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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7. 왕의 초대(2)
루시딘은 웃음을 지으며 연회장에 젊은 귀족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곧 이은 왕의 등장으로 금세 잊혔다.
“국왕 폐하 납시오!”
관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파티를 즐기던 여러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웅성거림이 사라진 자리에 황금 도포를 두른 거대한 덩치의 거인이 등장하였다. 근육질에 키는 2미터를 넘어가며 갈색 눈동자에 약간 검은 피부를 지닌 야성적으로 생긴 이 남자가 바로 검의 왕국 아반크로스국의 제54대 국왕인 빈센트 폰 아반(Vincent Pon Avan)이었다.
“모두 들어라. 파티는 즐거운가?”
“그렇사옵니다.”
“이 파티는 이번에 실시한 세금 개혁안에 대한 성공을 알리는 파티이니, 모두가 즐기도록 하여라. 아울러 이번에 거둬들인 세금은 우리 왕국의 국방력을 향상시키며 새로운 병기의 개발과 전략 병기인 ‘마장기’의 개발에 들어갈 것이다.”
왕은 자신의 연설이 매우 만족스러운지 콧구멍을 ‘벌렁벌렁’거리며 호탕하게 웃음을 내뱉고는 상석에 있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파티를 재개시켰다.
잠시 후,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여러 쌍의 남녀들이 손을 잡고 무대의 중앙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하인츠에게 말하였다.
“으득, 국방력 향상이라고? 이 오지를 공격할 나라가 있다는 말이야? 그것도 크라델 산맥이나 시오라 사막을 넘어서? 게다가 마장기는 또 뭐지?”
“마장기는 국가적 전략 병기입니다. 강철의 마신이라 불리며 크기는 3미터에서 5미터, 대장기의 경우는 7미터 이상이며 제국에서도 일 년에 한두 대밖에 생산을 못할 만큼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지요.”
“무기로서의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소드 마스터가 조종하는 강철의 마신은 같은 마장기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려우며 3서클 이하의 마법은 무효화시키며 4서클은 10번 5서클은 5번, 6서클은 최소 1번은 막을 수 있는 마법진이 기본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마법사들에게는 최악의 병기이지요. 아반크로스의 주 생산 마장기의 이름은 펜드래곤(PenDragon)으로 정확한 수량은 비밀이라 알지 못하나, 예전 정복전쟁에서 3기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해집니다.”
“대단하군. 자네도 만들 수 있는가?”
“무리입니다.”
“4서클의 자네도 무리라고?”
“그렇습니다. 마장기는 대마도사 급이 제작한 물품이기에 제 능력 밖의 물건입니다. 설계도라도 있다면 얼추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실력으로는 마장기는 커녕 마장기에 들어가는 간단한 부품들도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래? 재료와 설계도를 다 갖추고 있다고 치면?”
“그렇다면 성공 확률이 많이 올라갈 것입니다. 왕국에 최고 실력자가 5서클이니 제가 가진 연공법과 4서클의 실력이라면 얼추 비슷한 경지까지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가면 설계도를 구해 봐야겠군.”
“아마도 구하기 매우 어려우실 것입니다. 왕국에서도 꼭꼭 숨겨 놓은 설계도가 시중에 나돌아다닐 리가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파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나는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음식과 와인들을 맛보며 파티를 구경하였고 하인츠는 그 옆을 지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파티를 즐겼지만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즐겁기보다는 황당하다. 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왕은 한동안 미친 듯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고 귀족들은 그것에 호응하며 입에 발린 소리를 내뱉는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 왕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왕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나의 눈에 거슬린다. 그 덕분에 결심도 생겼다. 그동안 세르핀 마을이나 여러 지인들 때문에 망설이던 마음이 정리되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다.
떠날 시기를 잘 정해야겠지만 이 왕국이 아니어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의 돈을 벌었다. 이대로 4~5년 안에 10대 상단 안에 들지도 모르겠지만,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이 판국에 10대 상단이고 뭐고 이 땅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참 혼자의 상상 속에 빠져 있던 나를 일깨워 준 것은 다름 아닌 왕의 기분 나쁜 눈초리였다. 왕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과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자네가 소문의 상단 주인인가? 자네들이 만든 포션들이 그렇게 불량품이 많고 질이 떨어진다던데 그 소문이 사실인가?”
국왕은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와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나와 하인츠를 바라보며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더더욱 기가 막혔다.
순간 나의 분노가 터지려는 찰나 하인츠가 앞서 나가며 왕에게 해명을 시작하였다.
“위대하신 검의 왕국의 국왕 폐하이시여. 저희 상단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상단에 불과하지만, 불량 제품이나 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판 적은 애초부터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저희가 만든 포션의 성능은 이미 입증되어 다른 마탑이나 신전의 경우도 저희에게 포션을 주문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저희가 판매하는 아이스크림 역시 다른 제국이나 왕국에서도 많이들 찾아 그 수량이 항상 부족한 걸로 아룁니다.”
“흥!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이미 10대 상단에서는 그 포션의 부작용을 찾아냈다. 내가 친히 그대들을 부른 이유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부작용이 심한 포션을 계속 팔다가는 다른 왕국에서 욕을 할 것이며 왕가의 얼굴에 먹칠하는 격이다.”
“…….”
“짐은 이런 일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너희 상단에서 거래하는 포션의 판매를 국내로 한정 짓고자 하며 이를 어길시 큰 벌을 내릴 생각이다.”
“왕이시여. 어찌 포션의 판매를 국내로 한정 짓게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흥, 그만! 짐이 너희의 투정이나 받아 주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가?”
“아, 아니옵니다.”
“좋다. 너그러운 짐이 그대들에게 기회를 주지. 자네들이 만든 그 아이스크림에 대한 제조법을 왕가에 공개하고 포션에 대한 모든 것을 10대 상단에게 공개하라. 그대들이 만든 포션의 부작용은 10대 상단과 왕가의 여러 장인들과 연금술사, 마법사들이 연구하여 완벽한 물품을 만들도록 하겠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이라? 좋다. 짐은 인자한 왕이니 그대들에게 시간을 주겠노라. 하지만 혹시라도 그대들이 허튼 생각을 가지고 다른 맘을 품는다면 짐의 분노의 철퇴를 받게 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여봐라! 짐이 친히 이들에게 별실을 내줄 테니. 오늘의 파티를 즐기고 당분간 별실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네, 폐하.”
귀족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왕에게 충성을 표하였고 왕에게 기분 좋은 소리를 하며 아양을 떤다. 그런 보기 역겨운 장면에 나는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별실이라는 감옥 안에 우리를 가둬 놓고 서서히 피를 말려 포션과 아이스크림에 대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는 왕의 태도에 정말 웃음이 나온다.
“왕이시여. 포션과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상단주로서 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래, 무엇인가?”
“포션은 부작용 때문에 다른 왕국과 판매가 힘들며 10대 상단에 공개해야 한다면 아이스크림은 무슨 이유로 왕가에게 공개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건…….”
“아마, 왕께서는 포션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아이스크림이기에 둘 다 하자가 있을 경우가 있어 왕가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런 조치를 내리신 거라 생각되옵니다.”
“그래, 맞다. 그게 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저희는 더는 포션과 아이스크림의 판매를 하지 않겠습니다.”
“뭐? 뭐라? 그 말이 진심이냐?”
“어찌 왕의 앞에서 거짓을 아뢸 수 있겠나이까? 게다가 물건을 파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불량품을 판다는 오명을 뒤집어써 가면서 물건을 팔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그러면? 물건은 이제 아예 안 판단 말인가?”
“저희도 상단이니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냥 하자가 많은 포션에 대한 제조법은 다른 왕국의 마탑에 팔고 아이스크림에 대한 제조법은 제국 리프에 판다면 저 하나 먹고 살 만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세금 때문에 힘이 들었는데 왕께서 뛰어난 혜안으로 그런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시니. 이 미천한 신민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성은을 입었나이다.”
“흠, 그것을 굳이 멀리 가서 팔 필요가 있겠는가? 불량품이기는 하지만 아이스크림의 제조법과 같이 판다면 짐이 직접 사 줄 의향이 있다.”
“정말이십니까? 폐하?”
“그렇다. 짐은 한 번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그런 왕이로다.”
“그럼 저희가 왕가에 포션과 아이스크림의 제조법을 진상한다면 왕가에서는 저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진상이라? 그냥 넘겨주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우둔한 신민이 감히 폐하에게 물건을 사고팔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저도 가난한 상인의 입장으로 제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동안 벌었던 것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설마 위대하신 왕께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다른 제국의 신민을 압박하셔서 물건을 빼앗으실 생각은 아니실 것이고 이 왕국에 충성을 다 바쳐 8등급 훈작사라는 직책을 8만 골드라는 거금에 사는 충성스러운 신민을 내치실 생각은 아니라고 믿사옵니다.”
“물론이다. 충성스러운 짐의 신하를 내칠 생각은 없다. 그래, 그대들의 손해를 생각하면 짐이 마땅히 상을 내려야겠구나. 좋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들 중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한 가지만 말해 보아라.”
“저희는 마장기의 설계도를 받고 싶습니다.”
쿵!
“뭐라? 마장기?”
“저는 상단주이기 전에 마법사입니다. 마장기야말로 이 세계의 모든 마법이 한데 뭉친 최고의 메커니즘(Mechanism)이라 생각됩니다.”
“뭐? 메, 메커… 뭣이라?”
“기술의 총집합이자 마법의 근원으로 향하는 비밀의 열쇠를 손에 넣고 싶은 것은 응당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왕가에서 마장기에 대한 비법을 각 귀족들이나 저 같은 신민에게 널리 전해 주신다면 저희는 목숨을 바쳐서 왕에게 충성할 것입니다.”
일을 크게 벌이는 취미는 없다. 하지만 왕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으며 정당한 대가 없이 물건을 빼앗을 생각을 했다. 왕이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 줄 수 없다면, 귀족이 귀족답지 않다면 보여 주겠다. 불사자(不死者)의 분노를.
“그건, 들어줄 수 없네.”
왕의 뒤편에서 공손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 올리버 후작.”
왕은 지원군이라도 도착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역시 옅은 미소를 띠며 왕의 비호에 나섰다.
“폐하, 이 우민한 신민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실 필요는 없으시옵니다. 그 상단에서 판매하는 자그마한 물품의 값어치가 아무리 높다고 치더라도 어찌 마장기와 비교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다른 귀족들에게도 공개를 하라니요. 자네는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마장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제국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귀족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치더라도 어디 10대 상단에게 비할 바이며 귀족들이 연합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디 10대 상단의 견고한 동맹만 할까 싶습니다.”
“끙! 자네가 정녕!”
“저는 한 명의 마법사로 그런 대단한 마법적 가치를 지닌 물품을 왕국에서 공개한다면 국방력과 충성심의 향상은 물론, 수많은 마법사들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되옵니다. 하나의 물품에서 세 가지 이상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상법의 기본이며 모든 진리를 쫓는 마법사들이 바라보는 궁극적인 목표이지요.”
“올리버 후작? 이 말이 사실인가?”
“아니옵니다. 폐하. 세 치 혀를 지닌 신민이 떠드는 간교한 간언이옵니다.”
“간언이라니요. 설마 위대하신 폐하께서 그 정도 판단도 못하실 거라 후작은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것이야말로 폐하를 모독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네 이놈!”
“제 이름은 로스트입니다. 올리버 후작 각하. 왕께서 내려 주신 8등급의 후작사라는 작위를 지니고 있는 귀족이고요. 그러니 말씀을 가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