸는 외삼촌까지 넌덜머리를 냈던 것입니다. 모두 다 죽은 어머니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사라지자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마르는 울고 있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제가 보는 앞에서……. 아시겠습니까? 저는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눈앞에서 죽었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술에 빠졌고 마약에 기댔던 것입니다. 저를 망치는 것이 복수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왜엑.”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배 속의 이물질을 토하고 말았다.
가쁜 숨을 컥컥 내쉬며 머리를 들었다.
“…….”
구스타프는 분노와 절망감, 후회, 자책감에 물든 복잡한 감정을 띤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구제 불능입니다. 가문을 지킨다는 핑계로 아들의 인생을 망쳤습니다. 단지 저와 에밀리의 관계를 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저는 구제 불능의 자식입니다.’
일순 나타나서 뭔가를 알려 주었던 오마르는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흐흐.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맹세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때 오마르는 죽은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마르는 죽었다고요. 이제 아버지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겠습니다.’
흐릿해져 가는 영상처럼 목소리도 작아졌다.
종국에는 그가 말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결국 사라진 오마르의 영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뇌리 속에 숨어 있던 기억의 편린조차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다.
“으…….”
꼭꼭 숨겨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큰 사건이 있었는지 내가 몰랐던 것이다.
그랬는데 구스타프로 인해서 그것이 폭발되었다.
아마도 오마르는 마음이 여렸을 것이다. 용기 없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후의 절규조차 원망이었던 것도, 각성으로 폭발한 기억의 편린조차도 오래 버티지 못한 것도, 계속해서 내가 악몽을 꾸었던 것도.
모든 것이 미루어 짐작이 갔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내가 세차게 머리를 털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밝혀서는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
“대련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구스타프는 말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거운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나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당분간…… 당분간은 고블린 산에서 지내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온몸이 치열한 격전을 치른 후처럼 노곤했다.
휘청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무릇, 남들이 부러워하는 세력가에게는 밝히기 힘든 수치와 비밀이 한 가지씩은 있다더니 오마르와 구스타프의 경우가 그랬구나. 마찬가지였구나.’
기억 속의 오마르가 만들어 준 영상과 소리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나의 귓가에서 왱왱거렸다.
두통은 사라졌지만 가슴이 뻥 뚫린 듯 알지 못할 상실감이 나를 괴롭혔다.
영원히 사라지겠다는 그 목소리는 왜 그렇게 애처롭게 느껴졌을까. 왜 여운처럼 남아서 나를 서럽게 만드는 것일까.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겪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아련한지 나도 몰랐다.
‘한동안 좀 쉬어야겠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겠어.’
구스타프와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오마르에 대해서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나가는 나의 등에 대고 구스타프가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다시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 얘기도 꺼내지 않았으면 한다.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말이다. 오늘 일을 잊어라. 약속해 줄 수 있겠느냐?”
내가 먼저 꺼낸 것이 아니다.
‘창녀와 그녀의 딸’ 얘기는 구스타프가 먼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먼저 꺼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는 한 번 터져야 할 종기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구스타프는 변해 가는 나를 보며 이런 말이 나올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아니,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가 대련을 요구하자 오해를 했고 곪을 대로 곪은 과거가 터진 것이다.
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먼저 과거를 꺼내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막 문을 나서려는데 구스타프가 다시 말했다.
“구태여 네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사과를 받아 내고, 나를 이기는 방법이 없지 않다는 말이다.”
잠시 생각했다.
‘복잡한 과거를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설령 되돌아간다 해도 해결 방법이 없을 것이다.’
“관심이 있느냐?”
“말씀해 보십시오.”
“고블린 산 깊숙한 곳에 카미르 계곡이 있다. 그곳에는 고약한 능력을 가진 미노타우로스(Minotauros)가 살고 있다. 카미르 계곡의 왕이다. 투 헤드 오우거에 비견할 만한…… 그놈의 뿔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너의 자질과 능력을 내 인정해 주겠다. 더불어 너에게 사과도 하마. 내가 틀렸기를, 부디 네 스스로 증명했으면 좋겠다.”
일종의 거래 같았지만, 복잡한 암시가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떤 판단이 옳은지 속단할 수 없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