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2화
5. 귀족(2)


여러 상인들은 호비트들의 단점인 칭찬에 약하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이렇게 계속된 입바른 소리를 해 왔다. 기분이 좋아진 호비트들은 지정된 물품 이외의 것들도 가리지 않고 모두 구매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샘 나리. 다음은 그 소문의 아이스크림과 포션을 파는 아이작 잡화점입니다.”
“오호, 그 소문에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겠군.”
샘은 기대에 부푼 얼굴로 아이작 잡화점으로 향하였다. 잡화점의 입구에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은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잡화점의 직원들에게 욕설을 내뱉지만, 그 누구도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귀족 같아 보이는데 왜 이곳에 입장을 못하는 것이지?”
“그것은…….”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하여 아무나 입장할 수 없으며 귀족이라고 하여도 미리 예약 하지 않으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입구에 문을 열고 나온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내는 친절하게 그들에게 대신 설명을 하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녹티스 상단의 상단주인 로스트라고 합니다.”
“검은 머리카락이로구만.”
“마족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이종족들은 특히 마족을 혐오하며 증오하였는데 주신 가이아의 의지를 반한 타락한 신들 중 하나가 마족과 손을 잡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흥, 알고 있어. 그 정도도 간파를 못할 것 같았나? 하지만 자네는 무엇인가 조금 비틀려져 있구만. 그래, 나를 보고 싶다고 전부터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네.”
“일단은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여기, 특제 아이스크림을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호비트는 검은 머리카락의 나를 보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경계를 취하다가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에 경계를 풀고 신이 난 표정으로 나를 따라 집무실로 향하였다.
“저희 상단은 이종족과 전속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희의 터를 크라델 산맥과 이종족이 사는 영토 안에 자리 잡고 싶습니다.”
“흐음,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일세. 내 권한을 넘었음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지의 왕국이자 위대한 호비트들의 대표이신 샘 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다른 분들도 쉽게 그 말을 믿고 따를 것이라 생각하여 일부러 샘 님이 왕국에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푸히히히. 뭔가를 아는 상인이구만.”
“일단은 이것부터 드시고 나머지 말씀을 나누시지요.”
마침 여직원이 가지고 온 특제 아이스크림은 나무로 만들어진 큰 그릇에 가득하게 담긴 거대한 아이스크림이었다. 샘을 위해 특별히 만든 이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잘 어우러져 많은 양을 먹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 맛을 자랑하였고 그 양마저 엄청나니 호비트의 마음을 채우고도 남으리라.
“노, 놀랍도다. 어떻게 이런 맛이…….”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저희가 크라델 산맥에 터를 잡게 된다면 이런 아이스크림을 매일 만들어 드릴 수 있을 텐데 아쉽군요.”
“……라.”
“네?”
“당장 옮기도록 하여라.”
“정말이십니까?”
“그래, 나 대지의 왕국 토가의 대표이자 이종족들의 대표 샘이 허락하겠다.”
“하지만 아까는 권한 밖이라고?”
“이런 훌륭한 음식이라면 다른 종족들의 대표들도 기꺼이 허락할 것이다. 아니, 허락하게 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대지의 왕국을 믿고 일을 실행하겠습니다.”
“그래, 좋다. 그런데 남는 아이스크림은 더 없느냐?”
“죄송하지만 너무 많은 양을 먹게 되면 배탈이 날 수 있습니다.”
“끙, 아쉽구나.”
“그렇다면 조그마한 아이스크림이라도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풀이 죽은 호비트 샘은 조그마한 아이스크림을 받고는 금방 웃음을 띠고 호탕한 목소리로 지부를 당장 옮기라며 큰소리를 질렀고, 첫 번째 계획인 크라델 산맥의 터를 알아봐 줄 호비트 종족의 설득은 그렇게 무사히 마무리 짓게 되었다.

* * *

주신의 사자이자 어둠의 주시자의 일부분을 집어삼킨 타락한 별 이단자(異端者) 라빈단이여.

그대가 원하는 절망과 그대가 갈구하는 좌절의 문턱에 한 발자국 다가섰도다. 하지만 잊지 말지어다.

별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다섯 개의 불꽃 속에서 하나의 별이 탄생하고 네 개의 타락한 별들이 만나 망각의 문을 열지어다.



6. 상단 건설(1)


크라델 산맥은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붉은 이빨 분지, 돌무덤, 검은 나무숲, 잿빛 골짜기.
산맥에 대부분이 붉은 이빨 분지로 코볼트와 오크, 아메바의 영역이며 돌무덤은 애스코모이드(Ascomoid)라는 거대한 버섯 모습을 지닌 몬스터와 킹배트(King Bat:대형 박쥐)의 영역이다. 검은 나무숲은 그림자 부족이라는 야만인 부족이 살며 인근에 몬스터의 출입을 통제한다.
마지막 잿빛 골짜기에는 비홀더(Beholder)와 놀(Noll)의 영역으로 대형 몬스터가 주를 이룬다. 복잡한 지형 구조 덕분에 한 번 그곳으로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아 절망의 골짜기라고도 불린다.

산맥은 험했고 사람들은 지쳐갔다. 하지만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여섯 달 전. 세르핀 마을 광장 앞.

“여기 모인 1,000명은 ‘아이작 잡화점’에서 뽑고 뽑은 우수한 인재들이다. 나는 자네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대부분이 녹티스 상단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 봤을 것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녹티스 상단은 최고의 상단이다. 아이작 잡화점 역시 녹티스 상단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녹티스 상단은 왕국뿐만 아니라 제국, 아니, 나아가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릴 상단이 될 것이며 나는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정식 녹티스 상단의 직원을 채용할 예정이다. 물론 이곳에서 바로 채용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대들의 실력이 일반인들 중에 출중하다고 하나 아직 배울 것이 많다. 그렇기에 직원으로 채용하기에 앞서 체험 학습과 예비 교육 등을 통해 이를 이수한 우수한 인재만을 직원으로 채용할 계획이다. 하루 기본 임금은 5브론즈이며 우수한 실력으로 교육을 마치거나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들에게는 그 실력에 걸맞은 금액을 더 얹혀 주겠다. 질문 있나? 그래, 자네.”
사람들은 너무 놀라운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그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의문을 표했다.
“상단은 일꾼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일단은 물건을 지킬 수 있는 호위 기사나 전사, 용병들이 필요하며 시세를 잘 아는 상인, 물건이 상하거나 손상되는 것을 막는 마법사, 길잡이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상단주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준비하셨는지요?”
“자네, 이름이 뭐지?”
“휴(Hugh)라고 합니다.”
“그래, 휴 군. 좋은 질문이다. 우리 상단에서 주로 팔 물건은 소문의 아이스크림과 광폭 포션 그리고 해산물이 될 것이다. 추후에 새로운 신기한 물품들이 추가될 예정이지만 일단 지금 팔 것은 이것들이다. 우리 상단은 크라델 산맥을 거점으로 삼아 북쪽으로 이종족들의 제국 리프와 거래를 하며 서쪽의 사막 왕국 데스타드, 동쪽의 자유 왕국 에스페란트와 거래를 할 예정이다. 물론 호위나 길잡이 등은 구해 놨으며 뛰어난 마법사도 있다. 또한, 우리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일꾼들에게도 약간의 무술과 마법을 가르칠 예정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용병 길드와 장기 계약을 맺어 위험을 최소화할 예정이며 사냥꾼과 궁수들도 대다수 고용할 계획이다. 다른 질문 있나?”
“크라델 산맥을 기점으로 삼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 아닌가요?”
“몬스터에 대한 걱정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몬스터 산맥에 우리를 도와줄 협조자를 구해 놨으며 이번에 그곳에 교육 시설과 상단의 지부를 설립하고 각종 기지를 설치하여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할 것이다. 처음은 어렵고 힘든 길이 될 것이다. 죽거나 병신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는 법. 모두 잘 생각하여 상단에 취직할 마음이 있다면 내일 이곳에 모여 주기 바란다. 그럼 이상.”
연설을 끝마치고 나는 크라델 산맥으로 떠날 계획을 준비하였다. 지부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몬스터의 침공이 적으며 적은 수로도 많은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춘 터가 필요했고 수많은 재료와 자재들을 그곳으로 옮겨야 했으며 건축에 관련된 인원들도 필요했다.
또한, 직원들에게 무술을 가르칠 교관들과 마법사 등이 필요했으며 위험에 대비할 용병과 전사, 궁수, 사냥꾼들도 모집해야 했다. 대장간에서 무기도 제작해야 했으며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믹서기와 냉장고도 옮겨야 했다. 계획은 석 달 안에 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진심 된 말에 감명받은 것일까? 아니면 높은 임금 때문일까? 1,000명이라는 많은 인원 중에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빠짐없이 지원하였고 추가로 지원하는 인원들도 생겨났다. 나는 지원자 모두에게 기본적인 체력을 기르는 운동과 간단한 무술 등을 익히게 하였고 얼마 되지 않는 인맥을 총출동시켰다.
일단 땅의 종족이라 불리는 호비트들의 대표 샘에게는 요구 조건에 알맞은 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였고 앙리의 가즈온가에서 마정석과 각종 광물을 대량 구매하였다. 루팡가에서 건축과 건설에 뛰어난 장인들을 섭외하였으며 도로시의 가문에서 제법 똑똑한 학자 출신의 관리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엠마였다. 그녀는 마법사의 가문답게 마법스크롤과 마정석을 상당수 구해 주었으며 기지 등을 보호할 마법진을 그려 줄 마법사와 각종 재료 등을 지원해 주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처음 소개받을 당시만 하여도 많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단의 발전을 위해서 그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고 결국 현실과 함께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달리 먹어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한층 그녀에게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에 나도 놀라 당황할 정도로 혼란스러웠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수긍하고 한결 마음을 편히 먹었다.

나는 꽃을 들고 마을 광장에서 엠마를 기다렸다. 마을 중앙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며 시원한 바람이 나를 맞이한다. 이것이 행복인가? 나는 분수대 아래로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보며 웃는 연습을 해 보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맑은 물 안에는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는 20대 후반의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이곳에 온 이래로 처음 바라보는 얼굴이다.
‘얼마 만에 웃어 보는 것이지?’
물가에 비치는 무표정한 사내가 열심히 마른 입가를 들어 올리며 웃음 짓는 모습이란 영 어색하고 참으로 웃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화려한 마차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마부는 마차의 속도를 줄이며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고 네 마리의 말은 콧김을 내뿜으며 멈춰 섰다. 뽀얀 먼지가 가라앉으며 마차의 문이 열렸고 백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엠마와 담갈색의 바지에 붉은빛이 맴도는 튜닉을 입은 앙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