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0화
9. 음모(2)


“그래?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흠, 도리안가의 영애 때문에 그러십니까?”
“…….”
“지금은 로스트 님이 확실히 결정을 내리실 때입니다. 소문의 핵심인 로스트 님이 도리안가를 돕는다면 분명히 큰 소문이 따라붙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왕가나 10대 상단에서 저희를 깔아뭉갤 건수를 찾고 있는데 지금처럼 아무 이유 없이 돕는다면 분명히 안 좋은 소리와 함께 이야깃거리가 될 것입니다.”
“흠, 이야깃거리라. 남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게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돌게 된다면 혼기가 꽉 찬 도리안 영애의 혼삿길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혼삿길이라…….”
“결혼할 마음도 없으시면서 그곳을 돕는 일은 과한 관심이며 너무 무리한 수입니다.”
딱. 딱. 딱.
나는 테이블의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엠마의 얼굴과 그 미소가 떠오른다.
“후우~ 결혼은 아직 이르지만, 약혼이라면…….”
“지, 진심이십니까?”
“그래. 하인츠, 지금 상단에 여유 자금이 조금 있을까?”
“조금이라니요? 지참금은 두둑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없는 자금이라도 만들어서 대령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편지를 써서 약혼식을 하고 싶다고 전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모든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참, 편지에 관한 내용은 아이작 영감이 전문인데 한 번 맡겨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아이작 영감이?”
“그래도 저희들 중에 유일하게 결혼에 성공한 사람이고 이런 쪽에 조금 해박하다고 할까요?”
“영감에게 그런 재주가 있었나? 그래, 연락을 취하도록 해.”
하인츠는 계속해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작 잡화점으로 달려갔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은 정말 산처럼 부풀어 올라 나에게 되돌아왔는데, 그냥 약혼에 대한 내용을 몇 자 적으라는 뜻이 서른 장이 넘는 긴 문서가 되었으며 그쪽에 전문가라는 아이작 영감은 정말 화려한 문체와 수식어들로 도배된 편지를 탄생시켜 도리안가에 전하였다.
겉보기는 40대지만 실제 나이는 60~70이 넘는 하인츠나 다 죽어 가는 노인 아이작 영감이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얼마 후 상단 내에 돌고 도는 엄청난 소문을 듣고 생각보다 하인츠와 아이작의 입이 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갑네, 로스트 경.”
“처음 뵙겠습니다. 도리안 백작님.”
“그래, 자네가 우리 아이를 어여쁘게 봐서 약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편지는 잘 보았네.”
“저는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을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나쁜 의견은 아니야. 전에 연회장에서 본 자네의 모습도 그렇고 자네의 소문들도 익히 들었으며 자네의 능력 역시 충분히 알겠네. 다만…….”
도리안 백작은 잠시 말을 길게 끌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며 주변에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자네는 작위가 너무 낮네.”
그의 무거운 입술이 떨어지며 답을 주었다.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네. 자식을 가진 부모의 처지로서 자식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자네의 작위는 너무 낮아.”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 조건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견에 수긍하며 긍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럼, 작위를 높이겠습니다.”
“바, 방법이 있겠는가?”
“새로운 물품을 개발해 왕가와 거래를 해서라도 작위를 얻어 오겠습니다. 백작님이 생각하시기는 작위는 어느 정도이신지요?”
“최소한 남작, 적어도 자작, 백작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당장 딸을 주겠네.”
“그럼, 백작이 돼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리안 영애를 생각하는 저의 마음의 작은 표현입니다.”
나는 밖에 짐꾼들을 시켜 마차 안에서 황금으로 만든 궤 다섯 개를 내려놓았다. 10만 골드. 상단에 남은 여유 자금을 몽땅 털어 온 금액이었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도리안가에서 벌어들이는 한 달의 세금이 9,000골드. 거기에 마법 물품 등을 판매하며 추가로 벌어들이는 금액을 합쳐도 20,000골드를 넘기 힘들 터. 이 정도면 자금난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고, 고맙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백작에게 인사를 했고 백작은 생각지도 않은 큰 이익을 얻어서 근심이 걷힌 표정이었다. 엠마 양의 얼굴을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한동안 미소를 띠며 웃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문득 오래전 고향에서 즐겨 듣던 노랫말이 생각났다.
‘그대의 눈빛이 날 다시 웃게 만들고 메마른 내 입술이 그댈 보며 미소를 짓고~’
지금 거칠게 뛰는 심장은 누구를 향해 뛰는 것일까?
메마른 내 심장이 뛰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 때문이겠지?

상단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물품을 만들기 위해 수련을 더욱 박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물품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현대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도 본 직업이 과학자가 아닌 이상 물품의 재료나 생산과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만들려고 연구 중인 물품은 총 세 가지. 사탕, 거울, 비누가 그것들이었다.

사탕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탕수수나 메이플 시럽 등이 필요했다. 메이플 시럽이란 단풍나무의 진액이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어 단풍나무, 사탕수수나 사탕무(무와 비슷한 명아주과 식물)와 비슷한 식물들을 찾고 있지만, 아직 아무런 진전은 없다.
두 번째 물품은 거울이었다. 거울은 즐겨하던 게임에 나오는 물품 중 하나로 주로 필요한 것은 세 가지 모래, 소금, 석회였다. 소다야 이곳에서 만들 수 없지만, 소금이나 양잿물에서 나오는 성분을 대용하여 비슷하게나마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이곳에 거울이 동판이나 청동, 구리인 것을 고려할 때 아마도 제법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마지막 물품은 비누였다. 예전에 웰빙 식품이 유행할 당시 천연 재료를 이용한 물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고 광고의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때 얼핏 들었던 제일 유명했던 광고가 ‘천연 비누, 천연 비누’ 하며 떠들던 광고였다.
그 광고에서는 천연 비누의 제작 과정과 만드는 방법을 손쉽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때 본 흐릿한 기억을 되살려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 내었다. 비누는 재를 태운 잿물에서 알칼리 성분의 물질을 얻어내 녹차 가루나 콩 가루, 황토를 이용해서 만드는 방법이 있다.
무엇 하나 결정된 것은 없으나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만들 자금도 없는 상황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어라 수련하는 일밖에 없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은 흘러간다.

아르곤 성왕력 2748년 바람의 콘라드(Cone lard)의 여섯 번째 날.

딸그락딸그락.
하얀 그릇에서 반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가루를 덜어 약간의 고운 소금을 넣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가운 버터를 잘라 섞었다. 잘게 잘린 버터와 밀가루가 얼핏 섞여 그 모양을 잃어 갈 때 계란을 풀어 반죽을 하여 둥근 공처럼 말았다.
공 모양의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나는 하인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1시간 정도 휴지를 시킨 후 밀가루를 살짝 뿌려 긴 봉으로 얇게 펴면 일차적인 준비는 끝난다.”
“이차적으로 준비할 것이 또 있습니까?”
“원하는 모양을 새긴 형틀을 만들어 얇게 편 반죽에 찍어 낸 후 안에 꿀이나 메이플 시럽을 넣은 후 오븐에 굽는다면 사탕파이가 완성되는 거지.”
“정말, 사탕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독성이 있을까요?”
“물론이다. 어린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며 단것을 좋아하는 왕이라면 사족을 못 쓸 것이야.”
“하긴, 그때도 포션을 포기해서라도 아이스크림의 제조법을 얻으려는 눈빛이었습니다.”
“왕이라면 사탕파이 하나에 백작 위를 넘겨주고도 남을 위인이지.”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줄 세력을 키워야지.”

* * *

가빈스 자작은 요즘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맛보고 있었다. 포션 사업은 망할 녹티스 상단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지 오래이며 배를 이용한 운송 사업은 태풍 때문에 당분간 움직일 수 없었고 사막에서 꾸준히 거래를 해 오던 비단과 향신료는 누가 헐값에 대량 구매해서 물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 비단과 향신료를 구매해 간 상단이 어디인지 알아냈느냐?”
“죄송합니다. 그게 아직…….”
“후, 후작님은? 올리버 후작님은 뭐라 말씀하시던가?”
“아직, 왕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셨다면서 당분간 자중하신다고 저희를 도와줄 수 없다고 전해왔습니다.”
“크윽! 이럴 수는 없다. 내게 이럴 수는…….”
“자작님 이대로는 세금 때문에 망하게 생겼습니다. 그, 전이야 후작님의 뒷배로 세금을 면제받았지만 이제는 후작의 비호가 없으니 저희는…….”
“도, 돈을 빌려서라도…….”
“자작님. 이번 달 저희의 세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거래량이 없으니 세금도 적을 것이 아니냐?”
“무슨 소리이십니까? 포션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금액 10만 골드, 저희 상단이 왕국 항구에 정착하며 내야 하는 세금이 1만 골드, 사막과 거래를 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 대금이 1만, 이번 달에 그곳에 내다 판 과일에 대한 세금이 2만, 세금으로는 5만 2천 골드이며 추가 용병비 1만을 더한 6만 2천 골드입니다.”
“6, 6만 2천이라고?”
“그렇습니다. 거의 자작령에서 일 년 동안 벌어들이는 소득과 맞먹을 정도입니다.”
“그,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저희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이름 있는 귀족들의 비호를 받았던 다른 10대 상단들은 더욱 큰돈을 내야 했기에 뼈아픈 실수라며 이번 세금 건을 주장한 저희 상단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비, 빌릴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적어도 백작급 이상의 대귀족이나 6만이 넘는 거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지, 나머지 귀족들에게는 말도 붙이기 어려운 거금이며 저희 상단에게 투자할 귀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그, 그 입 다물라! 대가빈스 상단이 이대로 무너질 수 없어. 방법을 찾아야, 방법을…….”
“그 방법을 내가 제시할 수 있는데…….”
“누구냐?”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대꾸가 없어서 말이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잊으려고 하여도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는 원수 같은 녹티스 상단의 상단주 로스트였다.
“흥! 누가 네놈 따위의 도움을 받을 줄 알고?”
“살고 싶지 않은가?”
“네놈이 아니어도 6만 정도야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다.”
“흥, 그놈의 고집은……. 하루 이틀 망한 것도 아니고 벌써 몇 번이나 상행을 망쳤지? 여섯 번? 일곱 번? 이제 남은 자금이 있을까? 바닥이 아니던가?”
가빈스 자작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로스트를 노려보며 불끈 쥔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크윽, 닥쳐라! 아직 우리 상단은 건재하다!”
“이번 달 세금 6만 2천 골드, 그리고 사막에서 구매한 비단과 향신료를 제값에 팔지.”
“뭐! 네놈이 범인이었구나.”
“일단은 말투부터 고치지그래, 가빈스 자작. 나는 너의 목숨 줄을 잡고 있어. 명심하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원하는 거? 나는 원하는 것이 아주 많아. 그중의 하나가 작위야. 너보다 더 높은 작위가 필요해.”
“자작보다 높으면 배, 백작?”
“그래,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길게 돌려 말할 생각은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이번에 왕과 거래를 할 거야. 그때 반대하는 세력을 막는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고 약속해.”
“하지만……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네.”
“델몬트 후작과 가빈스 자작, 그리고 몇 명의 남작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시간이 필요한가? 설마 필요할 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았던 후작이나 뒤통수를 친 다른 귀족들과 상의하고 싶은 생각이 든 건 아니겠지?”
“좋아. 자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저물어 가는 어둠 아래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그렇게 음모는 싹 트여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