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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9. 음모(3)
추악하게 일그러진 검은 달이여. 붉은 눈물을 흘려라. 그대의 죄악이 씻겨질 수 있도록 웃음 지어라. 그대의 조소 속에 내가 있나니. 그대의 감정을 파먹고 내가 자라리라. 나는 지금 그대의 눈물을 원한다. 그대의 절망을 원하며 그대의 파멸을 원한다. 그대의 감정이 꽃을 피우는 순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파멸의 문이 열리리라. 하지만 조심해라. 단죄자는 언제나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우리가 눈 뜨는 날 그가 움직일 것이다. 그는 주시자. 그는 파괴자. 그는 타락한 마신이다. 그는 절망의 사슬로 죄를 칭칭 감으며 파멸의 검으로 악을 집어삼키고 단죄의 칼날로 모든 인과를 끊으리라. 그를 조심해라. 그리고 기억해라.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한다는 것을…….
“헉헉헉!”
지독한 악몽이다.
검은 사신이 나에게 달디단 검은 사과를 건네주며 속삭인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문 나는 독이 든 것처럼 괴로움에 몸을 꿈틀거리고 떨어진 검은 사과는 이내 삭월의 달이 되어 하늘 위로 올라가 조소 짓는다.
마치 내가 하는 모든 행위를 부정하고 비웃는 듯 웃는 조소에 나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잠시 후 하늘에서 붉은 피눈물이 내리며 ‘그’의 속삭임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악몽?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악몽은 계약을 맺기 전부터 꾸었던 그 꿈이었다. 나는 탁자 위의 회중시계를 펼쳐 보았다.
4:44
정확히 일치하는 시간이다. 절망의 밤 속에 나타났던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아르곤 성왕력 2748년 바람의 콘라드(Cone lard)의 열세 번째 날.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사탕파이를 들고 왕을 만나기 위해 입궁을 서둘렀다.
지독한 악몽 때문에 일부러 하인츠나 나와 친분이 두터운 자들은 상단을 지키도록 하였고 가빈스 자작과 동행했다.
하인츠에게는 혹시 모를 위기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상단의 돈을 일부 비자금으로 다른 곳에 숨겨 두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이다.
하지만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뛰어올랐다. 왜? 무엇 때문에? 다시 찾아온 거야? 앙? 병 따위가 다시 찾아와도 나를 죽일 수 없어. 아직 ‘그’와의 거래는 끝난 것이 아니니까.
* * *
화려한 왕궁의 안, 왕은 충심으로 가득한 후작의 방문에 호의를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오, 델몬트 후작. 요즘 후작의 얼굴을 자주 보는군. 그래 무슨 일인가?”
“폐하, 신이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녹티스 상단 때문이옵니다.”
“노, 녹티스? 괘씸한지고, 그들은 왜?”
“다름이 아니고 그들이 새로운 물품 등을 개발하여 왕께 진상을 하고자 하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셨으면 하옵니다.”
“흥, 그들은 짐을 속였다. 나는 그런 자들의 물품 따위는 관심 없다.”
“폐하, 그들이 저희를 속인 일은 없었사옵니다. 그들이 보여 준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방법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으며 포션 역시 마찬가지이옵니다. 다만, 저희 왕궁의 마법사들이 부족하여 그 포션의 제조술을 따라가지 못하니 이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오나 이미 약속을 한 이상 이것에 대해 뭐라 할 것은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상단에서 개발한 물품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이라 들었사옵니다.”
“그, 그래? 그럼 한 번 가지고 와 보게.”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귀족들 사이에서 로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검의 왕국의 주인을 뵙사옵니다.”
“그래, 자네가 또 새로운 물품을 개발했다고?”
“그렇사옵니다. 이번에 개발한 물품은 사탕이라는 과자이며 진상할 물품은 사탕파이라는 음식이옵니다.”
“사탕파이? 호오, 궁금하도다.”
왕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파이를 입에 물었다.
바삭, 바삭? 바삭. 바삭.
한입을 베어 문 다음에 맛을 음미하던 왕의 눈이 커지며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단것을 좋아하는 왕을 노린 음식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 단맛의 정체는 메이플 시럽과 달콤함을 지닌 바리스(Baris)라는 과일이니까.
바리스는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특이한 과일로서 야자수와 비슷한 모양을 지닌 나무에서 자라나는데 야자수 열매 대신 이 과일을 생산한다.
과일 자체에 독소가 들어 있어 바로 먹으면 열이면 열 죽겠지만, 연금술로 독소를 추출하고 가공하여 설탕과 비슷한 물품을 만들 수 있었다.
“훌륭하다. 어,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올 수가 있는가?”
“이것은 사탕이라는 과자이옵니다. 입에 물고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녹아 단맛이 입안에 어우러져 더욱 오랫동안 달콤함을 즐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좋다, 좋아. 훌륭해!”
왕은 역시 생각대로 단맛에 완전히 반했는지 계속해서 사탕파이와 사탕을 입에 넣으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델몬트 후작이 앞으로 나서 왕에게 말하였다.
“폐하, 훌륭한 물품을 만든 녹티스 상단에게 그에 걸맞은 작위와 상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흠,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물건들은 모두 불량이다. 포션은 만들 수 없으며 아이스크림은 그 수량이 너무 적다.”
“폐하, 저희가 전해 드린 방법에는 한 치의 이상도 없었으며 수량에 대한 것은 해결할 방안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뭔가?”
“저희 상단에서는 그것을 믹서기라 부르며 자동적으로 과일을 갈아 지속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계이옵니다.”
“기계?”
“마정석을 이용한 일종에 아티팩트이옵니다.”
“그래! 아티팩트였어.”
왕의 옆에 서서 힌트를 얻은 왕궁 수석 마법사가 감탄의 탄성을 질렀다.
“흥, 월터 경은 이제야 그것을 생각해 냈는가?”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폐하, 녹티스 상단은 100개의 사탕을 매일 왕가를 위해 바친다고 하옵니다.”
“100개밖에 진상을 안 하겠다고?”
“사탕은 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며 하루에도 고작 300개 정도밖에 만들 수 없사옵니다.”
“그렇게나 적나?”
“그렇사옵니다. 원료가 되는 물품이 구하기 힘든 오지에 있는 물건이며 그 양도 워낙 적어, 더는 어렵사옵니다.”
“그럼, 150개를 바치도록 하여라. 그러면 그동안에 잘못을 용서해 주겠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끝까지 맘에 안 드는 왕이다.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다니. 300개 중 반을 가져간다니, 정말 돼지 같은 탐욕에 경의를 표한다.
“폐하, 신이 생각하기에는 그에게 백작 위를 선사해 상인들의 귀감으로 삼아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물건을 왕에게 바치는 그런 상인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하여야 된다고 생각되옵니다.”
“좋다. 녹티스 상단주에게 백작 위를 하사하겠다.”
“그건, 말이 안 되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올리버 후작,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오?”
“10대 상인에도 끼지도 못한 그냥 보잘것없는 상인에게 백작 위라니요. 10대 상단주들도 겨우 자작이 한계입니다. 너무 과한 상이옵니다.”
“그런가요?”
왕의 물음에 델몬트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폐하. 그가 작위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올리버 후작, 10대 상단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이런 대단한 물품을 왕에게 바친 적이 있는가? 그리고 10대 상단주들에게 묻겠다. 그대들도 로스트 경이 백작 위를 받는 것에 반대하는가?”
“아니옵니다. 폐하의 옳으신 판단에 신, 가빈스는 고개 숙여 감탄에 감탄하였나이다.”
가빈스가 다른 10대 상인들보다 선수를 쳐서 말하자 눈치를 보던 다른 남작들도 찬성표를 던져 왔다.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느낀 모양이다.
“신, 루팡도 감탄하였나이다.”
이미 입을 맞춘 귀족들이 찬성을 표하자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잘 짜인 각본 같았다.
찬성을 표하는 귀족들과 델몬트 후작의 입김으로 올리버 후작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나는 백작 위를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10. 후작의 선물(1)
귀족들은 승마를 필수 교양으로 배우며 플로라는 게임을 즐겨 한다. 플로는 말을 타고 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멍에 집어넣는 게임이다.
델몬트 후작은 특히 이 게임을 즐겨하며 자신의 저택에 플로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만들었다. 공을 따라 수많은 기사들이 말을 달리며 막대기로 서로를 견제하며 공을 몰아간다.
후작은 저 멀리 떨어진 관람석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지배자가 된 듯 거만하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후작의 표정에 자랑스러움이 물씬 풍겨 나왔다.
“어서 오게나. 로스트 백작. 이곳에 경치는 마음에 드는가?”
“이렇게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어떤가? 우리 가문의 기사들은?”
후작의 가문은 대대로 무를 상징하는 가문으로 아반크로스국의 열여덟 명의 소드 마스터 중 다섯이나 포함된 강력한 가문이다.
일단 델몬트 후작 자체가 소드 마스터 중급에 도달한 대단히 강력한 기사였으며 가문 대대로 최전방을 수호하고 각종 몬스터들과 생사를 다툰 강군들을 보유한 후작은 왕국의 최고의 기사 가문이자 왕의 실질적인 힘이라 말할 수 있다.
“모두 강해 보이는군요.”
“자네의 눈에도 강해 보인다니 다행이구만. 그들은 모두 생사의 갈림길을 수십 번씩 넘나든 전사들이라네.”
“저 같은 것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후후, 자네는 정말 자신을 감추는데 능한 것 같구만. 굳이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말게나. 자네가 실력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
후작은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며 나를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기억나지 않는가? 자네가 왕궁에서 내가 내뿜는 기세를 꿋꿋이 버티던 일이?”
“그것은……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허, 자네가 운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겠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게나. 운도 실력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후작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꿍꿍이일 것인가? 후작이 자신의 부하들을 보여 주기 위해 이곳에 부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거래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나는 의문을 풀기 위해 후작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