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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8. 회상(2)


마치 지옥의 입구로 통하는 통로에 들어선 듯 소름 끼치는 기운이 전신을 짓눌렀고 나는 어느새 창을 부서져라 세게 잡고 있었다.
똑!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횃불을 밝히는 전사 중 하나가 병에라도 걸린 듯 기침을 하고 있다.
‘저 사람은 죽을 거야. 낄낄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였지만 나는 태연한 척 자신을 속인다.
‘키득키득, 내 말이 맞지. 너는 내 말을 듣고도 그를 구해 주지 않았구나? 안 그래?’
어둠의 예언처럼 횃불을 밝히는 전사는 피를 토하며 죽었고 사람들의 표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형은 창을 높이 들며 외쳤다.
“죽음이 두려운가? 이 어둠이 무섭나? 나는 아니다!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 빛을 찾으러 이렇게 어둠 속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정신 차려라! 어둠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한순간 약해지면 어둠에게 먹히고 만다!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정신 차리고 어둠을 경계하라!”
형의 투기가 전해진 것일까? 일순간 사막의 전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어둠은 계속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키득키득, 너희는 다 죽을 거야.’
어둠은 한층 더 겁나는 말들로 나를 위협했다.
대부분의 말들은 죽음과 연관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한 공포감이 나의 땀구멍을 통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어둠의 말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그의 말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나는 혼잣말로 주문처럼 그 말을 되뇌며 애꿎은 희망을 가져본다. 하지만 그 희망은 너무도 큰 절망 앞에서 다 타들어 간 촛불마냥 희미하기만 하다.
“모두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수십 명이 넘는 인원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원정을 나온 사막의 전사들은 지쳐 갔고 형은 일행들에게 휴식을 명하였다. 형 역시 긴장을 한 것인지 많이 피곤해 보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어느새 형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형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형, 무서워. 모두 죽으면 어떡해?”
“걱정하지 마. 형이 지켜 줄게.”
형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서서 지친 전사들을 챙긴다. 형의 뒷모습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무력한 나와는 다르게 형은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그래, 나도 언젠가는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소가죽으로 만든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메마른 입가를 적시고는 다시 전의를 불태운다. 하지만 밀려오는 어둠은 한층 더 어두웠고 점점 속삭이는 어둠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키득 키득,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크크크, 그래? 아직도 포기를 못한 건가?’
어둠은 우리의 죽음을 확정 지어 놓기라도 한 듯 저희들끼리 떠들어 댔고 나는 그 모습에 참을 수 없어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조용히 해. 형은 너희에게 지지 않아.”
나의 위협이 담긴 말 때문일까? 일순간 어둠 속에서 고요가 찾아왔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자여…… 그 길은 멀지 않았도다.

나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것은 차마 형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각했을 무렵부터 나는 어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주워담으며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사람들의 감정이나 비밀 등을 알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차마 형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내가 태어나며 마족을 부른 것이 아니냐며 수근거리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형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해서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둠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졌고 나 역시 그 목소리 따위는 무시해 버렸다. 어느덧 잊혀 버린 목소리,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기만 하다.
망자의 울음소리와 같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음탕한 창부의 요염한 유혹의 속삭임 같지만, 온몸을 불태우는 복수의 화신 같은 화난 목소리.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혼합된 어둠의 속삭임에 도망치는 나는 어느새 귀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그것들은 나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곳은? 형은? 다들 어디 있는 거야?”
‘키득 키득, 도망자 라빈단. 기억 안 나? 너는 그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잖아.’
“아, 아니야. 이건 꿈이야. 꿈!”
‘키득 키득, 꿈이라고 하며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지.’
혼자 남겨진 어둠 속. 울고 싶었지만, 목 놓아 울고 싶었지만 울 수는 없었다. 어둠의 말처럼 나는 모두를 버리고 도망쳤다. 단 한 명만이 살 수 있다는 형의 말뜻? 그 안에 비밀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 혼자 살아남아 이 문을 닫으라는 소리일까?
둘 중 어느 것이 되었든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아니, 살아남아서 형을 구해야만 한다.
‘키득 키득, 겁쟁이 라빈단. 이제 어떡할 생각이야?’
“형을 구하겠어.”
‘키득 키득, 어떡해?’
“아직 모르겠어.”
‘키득 키득, 내가 도와줄까?’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모두와 형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온통 가득 차 있었고 결국 ‘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조건에 계약을 맺고 말았다. 그가 악마여도 상관없다. 아니, 악마보다 더한 것이어도 상관없다. 형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이후의 기억은 정확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형이 알려 준 주문으로 펜던트의 문을 닫았던 거 같다. 어둠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은 나는 기억을 잃었다. 형의 이름도…… 사막 전사들의 이름도……. 모두 잊고 말았다. 그게 악마가 제시한 유일한 거래 조건이었으며 나는 그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키득 키득, 비겁자. 라빈단. 후회되는가?’
“아니, 조금도…….”
‘키득 키득, 이제 어떡할 생각이지?’
“형을 되찾겠어.”
‘키득 키득, 좋은 생각이야. 원한다면 주지.’
“그것이 내 남은 삶의 전부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계약은 이루어졌도다. 키득 키득, 절망과 좌절의 문턱에 들어선 것을 환영한다.

내 이름은 라빈단. 형을 되찾기 위해 천 년도 더 되는 삶을 이어 가는 방랑하는 이단자(異端者)이다.



9. 음모(1)


지부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자금 일부분을 동결하여 비자금을 만드는 등 이 왕국에서 떠날 차비를 꾸리고 한편으로는 공간 이동 마법진을 설치하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이곳을 최대한 안전하게 떠나며 왕가나 다른 귀족들을 피해서 떠날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예전에 도리안가에서 설치를 희망했던 공간 이동 마법진을 떠올린 이유에서이다.

※ 공간 이동 마법진이란?
7서클의 워프 게이트(Warp Gate:차원의 문)와 달리 양쪽에 같은 무게의 물체나 사람을 맞바꾸는 마법진이다.

지금 괜히 책잡힐 빌미를 제공한다면 분명히 왕가에서는 소환장을 보내올 것이다. 그러면 포션과 아이스크림의 제조에 대한 문제가 거론될 것이다. 또다시 왕과 대면하는 일은 정말 사절이다.
“공간 이동 마법진의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수고했어. 그래 왕가의 반응은 어떻던가?”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도리안가에서 희망을 하던 일이기도 하며 공간 이동 마법진은 설치비가 비싸며 이동을 할 곳에도 똑같은 마법진을 설치해야 하니, 아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르는 로스트 님의 이야기가 젊은 귀족들에게 화두를 이루며 왕가에서는 수석 마법사와 그의 가문이 포션 제조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실망한 표정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제조 중에 문제가 많은 모양입니다.”
“그럴 수밖에. 바로 코앞에서 설명까지 해 주면서 만들어 주었던 포션을 다시 만들지 못하니. 5서클의 왕궁 최고의 마법사라는 이름과 앞으로 왕이 내릴 분노를 생각하면 막막할 수밖에…….”
“왕가에서 생산되는 아이스크림의 생산량은 하루에 솥 열 개분(한 솥당 120개 생산)이 되며 마법사들이 일주일 동안 만드는 양은 고작 8천 4백 개. 저희가 귀족들에게 판매하는 1만 개에도 못 미치며 평민에게 파는 100만 개의 물량을 보고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나의 제약과 이유를 알아내지 못해서 아직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이스크림은 추후 상황을 지켜보며 왕가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가에서 물어보면 아티팩트(Artifact:마법으로 제작한 물품)를 제작해서 만든다고 대충 설명해.”
“네? 하지만 그러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충분히 믹서기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왕가에서 믹서기를 완성시킬 그쯤에 아이스크림의 제조법을 상단과 다른 왕국에게 팔아먹을 생각이야.”
“왕이 가만히 있을까요?”
“흥, 가만히 있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겠어, 아니면 그 잘난 후작을 보내겠어? 왕은 마나의 제약으로 우리에게 티끌만 한 위협도 가할 수 없는 몸이며 우리가 노리는 것은 왕이 아니야.”
“그러면?”
“왕의 뒤에서 배를 불리고 있는 10대 상단이지.”
“하하하! 그렇군요. 10대 상단에서 이번에 투자한 금액은 상당하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10대 상단이 판매하는 물품들을 모조리 선점해. 그들을 파멸로 이끌고 싶지만, 일단은 이것으로 참도록 하지.”
“아참, 도리안 영애가 보내온 편지가 있습니다.”
“그래? 줘 보게.”
나는 양피지를 곱게 접은 편지를 열어 보았다.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그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전하는 내용과 보고 싶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요즘, 도리안가의 상황은 어떤가?”
문득, 왕의 앞에 나섰던 도리안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마법사답게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와 4서클 마스터라는 실력과 그에 걸맞은 작위. 비록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지금 왕궁 수석 마법사의 가문인 미즈론가의 상황을 보면 돕지 않은 이유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도리안가는 요즘 많이 안 좋은 모양이더군요. 최근 왕이 왕궁 수석 마법사의 가문에 힘을 실어 주어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데다가 맞상대로 있었던 메로드가에서도 최근에 발명한 신제품으로 숨통이 트이면서 양 가문 사이에서 상당한 압박과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