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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6화)
第二章 천마신공(天魔神功)(3)
뜻하지 않은 이랑의 말에 이학의 눈으로 언뜻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 빛은 곧 이학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설마 랑이가 청이를 생각해 주는 건가?’
모르겠다.
여전히 아무 표정 변화도 없는 이랑의 얼굴에선 그 어떤 뜻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필요 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님을 느낄 뿐이었다.
‘하긴 랑이 자신조차 지금 내게 한 말의 뜻을 알 수 없을 테지. 단지 스스로 지금은 내가 필요 없다 여겨 말했을 터.’
자기 자신도 모르게 동생을 배려해 준 것이리라.
아들 이랑의 말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 이학은 그가 볼 수 없게 미소를 그린 후, 먼저 사라진 이청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랑은 이내 이학이 가르쳐 주었던 천환지경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수련에 들어갔다.
***
“신 월영마검(月影魔劍)의 후손 초현이 주군과 도련님을 뵈옵니다.”
부드러운 말이었다.
여인처럼 가는 선을 가진 사내는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뒤로는 한 아이가 고개만을 빠금히 내민 채 불안한 모습으로 눈앞에 선 이학과 이랑을 바라봤다.
눈망울이 유독 큰 아이.
이랑과 동갑으로 보이는 아이는 계집처럼 곱상한 얼굴을 갖고 있었으나 일신에 입고 있는 의복이 결코 여아가 아닌 사내아이임을 알게 해 주었다. 한편, 자신을 초현이라 밝힌 사내는 여전히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밀며 웃어 보였다.
“무엇 하느냐, 어서 두 분께 인사 올리지 않고?”
“음……. 초유랑이 주군과 도련님께 인사 올려요.”
아비인 초현의 말에 애써 용기를 냈다.
비록 호랑이같이 무서운 얼굴의 이학이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절을 했다. 어젯밤 내내 연습했던 큰절을 올리며 아비 초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모습이 앙증맞았다. 이학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맑은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어디서 배웠는지 큰절을 올리며 인사하는 모습이 대견하고도 귀엽게 느껴진 것이다.
“예쁜 아이를 두었군.”
“하하, 사내아이가 예뻐 봐야 어디다 쓰겠습니까. 오히려 짐이 될 뿐이지요.”
“하긴 자네 젊었을 때를 생각하자면 확실히 짐이 되겠군.”
“……!”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초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이학의 말에서 젊은 시절 겪었던 여난(女難)을 떠올린 것이다. 한편, 아비 초현과 마찬가지로 초유랑 역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본성이 선하고 소심했던 초유랑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일어서야 할지 말지를 몰라 난처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초유랑의 모습을 미소 그린 얼굴로 바라보던 이학은 이내 말없이 옆에 선 이랑을 돌아봤다.
“가서 손을 잡고, 네가 직접 일으켜 주거라. 이제부터 너의 검술 친구가 될 아이이니 말이다.”
“…….”
검술 친구란 말에 이랑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그러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져 이학조차 눈치 챌 수 없었으며, 그는 단지 아비의 말대로 앞으로 걸어가 직접 초유랑의 몸을 일으켜 세울 뿐이었다. 그저 말없이 몸을 일으켜 주는 이랑의 행동에 당황한 초유랑은 황급히 자신의 아비 초현을 돌아봤다.
“허, 날 보면 어쩌자는 것이냐? 너를 일으켜 세워 주신 분은 도련님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응당 도련님께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 터.”
“고, 고맙습니다.”
“괜찮아.”
아비의 말에 그제야 다시 이랑에게 시선을 돌린 초유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말에 이랑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짤막한 한 마디를 던졌다. 아무런 특색도 없는 그의 무감각한 말에 초유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결국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허허. 야, 이놈아, 사내놈이 뭐가 부끄러워 그리 얼굴이 빨개진단 말이냐? 설마하니 사내놈이 같은 사내인 도련님께 반한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목을 휘어 감으며 던진 초현의 장난에 초유랑은 더욱더 얼굴이 빨개져 아비의 품에 안기며 거세게 고개를 휘저었다. 그런 두 부자의 모습을 이랑은 그저 말없이 볼 뿐이며, 이학 역시 어느새 굳은 얼굴로 아비 품에 안긴 초유랑을 주시했다.
‘틀렸군.’
이랑이 검을 익힌 지 일 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이랑은 이학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빠른 속도로 검을 배워 나갔다. 마치 그 한계선이 존재치 않는 듯 검을 익히는 이랑의 모습은 이학을 기쁘게 했으나, 그렇다고 그의 걱정마저 덜어 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
감정을 모르기에 드러낼 수 없는 이랑의 마음을 걱정한 이학은 일부러 나이가 같은 초유랑을 부른 것이다. 아비인 초현은 어려서부터 유쾌하고 넉살이 좋아 모두와 친해질 수 있는 자유분방한 자였다. 그런 초현의 아들인 초유랑 역시 아비를 닮았을 것이라 여겼으나 그것은 이학의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이다.
‘저리 수줍음이 많아서야 결코 랑이와의 경계를 깰 수는 없다. 친구란 모름지기 신분과는 상관없이 대등하게 여길 수 있는 자여야만 하는 법. 결국 이 천마궁에는 랑이의 친구가 될 자가 없단 말인가.’
안타까웠다.
자식에게 친구 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는 자신이.
지난 팔 년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는 이랑이.
너무도 안타까워 이학이 장탄식을 내뱉으니, 그 소리에 이랑이 기이한 시선으로 이학을 바라봤다. 마치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랑의 시선에 이학은 쓴 미소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약해지면 어쩌자는 건가!’
약한 마음을 아들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식은 무릇 아비를 동경하며 그 그림자를 밟고 자라는 법.
자신이 그랬듯 이랑 역시 똑같을 것임을 알고 있는 이학은 애써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며 말문을 열었다.
“네가 내게서 검을 익힌 지 일 년이 지났다. 허나 경쟁 없이 혼자서 익히는 검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선 같이 검을 맞댈 상대가 필요하다. 너도 알다시피 초현은 천마궁이 자랑하는 십이대(十二隊) 중 마검대(魔劍隊)의 대주를 맡고 있을 만큼 뛰어난 검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의 아들인 유랑 역시 비록 어리지만, 검에 관해선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다 들었다. 아마 너와 좋은 호적수가 될 테니, 서로 검을 논하며 실력을 키우도록 하거라.”
“하하, 이거 너무 아들놈을 띄워 주시는 게 아닌지. 흠, 어쨌든 유랑 이놈아, 네놈도 주군의 말씀을 잘 들었겠지? 이제부터 틈틈이 도련님을 찾아뵙고, 도련님께 한 수 배우도록 하거라.”
“응.”
이학의 말을 웃음으로 받은 초현의 당부에 초유랑은 작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들의 소극적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초현이 꿀밤을 먹이니 초유랑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망울 가득 물기를 머금었다. 그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는지 초현은 하하 웃어 보이고, 사이좋게 장난을 치는 두 부자와는 달리 침묵한 이학과 이랑은 그저 말없이 초유랑과 초현을 지켜보았다.
***
“으아앙! 왜, 왜 내가 이딴 걸 봐야 하는데!”
“아가씨, 목소리를 낮추세요. 주인어른이 들으시면 어쩌려고 이리 우신단 말인가요?”
“힝, 할아버지가 들으려면 들으라지. 생각을 해 봐! 이제 겨우 열 살짜리 꼬마한테 천마궁의 재정 서류를 보라는 게 말이 돼? 으으, 내가 꼭 이런 머리 아픈 서류나 뒤적이면서 주판알을 튀겨야 하냐고?!”
“그, 그거야 이번 원로회의에서 하반기부터는 주인어른이 본궁의 재정 담당을 맡게 되었으니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바로 그거야! 재정 업무는 할아버지가 맡은 거지 내가 맡은 게 아니라고! 제길, 나이 값도 하지 못한 채 놀기 좋아하는 노인네가 이젠 어리디어린 손녀마저 이용했겠다. 으으, 분하고도 원통하도다. 내 나이가 어려 아직 자립을 못하는 게 너무도 분하고 원통해 미칠 것 같아! 대체 이 원통함을 어디다 하소연해야 되는 거야!”
길길이 날뛰었다.
진홍빛 치맛자락이 펄럭이든 말든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런 여아의 모습에 이십 대 후반의 시비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쩌겠어요, 이것도 다 천재로 태어난 아가씨의 업보인걸.’
천재다.
분명 천재다.
열 살의 나이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달통한 여아는 분명 천재였다. 또한 그 천재성 때문에 그녀의 할아비이자 십이원로 중 하나인 천음신마(天音神魔) 자천광에게 이용당하기 일쑤였다. 음령대주(音玲隊主)를 겸하고 있는 자천광은 백팔마귀 중 하나인 광혼마소(狂魂魔笑) 자백의 후손으로, 천성이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 그가 어쩔 수 없이 십이원로란 자리를 꿰차고 앉은 까닭에 그동안 골치 아픈 서류와 싸워야 했으나 손녀인 자인영이 태어나고부터는 그 싸움과도 안녕할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영롱한 눈빛이 범상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천광의 예측을 뛰어넘는 천재성을 발휘한 것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그 열에서 다시 스무 가지의 새로운 것을 만들 줄 아는 아이가 자인영이었다. 그런 영특한 손녀에게 자천광은 자신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서류들을 보여 주고, 또한 그 서류들을 처리하게 만들었다. 처음 자인영은 그것이 할아버지와 하는 놀이인 줄 알았으나 얼마 안 가 그녀는 자신이 자천광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어, 어느새 그녀는 자천광을 대신해 서류의 태반을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먹여 주고 재워 준다는 대가로…….
덜컹!
“안 돼! 이대론 안 돼! 이대로 간다면 난 시집도 못 가 본 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류 뭉치에 싸여 있어야 할 거야!”
“아, 아가씨, 어디 가세요?!”
방 안을 흥분해 날뛰던 자인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방문을 걷어차며 뛰쳐나갔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시비가 황급히 뛰어와 말리니, 자인영은 자신의 소매를 잡은 시비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어디 가냐고?! 당연히 천마각(天魔閣)이지! 천마각에 가서 궁주님께 내 할아버지를 아동착취(兒童搾取) 죄로 고발할 거야!”
“하, 하지만 그건 고자질이잖아요.”
“바보! 고자질이 아니야! 이건 장시간 노동과 무임금에 대한 정당한 항의라고. 그래, 맞아! 이건 내 찬란한 미래에 불어 닥칠 암흑을 걷어 내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란 말이야! 사자성어에도 나와 있잖아!”
“네?”
엉뚱한 자인영의 말에 시비가 곤혹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여인을 향해 자인영은 히죽 웃으며 답해 주었다.
“정(正)! 면(面)! 돌(突)! 파(破)!”
“에?! 하지만 아가씨, 그건…….”
정면돌파란 사자성어도 있었던가?
자인영의 억지소리에 여인은 일순 얼이 빠져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 자인영은 힘껏 발을 놀려 천마각으로 향했다.
“두고 봐! 내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위기를 정면돌파 해 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