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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무적 오마르 1권(21화)
제7장 구스타프와 거래를 하다(3)
***
마르틴의 봄은 3월 말부터 4월 초순 사이에 찾아온다.
올해의 봄은 좀 늦어 4월 중순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날씨는 쌀쌀했다.
밤이면 칼바람 같은 냉풍이 쌩 하고 불어 겨울인지 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공자님.”
방에서 누워 있는데 제임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오늘도 연무는 쉬는 것입니까?”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채우는 김에 일주일을 채우자. 이틀 남았지?”
제임스가 황망해 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
‘있기는 있었지. 하지만 말해 주기 곤란해. 네가 그 사실을 알면 오우거 슬레이어가 네 목을 댕강 잘라 버릴걸?’
딱히 제임스의 질문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연스럽게 오마르의 잔영이 떠올랐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절규하는 오마르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아버지가 밉습니다. 다시는 아버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마르의 절규는 마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귀신 같았다.
즉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나중이라도 욘에 한번 찾아가 봐야 하는 것일까?’
욘에 가면 외삼촌인 발룬 펀치 백작을 만날 수 있다. 얽히고설킨 과거의 비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니 오마르의 첫사랑 에밀리에 대한 것과 아버지 구스타프의 분노에 대해 보다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 구스타프의 진심을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욘에 가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전하는 제임스의 말을 빌려 보면 발룬 펀치는 이름뿐인 욘의 영주란다. 아버지 구스타프의 미움을 사서 욘과 욘 인근의 영지에 대한 지배권이 거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도 만나 주지 않을뿐더러, 만약 만났다가는 발룬 백작의 목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그러니까 나로 인해 욘에 혈풍이 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능력을 가졌을 때. 확인은 그때 하자.’
머리를 털며 내가 말했다.
“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너도 좀 쉬지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잖아.”
뭔가에 골몰하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유의 깊게 나를 보던 제임스가 말을 받았다.
“고생은요. 지난 6개월은 저에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변한 제 자신을 보고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다 공자님 덕분이지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다행이고.”
“그런데 며칠 동안 혼자 연무장에 있으니 여간 쓸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놀았어요.”
제임스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그래? 그럼 노는 김에 팍 놀자.”
“하여튼 공자님이 계셔야 됩니다. 그래야 신이 나고 활기가 솟습니다. 재미도 그만이거든요.”
“너는 훈련을 재미로 하냐?”
“재미도 재미지만 훈련에 성과가 있잖습니까? 요즘에는 좀도 쑤시고……. 이젠 쉴 만큼 쉬었나 봅니다. 하루하루가 지겹습니다.”
“그러면 술이라도 한잔할까? 어때?”
제임스가 히죽 웃었다.
“꼭 그러시겠다면 대작을 마다하진 않겠습니다.”
그때부터 나와 제임스는 다이닝 룸에서 질펀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아가씨가 무척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취기 때문에 제임스의 얼굴은 빨갰다.
“왜? 내가 공부도 안 하고 수련도 안 하기 때문에?”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공자님이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눈물까지 보이시던데요. 상심이 하도 커서 곁에 있는 제가 어쩔 줄 모르겠더군요. 공자님이 달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경 꺼. 여자에게 휘둘리는 남자치고 잘되는 꼴을 못 봤어. 너는 내가 빅토리아에게 잡혀 살았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요. 아가씨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얼마나 조신하고 얌전하신 분인데요.”
“쩝. 너도 그 아이에게 깜박 속고 있구나. 사실은 말이야…….”
험담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임스는 수하다. 나중에는 군신 관계가 될 것이다. 내 마누라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수하에게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채신머리없는 짓이다.
“그만두자. 그만둬. 제가 아무리 그래도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되니까.”
뭣도 모르면서 제임스가 맞장구쳤다.
“맞습니다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만 보면 제임스 이 녀석도 말투가 나랑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전 같으면 딱 부러지게 ‘다’로 끝나는 말투였는데 이제는 ‘요’ 자를 붙이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님, 각하와 아가씨께서는 무사히 가셨겠지요?”
“이봐, 철혈의 재상이 움직이는데 뭘 걱정한단 말이야.”
“아닙니다. 요즘은 오크들의 이동 철이 아닙니까. 혹시 몰라 걱정이 되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네 친구들도 수행하고 있잖아. 쿠퍼 경도 있는데 뭐. 걱정하지 마. 수백 마리가 떼 지어 덤벼들지만 않는다면 별일이야 있으려고.”
“그 수백 마리 때문에 제가 걱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백이 아니라 무려 천 마리 이상이 떼 지어 이동하기도 하거든요.”
“그래?”
좀 놀랐다.
“오크들은 왜 봄철만 되면 이동을 하는 거지?”
제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아무도 모르지요.”
말이 나온 김에 평상시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혹시 말이야. 너 알프세스라고 알아?”
“알고말고요. 마르틴의 좌우 산맥이 왜 드래곤 산맥이겠습니까. 블랙 드래곤 알프세스가 살고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닙니까. 알프세스는 드래곤 중에서도 왕,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알프세스라는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니냐는 거지. 그래서 오크들이 좌우 산맥을 번갈아 가며 이동을 한다, 이 말이야.”
“수작요? 무슨 수작 말입니까? 그가 이유가 있어서 오크들의 이동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혀를 찼다.
“미스터리라며. 내가 그걸 알면 미스터리겠어?”
“알프세스는 드래곤 아닙니까. 무려 수천 년 동안 알프세스는 드래곤 산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어 자연으로 회귀를 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천 년 동안 알프세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변덕이 심한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런다고 자신에게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요. 저는 드래곤 때문에 오크들이 이동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 여부를 인간들에게 각인시키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지. 이놈들아,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니 함부로 드래곤 산맥에 발을 디디지 마라. 뭐 이런 식 말이야.”
내가 만약 전설이 말하는 드래곤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거의 동화책 수준에서만 드래곤을 언급하고 있지, 실제로 드래곤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타났다는 기록도, 인간들을 도우거나 해쳤다는 흔적도, 증거도 없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드래곤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가진 용이 있다면 왜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세상을 향해 왜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지 않는 것일까?
전설치고는 너무 공갈이 심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전설인 것이다.
중간계의 질서를 유지한다?
이 말이 더 웃긴다.
마계, 신계, 중간계라는 같잖은 단어도 그렇지만 지가 무슨 정의의 사도인가? 질서를 유지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힘과 능력이 있으면 권력이 생기며, 권력은 명예를 부른다. 권력과 명예에는 이득이 생기며, 이득에는 욕망이 따르고 이득과 욕망이 존재하면 부패가 끓기 마련이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의 선후 관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인간이건 드래곤이건 지성을 가진 모든 존재는 권력, 명예, 이득의 욕망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모든 것에는 필히 음모와 부패라는 놈이 존재한다.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지가 무림의 은자도 아니면서, 독야청청하는 선비도 아니면서, 왜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있겠는가 말이다.
욕심 많고 변덕이 심한 종족이라고 했으니 도를 닦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답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허풍.
전설은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가 지어낸 공갈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도 이계에 존재하는 이해 못할 현상의 하나라 단정 짓고 있었다.
제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것 역시 공자님의 의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요?”
“어쭈? 너 이 녀석, 요즘 좀 기어오르는 경향이 있는데 말이야. 우리 밖으로 나가서 한판 붙을까?”
제임스가 시시덕거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습니다. 당장 나갈까요?”
이 녀석이 일부러 나에게 도발을 했나?
귀찮아진 내가 손을 회회 저었다.
“됐다. 오늘은 술이나 마시자. 혼내 주는 것은 이틀 후로 미루마.”
***
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물론이고 오마르의 잔상까지 나를 괴롭히자 나는 한동안 중심을 잡지 못했다.
이럴 때는 무작정 노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서 놀았던 것이다. 실컷 먹고 실컷 자고…….
오로지 그렇게만 보냈다. 남들이 볼 때에는 빈둥빈둥 노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며칠을 보내자 대충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마르야 사라진 것이고, 다시는 나의 뇌리에서 불쑥 나타나 질질 짜지 않을 것이다.
좀 불쌍하기는 했지만 오마르는 오마르고, 나는 곽비인 것이다.
다만 내가 오마르의 껍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과거를 살필 생각은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시기가 될 수 없었다.
“이왕 이계에 적응하기로 한 이상 쓸데없이 고민만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원했던 목표를 이루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다음 날 정오, 나는 혼자 산장을 나섰다.
술을 먹고 제법 놀자 제임스 못지않게 내 몸도 근질근질하던 터였다.
따분함도 해결하고, 아버지 구스타프의 거래도 해결하고, 내 능력도 테스트할 수 있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빠르게 걸어 산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즈음의 암향표는 제법 성과가 있어서 전력을 다하자 한 걸음에 6미터씩 전진할 정도로 놀라운 이동 속도를 보였다.
인근의 고블린들은 ‘무참히 학살을 하는 존재’가 나타나자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간혹 마주친 맹수들이 겁도 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놈들은 내가 피했다.
목표를 만나기 전에 피 냄새를 묻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산을 넘고 언덕을 지났다.
깊은 계곡 하나를 지났을 때는 석양이 대지를 붉게 물들일 즈음이었다.
싸늘한 공기에 함유되어 있는 것은 익숙한 냄새였다.
지독한 고린내와 찐득찐득하고 짜릿한 피 냄새.
아주 미약했지만 나는 피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능력이 향상되면서 피에 대한 나의 본능도 살아나고 있었다.
아마 10여 마리의 짐승들과 10여 마리의 하위 몬스터들이 죽었을 것이다. 냄새만으로 추측했지만 죽은 숫자에는 그리 큰 오차는 없을 것이다.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기척을 숨기고 나를 숨겼으며 호흡조차 숨겼다.
내 몸은 즉시 시체처럼 죽어 버렸다.
유령처럼 전진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더러운 늪을 지나면서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늪의 건너편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솜털이 바늘처럼 곤두서서 재킷의 소매를 찔러 댔다.
‘이거 생각보다 대단한 놈인데?’
두두둑.
목을 좌우로 돌렸다. 손을 깍지 껴서 이리저리 비틀었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활을 든 홉 고블린 이후로 이계에서 처음으로 감지되는 강자인 것이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한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
긴장과 동시에 짜릿한 흥분이 내 몸을 훑었다.
피 냄새를 맡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율이었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꼬리뼈까지 저릿저릿했다.
과거의 나는 이런 분위기를 즐겼다. 무림삼마 중 하나였을 때 하루하루가 긴장과 피의 연속이었다.
강했기에 살아남았고 잔인했기에 삼마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무림의 포식자였다.
나보다 약한 놈은 목덜미를 물어뜯고 피를 마셨다. 덜덜 떠는 녀석들의 심장을 파먹을 때는 그야말로 통쾌했다.
비록 멸망 직전의 무림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범죄이기는 했지만, 무영마공의 마성(魔性)이 저지른 악행이기는 했지만, 그때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런 분위기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잔혹한 만행이 주는 흥분을 즐겼다고나 할까?
‘흐흐. 위기는 친구고 공포는 나의 동지다. 이래야 나임을 느낀다. 이런 위기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나다. 오마르 때문에 며칠을 소비했지만 이제는 오마르의 이름으로 곽비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천하제일마. 그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