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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7. 왕의 초대(3)
현대적인 지식과 생각을 지닌 나에게 말로 될 법싶은가? 후작!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네. 비록 하인츠의 안전이 걱정스러웠지만 4서클의 마법사가 그리 쉽게 죽을 리는 없을 테고 하인츠가 제일 먼저 배운 마법은 메모라이즈(Memorize:주문 암기)와 블링크(Blink:가까운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마법)이니 내가 시간을 잘 끌어 주면 무사히 도망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만, 모두 그만들 하게. 어디 감히 왕의 앞에서 소란들인가.”
“자네는…….”
“폐하,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두꺼운 비단에다가 보석과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을 한 백색과 자주색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복장을 한 강인한 눈빛의 사내가 군신의 예를 취한다.
“델몬트 후작. 그래, 후작이 최전선에서 수고해 준 덕분이네.”
“그것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대충 듣자 하니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물들이 많은 듯하옵니다.”
“내 눈과 귀를 가려?”
“폐하, 신이 듣기로는 저 상인들이 판매하는 포션의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물건들입니다. 게다가 이미 완성도도 매우 뛰어난 물품으로 신이 있는 최전방에서는 그 포션의 이름을 두 번째 목숨(The Second Life)이라 불릴 정도로 귀중한 물품이지요.”
“두 번째 목숨이라?”
“폐하도 아시겠지만, 최전방은 언제나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크라델 산맥에서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와 언제나 위기일발의 상황이며 혹시나 모를 다른 왕국들의 침략이나 세작들의 공작을 미연에 방지 또는 사전에 차단하고 사막에서 현상 수배범들과 화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이 포션은 없어서 못 사는 그런 포션이지요. 시중에는 판매가가 100골드라지만 저희 최전방에서는 적어도 300골드 이상에 판매가 되며 그것도 없어서 못 사는 실정입니다. 제가 이렇게 수도로 올라오게 된 계기도 포션의 공급량을 늘려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올리버 후작,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히 나에게 포션에 질이 떨어진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조금 더 알아보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신도 다른 하급 귀족들의 말을 듣고 그만 속아 넘어갔습니다.”
“올리버 후작, 지금 당장 그 망언을 한 하급 귀족들의 목을 내다 바쳐야 할 걸세. 감히 페하의 눈과 귀를 막고 거짓말로 폐하를 우롱한 죄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왕실모독죄이니까.”
“알겠네. 델몬트 후작.”
우드득!
올리버 후작은 이를 꽉 깨물고 왕에게 인사를 하고는 하급 귀족을 잡으러 간다는 명목으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이번 일을 계기로 올리버 후작의 입김과 세력이 한풀 꺾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델몬트 후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하였다.
“자네, 역시 큰 죄를 지었네.”
“…….”
“올리버 후작이 비록 실수를 저질렀다고 치더라도 상인 주제에 감히 후작의 권위를 넘으려 하다니. 게다가 국가적 전략 비밀 무기인 마장기의 설계도를 가지려 한 그 탐욕스러운 욕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죄이니라.”
상인 주제에? 크크큭, 하나의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더니 더 큰 산이 보이는 건가? 이곳에 사는 자들은 모두 다 이런 생각뿐인가? 윽박지르고 겁을 주면 내가 물러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하인츠에게 눈빛을 보내며 뒤로 빠지게 한 후에 델몬트 후작이란 작자의 정면으로 다가섰다.
최전방에서 무위를 자랑하는 장군답게 무시무시한 기세와 중압감이 나의 몸을 짓눌러 왔다.
“제법이로군.”
후작은 무릎이라도 꿇리려는지 더욱 강한 기세를 내뿜었다. 나 역시 서클을 회전시키며 몸에 마나를 불어넣어 중압감을 견디며 무서운 눈빛으로 후작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후작께서도 그 포션의 비법이 탐이 나는 모양이시로군요?”
“허허허, 이 기세를 버틸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대단하구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네. 나는 포션이 탐이 난다네.”
“후작 정도라면 정당한 거래를 통해서 얻으실 수 있으실 텐데요?”
“정당한 거래라…… 물론이네. 하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물건을 남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신은 나에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주를 내리지 않았지만 이렇게 빼앗을 힘을 주셨지. 여기 모인 모두가 나를 욕해도 왕가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네.”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무서움이 없는 것인지. 명예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그의 왕국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어느 정도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가 왕국을 사랑하든 이웃집 귀족의 영애와 사랑을 하든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저 그는 나의 물건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을 물리치고 찾아온 사자에 불과하다.
“그럼 후작은 저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신지요?”
“하하하, 상인다운 발상이로군. 좋네. 자네가 비법을 순순히 내놓는다면 자네의 목을 온전히 붙여서 상단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네.”
“그것은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조건이로군요. 저의 목을 베시지요. 대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은 이곳 후작께서 책임지셔야 할 것입니다.”
나의 목숨값은 과연 얼마나 될까? 과연 후작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일까?
* * *
따그닥 따그닥.
마차 안의 사내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긋지긋한 왕궁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생각과 안도감이 전신에 퍼져 나갔기 때문일까?
마법사 하인츠는 평생을 살아오며 이렇게 긴장을 하고 심장이 떨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곁눈질로 앞에 앉아 밖의 창가를 바라보는 사내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내의 이름은 로스트(Lost), 아마 본명은 아닐 것이다. 설마 자기 자식의 이름을‘잃어버린’으로 지을 정신 나간 부모는 없을 테니까.
그는 자신의 비밀이자 정체를 나에게 털어놓았고 나의 목숨을 단 한 번 구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가끔 그를 바라보면 인간다움을 잃은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온몸이 나른하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나와는 달리 그는 너무도 평온한 기색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그를 보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증이 일지만 물어도 그리 쉽게 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일단은 쉬고 싶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누워 오늘의 악몽을 잊고 싶다.
* * *
“자네는 정말로 담이 크군. 목숨을 담보로 나에게 협박을 하다니.”
“협박이 아닙니다. 저는 진실의 일부분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진실이라. 자네가 죽으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다는 말인가? 이 왕국이 흔들릴 만큼?”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허허, 자네의 협박은 제법이었네. 나조차 순간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으니까. 힘으로는 자네를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네. 그럼 이렇게 부탁하겠네. 자네의 포션을 왕가를 위해 내어 줄 수 없겠는가?”
델몬트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해 왔다. 귀족의 명예는 천금보다 무겁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예를 따지는 이곳 사람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에 나는 잠깐 놀라고 말았다.
후작은 정말 불타는 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 대답을 원하고 있다.
포션의 제조법을 주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여기 하인츠와 나, 단둘뿐이다.
연공법 ‘아라하스크’를 익히지 않은 자는 그 미세한 양을 조정하기 불가능하다. 이곳에 초정밀도 저울이라도 있다면 만들 수 있겠지만 미개한 문명을 지닌 왕국에서 그런 대단한 물건을 만들 기술력이 없다는 게 현실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원하시니 제조법을 건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 만드는 제작 과정을 보여 드리지요. 대신 왕가에 납품하던 1,000개의 포션과 세금을 면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저희를 찾지 않겠다는 공증을 받는다면 지금 즉시 포션의 제조법을 넘겨 드리지요.”
“페하, 어서 이것을 공인하시지요.”
“아, 아이스크림에 대한 제조법도 건네준다면 생각해 보겠소.”
“폐하!”
“그것만은 양보 못하오.”
“페하의 입맛에 맞으셨나 봅니다.”
“그렇소. 과연 델몬트 후작은 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구려.”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왕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사리 구분을 못하는 멍청이일 줄이야. 뭐 좋다. 너희가 원한다면 들어주겠다.
“좋습니다. 포션과 아이스크림의 제조법을 왕가에게 건네 드리지요. 대신 왕가는 저희 상단이 크라델 산맥에서 활동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세금 면제와 그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인들의 앞에서 공인해 주십시오. 아참, 공증은 마나의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나는 손을 들고 마나를 끌어모아 마나의 제약과 구속을 걸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어길 시에는 마나의 이름으로 저주를 받는다. 이에 동의하시는지요?”
“좋다. 나 검의 왕국 아반크로스국의 제54대 국왕인 빈센트 폰 아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후작님도 공증을 해 주시지요.”
“델몬트 폰 로크의 이름을 걸고 이 약속을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하겠네.”
“여기 보이는 모두가 공증인이니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그럼 하인츠와 저는 아이스크림을 만들 준비를 하겠습니다. 왕가에서는 이것을 배울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연회 중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익입니다.”
“좋다. 여봐라. 왕궁 수석 마법사 월터와 그의 제자들은 비법의 전수를 받을 준비를 갖추거라.”
“폐하! 그것은 안 될 일이옵니다. 저희 메로드가는 대대로 충성을…….”
“폐하, 통촉해 주시옵소서. 저희 도리안가야말로 충성을 다 바쳤사옵니다.”
“그만! 폐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이다. 수석 마법사는 어서 준비하고 자네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라.”
“하지만 후작 각하.”
“그만, 더 이상 말썽을 부린다면 내가 직접 자네들을 처단할걸세.”
후작은 혹시라도 계약이 파괴되거나 어긋날까 봐 겁이 나는지 무서운 기세를 내뿜으며 앞서 나온 마법사들을 짓눌렀고 마법사들은 저마다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도리안가의 사람들을 보며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는 없었다. 아니, 어차피 알려 줘도 쓰지 못할 비법이다. 괜히 알려 줬다가 뒤늦게 돌아올 후폭풍의 영향을 생각하면 도리안가는 이 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나을 것이다.
역시 왕가의 창고답게 없는 재료가 없었다. 특히 질서의 세라프(Seraph)에만 생산된다는 진실의 세룸(Serum)은 그 무게만큼의 황금을 주고도 못 산다고 알려진 과일이자 뛰어난 해독약이었다.
“하인츠, 믹서기와 냉장고를 대신할 방법을 생각해 보게.”
“3서클의 윈드 블레이즈(Wind Cut:바람의 칼날)로 과일을 잘게 썰고 프리즈 스피어(Freeze Spear:얼음의 창)로 다시 잘게 저미어 얼리면 비슷하게 모양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알갱이가 크긴 하겠지만, 시간이 적은 관계로 이렇게 되었다고 마법으로 더 잘게 자른다면 가능하다고 부가 설명을 하면 되겠군.”
거대한 솥이 준비되었다. 솥에는 마법으로 과일을 잘게 썰고 얼음의 창으로 짓이긴 후 우유와 벌꿀을 일정 비율로 혼합하여 1서클의 아이스(Ice)로 얼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