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5화
7. 왕의 초대(1)


모든 문제는 한 장의 편지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로 만들어진 편지에는 왕가의 것임을 증명하는 황금을 녹여서 새겨 넣은 문장과 화려한 문체의 검은 빛의 글씨체로 ‘초대장’이라는 목적을 그 색만큼이나 단조롭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왕가에서는 배알도 없는 것인가?”
“귀족들의 사교 모임입니다. 한 번쯤 가 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하인츠, 왕이 노리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은 아마도 화해와 왕의 권속 아래로 들어오라는 손짓이 아닐까요?”
“흥, 이미 늦었어. 이제 왕국에 대한 미련도 없으며 주 본거지도 크라델 산맥으로 옮겼으니 이제는 우리는 그 어느 왕국이나 제국의 소속도 아니야.”
“하지만 세르핀 마을과 아이작 잡화점은 왕의 소속이지요. 왕가에서 걸고넘어진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저희입니다.”
“파티에 참석을 안 하면 피해를 입는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아직은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설마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이겠습니까?”
“아, 역시 힘이 있어야 해. 없으면 이렇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불려 다니다가 뜯겨 먹히는 꼴이 되고 말 거야. 아참, 내가 전에 그려 준 물건은 어느 정도가 완성되었지?”
“그것은 아직 개발 중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가능한 물품인지?”
“물론이야.”
“어떻게 이런 게…….”
“현대적인 발상의 차이라고 생각해. 아참, 파티복이 없는데 한 벌 사야 하나?”
“물론입니다. 최고급 재단사를 불러서 옷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귀족들은 허영심으로 돈을 낭비한다. 예를 들자면 파티를 열거나 고급스러운 와인이나 장식품, 고급스러운 옷들을 구매하고 도박이나 여자 등에 빠져서 돈을 낭비한다. 그 때문일까? 귀족들의 옷들은 정말로 화려하고 요란하다.
그에 반해 내가 입는 옷들은 용병들이나 즐겨 입는 옷들이다. 황갈색의 바지에 초록빛이 맴도는 구멍이 송송 뚫린 오크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안에는 빛바랜 청회색의 셔츠까지. 돈으로는 왕국에서 제법 산다는 귀족들만큼 벌어들이지만, 옷에 대한 감각이며 센스는 많이 떨어졌다. 역시 현대적인 문명에서 살았던 나이기에 이곳에 옷들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옷이야. 대충 걸치고 다닐 만하면 되는 거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 돈이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으며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지금도 이리저리 상단을 확장하는 이유 역시 더욱 뛰어난 마법서를 구매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다. 허영심으로 낭비할 돈도 여유도 나에게는 없다.
나는 남은 돈으로 틈틈이 마법서나 필요한 서적을 구매하였고 하인츠에게도 그것들을 공개하여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그는 최근에 4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고 새로운 물품을 개발하는 기염을 토해 냈다.

* * *

사교 파티의 주최자인 왕은 궁전을 개방하였다. 검의 왕가답게 강철로 만들어진 ‘크로스성’은 3,000년도 더 된 오래된 고성이다.
성에는 5서클 미만의 마법을 방어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으며 수백 개의 감시대와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망루에는 횃불을 통해 신호를 보내는 감시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성벽 위에는 기사들과 석궁수들이 배치되어 혹시 모를 외부의 공격을 방어할 태세가 완벽히 갖춰져 있다.

거대한 적교가 내려오며 꾸불꾸불 이루어진 길과 연결되었다. 산을 깎아서 만든 이 길의 규모는 대단히 컸는데 대략 마차 8대가 왕복으로 다닐 수 있으며 도보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성안에는 1,000만이 넘는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500개가 넘는 대형 시장이 날마다 들어선다. 외성에는 내성으로 가는 길 주변으로는 고급스러운 저택들이 많았는데 내성 근처에 살수록 권세가 높고 돈이 많은 귀족이란다.
내성의 거대한 성벽이 열리며 내성 앞 외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채는 적을 대비하는 제1차 저지 망이자 파티를 여는 장소의 입구이기도 했다.
내채는 홀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는데 그 규모는 축구장을 방불케 하는 대단한 크기였다. 내채에 입장하기 위해 마차에 내린 귀족들은 마부들을 시켜 초청장을 전하였다. 하급 관리들은 고위 귀족이나 중요한 손님의 경우 입장을 알리며 나팔을 불었다.

파티의 규모나 장식의 화려함, 파티 준비의 치밀함 등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행사였고 자신보다 세력이 약한 귀족들을 자신 편으로 끌어 정치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그래서인가?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의상은 호화로움의 극치였으며 비싼 장신구와 최신 유행하는 패션들로 도배하고 있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아닙니다. 잘 어울리십니다.”
하인츠는 3서클의 마법사답게 몇 번의 사교 모임에 나간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리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 역시 오고 싶은 자리가 아니었기에 그리 떨리거나 긴장은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복장이었다.
바쁜 업무와 수련 때문에 아이작 영감에게 대충 고르라고 지시했던 옷들은 정말 화려함의 극치였다. 평소에 즐겨 입는 통이 넓은 평민이나 용병들이 입는 옷이 아닌 몸에 딱 달라붙는 타이츠(Tights)에 색은 왜 이렇게 요란한지. 시스킨색(옅은 녹황색)에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봉황을 수놓은 가죽신에 담갈색 타이츠 바지와 황금 단추가 붙어 있는 주황색 셔츠, 푸른빛의 기묘한 패턴의 문양이 그려진 에메랄드 조끼까지.
내가 신경 써서 만든 은으로 만든 외안경과 예전에 주운 회중시계를 보수하여 은으로 만든 줄을 단 것은 사치에 ‘사’ 자에도 끼지 못하리라. 게다가 고위 귀족도 아닌 나의 등장을 알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데?
“8등급 훈작사이자 녹티스 상단의 상단주이신 로스트 님과 부상단주이신 마법사 하인츠이십니다.”
요란한 ‘팡파르’ 소리와 함께 나팔이 울려 퍼졌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나를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바라보는 시선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에험, 소문에 상단의 주인이 직접 행차하셨구만. 반갑네.”
메기수염을 한 남자가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해 왔다. 그는 은근히 비꼬는 듯한 말투가 거슬리는 기분 나쁜 사내였다.
“녹티스 상단의 로스트입니다.”
“하하하, 나는 가빈스라네. 헨리 데 가빈스.”
그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정작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고민에 잠겨 있을 때 하인츠가 앞으로 나오며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가빈스 자작님이셨군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하인츠, 자네가 저자 밑으로 들어가다니 지금도 믿을 수 없군. 내가 괜찮은 가격에 포션을 구매해 주겠다고 몇 번이나 당부의 말로 자네를 설득했는데 아마 그게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야?”
“죄송합니다. 당시에는 워낙 경황이 없고 제가 지고 있는 빚이 상당수여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흥! 나에게 말했으면 그따위 빚쯤이야 얼마든지 청산해 줄 수도 있었는데…… 자네 큰 실수를 한 걸세.”
가빈스 자작은 노기를 띤 눈으로 나와 하인츠를 노려보다가 비웃음을 흘리고는 자리를 떠나갔다.
“누구지?”
“10대 상단 중 하나인 ‘가빈스 상단’의 주인이자 저희가 나타나기 전까지 포션 유통 사업을 도맡아 제법 큰돈을 만지던 작자지요. 제가 만든 포션을 날로 강탈하려는 날강도들 중 하나이고요.”
“기분 나쁜 작자야.”
“지금 생각해 보니 세금도 다 저 작자의 술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럴 수도 있겠군. 한창 지부 건설로 자금이 메마를 시점을 노린 절묘한 한 수였어. 하지만 왕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저자들에게 놀아날까?”
“그게…… 지금의 왕은 정치보다는 무술 쪽에 더 큰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검의 왕국의 국왕들은 정치보다 전쟁터에서 이름을 알리기를 선호하는 호전적인 왕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래? 나는 지금껏 국왕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것은 아마 왕의 장인 어르신이시자 우방국인 강철의 왕국 아르카이젠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바로 이종족의 제국 리프 때문이겠지요. 강철의 왕국과 검의 왕국의 시초는 이종족과 결혼한 인간들이니까요.”
“하프(Half)란 말인가?”
“정확히는 하프 오크(Half Orc)지요. 강철의 왕국은 하프 드워프(Half Dwarf)고요.”
내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낯익은 인물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잘 있었나? 요즘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루시딘 님.”
“하하하! 그때 큰 도움을 받아 놓고 자네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그냥 보내다니.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루시딘은 대대로 기사들을 배출한 명문가답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청해 왔고 나는 흔쾌히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루시딘의 란테우스 가문은 명문이지만 한때 일어났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고 음모에 휩싸여 백작에서 남작으로 강등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가문을 지킬 수 있었으며 많은 수모와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후계들의 모임에서는 로세에게 우두머리의 자격을 빼앗기고 가문의 핵심들은 다른 가문에 투신을 하는 등 겪은 일이 많아서일까? 루시딘의 얼굴은 꽤 수척해져 있었다.
“요즘,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자네만 하겠나. 조만간 세금에 대한 전면적인 철폐를 요구하는 귀족들의 모임이 있을 걸세.”
“란테우스 가문도 타격을 많이 본 모양입니다?”
“끙, 이번 세금 건으로 우리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하급 귀족들과 예전부터 함께 가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떠나갔네.”
“그 정도로 타격이 심하셨습니까?”
“우리뿐만이 아니지. 10대 상단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음모를 꾸몄는지 모르겠네만 그들의 음모에 하루에도 수십 군데의 상단이 문을 닫고 있다네. 무기 제작으로 유명한 페리온가의 케로스는 장인들에게 줄 돈이 없어 요즘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서 겨우 공방을 운영한다고 하더군.”
“그랬군요. 어쩐지 안 보이신다 했습니다. 그런데 10대 상단도 내는 세금이 만만치 않을 텐데? 이번 세금 건에 그들도 타격을 받지 않을까요?”
“타격? 하, 자네는 정말 이번 세금 건에 대해서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었나?”
“그게 저도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
“이런! 상단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정보가 늦어서야, 그럼 그 많은 세금을 전부 다 납부한 셈인가?”
“그렇습니다.”
“허허! 이런. 지금 세금이 적어도 3, 40%는 될 텐데. 알 만한 귀족들은 저마다 뒤를 봐주는 고위 귀족들에게 얼마의 금액을 상납하고 세금을 적게 냈다네. 물론 10대 상단의 경우는 세금을 안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들었네. 애초부터 그들은 세금을 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나. 10대 상단과 고위 귀족들이 입을 맞춘 상황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누가 있으며 그들을 당해 낼 자는 또 누가 있겠는가? 정말 그들은 왕국에 해를 끼치는 작자들이야. 게다가 이미 10대 상단이 거머쥔 상권과 재물은 왕의 창고를 넘어서는 모양이더군.”
“모든 원흉은 10대 상단이었군요.”
“그렇지. 그들이 문제야! 문제! 아참, 자네의 소문은 들었네. 엠마 양과 요즘 연애 중이라면서?”
“네?”
“허허, 엠마 양이나 도리안가와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네. 그래, 언제쯤 결혼을 생각하는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결혼식에는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겠네.”
“……결혼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엠마 영애께서도 생각이 있으셔야…….”
“하하하, 엠마 말인가? 크큭, 자네 나를 웃기려는 셈인가? 이 바보 같은 작자야. 자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도리안가에서도 결혼을 흔쾌히 허락할 거야. 아니, 자네만 한 신랑감이 이 왕국에서 어디 있겠나? 게다가 엠마 양도 결혼 적정기를 넘어가고 있으니 아마 조신하게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마 자네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친다면 결혼은 이미 끝난 이야기가 될 거라는 말일세.”
“그런…….”
“하하, 자네는 보기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구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꼭 명심하게나. 엠마 양이 보기에는 참해 보여도 생각보다 가시가 많이 나 있는 여자라네.”
“네?”
“하하하! 자 연회장으로 가세나.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