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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7. 왕의 초대(4)
“오! 이렇게 쉬운 방법이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수석 마법사는 너무도 쉬운 방법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들은 모를 것이다. 마법으로 1만 명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만들려면 적어도 3~4서클의 마법사들이 하루 종일 솥을 가지고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다음은 포션의 제조입니다. 단 한 번뿐이니 잘 봐 두시기 바랍니다. 여기 이것들이 포션에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하인츠가 앞에 준비된 솥에 필요한 재료들을 배분하여 집어넣고 커다란 국자로 안을 저어 주며 재료들을 끊이기 시작했다. 재료의 수만 해도 약 300가지. 그리 비싼 재료들은 아니지만 쉬지 않고 재료를 다듬고 손질하며 적정량을 배분해서 집어넣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가끔 솥을 젓는 일도 완벽한 타이밍의 순간을 요구했다.
한참을 끊던 솥에 색이 우중충한 빛을 띠자 하인츠는 미소를 띠며 마지막 재료이자 포션의 제일 중요한 재료인 트롤의 피와 거미 버섯, 매운 아삭(Crisp) 등의 재료 스무 가지를 한꺼번에 넣었다. 솥의 색은 점점 붉게 물들고 얼마 후 피처럼 진한 붉은빛을 띤 포션이 완성되었다.
“이건, 연금술의 혁신, 아니, 혁명이라네. 음식 재료로 쓰이는 매운 아삭(Crisp)이 힘을 증대시키는 비법 중의 하나였을 줄이야.”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감탄을 토해 냈고 나와 하인츠는 이만 떠날 차비를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지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들 했네.”
델몬트 후작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안에는 보석류가 가득 들어 있는지 벌려진 주머니 틈으로 보석들이 살짝 비쳤다. 아마도 포션과 아이스크림을 빼앗은 미안한 감정이 담긴 양심 일부분인지 수고의 보답인지 알 길은 없었다. 나는 주머니를 다시 후작에게 돌려주며 말하였다.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것은 마나의 이름을 걸고 한 분명한 거래였습니다. 서로에게 손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동안 벌어 놓은 돈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돈 한 푼 벌어 보자고 소중한 약속을 먼저 깨거나 양심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미안한 표정을 짓는 델몬트 후작에게 아직 양심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다. 나는 그에게 고작 잘나가는 상인일 뿐이니까. 나는 양심도 없는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왕의 성이 싫어서 더욱 서둘러 왕궁을 빠져나왔다.
8. 회상(1)
“잘 들어. 우리들 중 하나만 남고 모두 죽어서 사라져야 해.”
“형? 왜? 싫어!”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야.”
엄격한 형은 언제나 나에게 말했다. 사막의 종족은 씩씩하고 강해야 하며 무엇보다 지혜롭고 현명해야 한다고 나는 그런 형의 말을 단 한 번도 어겨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형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망치라고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였고 형의 마지막 말을 끝끝내 어기지 못하여 그곳을 도망치고 말았다. 겁쟁이, 비겁자, 도망자. 그것이 나의 이름, 라빈단이다. 모든 불행은 하나의 유물을 훔쳐 낸 우리들의 잘못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이름은 라빈단. 사막의 이름 모를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는 날은 하늘에서 재앙의 달이 뜬 날이었으며 달은 검은 사신을 세상으로 내려 보내 주셨다.
마족의 날개는 세상을 불태웠고 내가 사는 마을 역시 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타는 마을에서 살아남은 나는 형의 손에 길러지게 되었다. 당시 형의 나이는 여섯. 형은 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물건을 훔치고 빼앗는 것은 기본이었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형은 피 묻은 손을 감추며 나에게 뒤돌아서 이쪽을 보지 말라고 외쳤지만 나는 그런 형의 모습까지 좋았다.
그리고 그런 형의 모습을 눈동자에 그려 넣었다. 살기 위한 발버둥. 그것은 죄가 아니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이제는 얼마만큼의 자아도 확고하게 성립되었고 나만의 가치관도 생기게 되었다. 어느새 형은 스물한 살이 되었고 웬만한 사막의 전사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세서 마을에서 최고 전사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아가씨들에게도 항상 인기가 많았지만, 형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가 보다. 항상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고 돈을 벌기 위해 용병 일과 몬스터 사냥을 하며 항상 위험 속에서만 지낸다.
나는 그런 형이 안쓰러워 이제 그만하라고 떼를 써 보지만, 형은 항상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미소를 지었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리어 나를 위로하곤 했다.
그런 형은 나의 우상이자 자랑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라빈단! 라빈단!”
그것은 정말 어느 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선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연다. 창문 밖에는 사막으로 사냥을 나간 형의 동료가 피투성이가 된 형을 들쳐 메고 나타났다.
“형, 괜찮아? 형!”
“큭, 쿨럭, 괘, 괜찮아.”
형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나를 안심시켰고 형의 동료들은 부상이 심한 형의 옷을 벗기고 약초 등을 잘게 빻아 상처 부분에 뿌렸다.
약초를 대충 뿌린 형들은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탕약을 끓여 와서는 형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무리를 했어. 너희 형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혼자서 사냥을 한 모양이야.”
“형은 괜찮을까요?”
“걱정하지 마. 누가 뭐라고 해도 너희 형은 사막 부족 최강의 전사이니까.”
형의 동료들은 나를 안심시키고는 각자의 움막으로 돌아갔고 그 후 나는 삼 일 밤낮을 새며 형의 상처를 돌봤다.
형은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계속 신음을 내뱉었고 나는 젖은 물수건으로 형의 몸을 닦아 주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 하지만 며칠 후 형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강을 되찾았고 품속에 숨겨 놓은 하나의 펜던트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라빈단. 이제, 이거면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어.”
형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에게 우리도 부자가 될 것이라며 외쳤고 나 역시 부자를 꿈꾸며 이제 우리도 가난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얼마 후 어두운 밤을 틈타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수백 마리의 낙타들을 도살하고 얼마 되지 않는 양과 소를 베어 흐르는 피로 경고를 해 왔다. 하지만 용감한 사막의 부족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였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피처럼 붉게 흘러내리는 하늘과 태양보다 뜨거운 염화의 숨결, 얼음보다 차디찬 눈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형의 이름을 외치며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형이 가져온 거무칙칙한 펜던트는 아무리 강한 힘을 줘도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마을에서 제일 힘이 세다는 울론 아저씨도 펜던트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마을에서 대장간을 하시는 사루인 할아버지도 펜던트를 녹일 수 없었다.
형은 펜던트의 뚜껑을 열기 위해 수많은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을의 외진 구석에 홀로 사는 마녀 할머니 루만다를 찾아가 이상한 마법을 공부하고 매일 이상한 책들을 한가득 품에 안고 와서는 밤이 새도록 책을 보며 공부를 시작했다.
형은 틈틈이 나에게도 그 이상한 단어들과 문자들을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재능이 없는지 익히는 족족 다음 날이 되면 까먹었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노력하던 형의 열정을 신이 알아 준 것일까? 드디어 펜던트 뚜껑 일부분이 열렸다. 아직 반절은 더 열려야 하지만 뚜껑의 일부분만이라도 감격스러웠다.
열린 펜던트의 안은 시커먼 구멍이라도 뻥 뚫어 놓은 것인지 안이 보이질 않았다. 형은 미소를 지으며 저 안에는 수많은 보물보다 더욱 값진 것이 있다며 조금만 더하면 문을 완전히 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고 나는 형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형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펜던트를 여는 일은 형의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이 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어떤 미치광이들이 나타나 사막의 짐승들을 잡아 죽이고 그 피로 이상한 문양과 글을 지껄여 놨다. 감히 사막의 전사들을 도발하다니 그들을 찾는다면 내가 앞장서서 혼내 주리라.
벌써 내 나이도 스무 살이 되었다. 키는 형만큼 커졌고 작살과 날이 길게 휘어진 시미터(Scimitar)를 잘 다루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형의 나이도 벌써 스물여섯이다. 사막의 일족은 잦은 사냥과 전투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심리 때문인지 성혼을 서두르기로 유명하였는데 사막 제일의 신랑감은 아직도 생각이 없나 보다.
다행히 형은 부족장의 딸과 연애를 시작했다. 사막 제일의 미인이라는 시노아 누나의 미모를 봐서는 아마 조만간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는 되었니?”
“물론!”
그동안 형은 단 한 번의 사냥도 나가지 않고 펜던트를 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하지만 형의 실력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틈만 나면 나에게 각종 무술을 가르치며 자신의 수련도 빼놓지 않고 하는 편이라 걱정은 없었다.
“형? 그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나의 진지한 질문에 형은 약간 당황하며 고민을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것은 비밀이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응”
“이 안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보물이 숨겨져 있어.”
“그게 뭔데?”
“불사(不死).”
“응?”
“영원한 삶에 대한 비밀이 이 안에 숨겨져 있어.”
“그걸로 어떻게 부자가 되는데?”
“하하하, 그것은 정말 비밀이야.”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일까? 형의 말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형이 말하는 영원한 삶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고 그것으로 큰돈을 벌겠다는 말뜻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렀고 운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사막의 수천 명의 전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챙기고 형의 뒤편에 도열했다. 형 역시 큰 사냥에서나 입을 법한 짐승의 가죽을 벗겨 만든 전사의 예복과 얼굴과 온몸에 붉은 문신을 덕지덕지 칠하며 투창을 부여잡았다.
드디어 형은 펜던트의 문을 여는 마지막 방법을 풀어냈고 사막의 전사들과 함께 보물을 얻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였다. 나 역시 형을 졸라서 원정대의 후미에 겨우 설 수 있게 되었다.
형은 혹시 모를 위기의 상황이 들이닥치면 문을 닫을 수 있는 비법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형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켜보며 애써 고개를 흔든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소년의 작은 외침은 바람을 타고 어둠의 저편으로 흘러들어 갔고 어둠의 한구석에서 ‘그’는 조소를 짓고 있었다.
펜던트의 뚜껑이 열리며 거대한 어둠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어둠은 점점 그 규모를 늘리며 거대한 입구를 만들었고 사막의 전사들은 용감하게도 지옥의 문턱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