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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7화)
第三章 야월(夜月)(1)
춤.
사내는 춤을 춘다.
광란(狂亂)이란 이름의 춤을…….
전신을 흑포로 감싼 채 얼굴마저 검은 두건으로 가린 사내는 미친 듯 양손을 휘젓고, 그때마다 허공 위론 어김없이 피가 튀었다. 하늘을 수놓듯 피어오른 붉은 혈화(血花)가 하늘마저 가리니, 그 피를 뒤집어쓴 사내는 더욱더 격하게 양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음인가.
문득 사내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며, 검은 두건 사이로 드러난 자청색의 눈이 빛을 발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시체.
오직 시체만이 가득한 장내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족히 일백은 넘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팔다리부터 시작해 전신이 날카로운 칼에 베이기라도 한 듯 절단돼 죽어 있었던 것이다.
지옥도(地獄道).
현세라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을 연출해 낸 흑포 사내의 시선이 문득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유일한 생존자인 듯 보이는 중년 사내가 겁에 질린 채 소리치고 있었다.
“누구냐?! 넌 대체 누구기에 본채를 공격한단 말이냐?!”
길림성에서 흉악하기로 소문난 산왕채(山王寨)의 채주 장평이 악을 쓴다. 단 반 시진 만에 모든 수하를 잃고 홀로된 장평의 마지막 발악에 흑포 사내는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흐하하하하하하! 모자라, 아직 모자라! 그를 상대하기엔 아직 모자라단 말이다!”
“……?!”
파밧!
섬뜩한 기음과 더불어 장평의 육신이 한순간 잘려 나갔다.
신경질적으로 우수를 휘저은 사내에 의해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허무한 죽음을 맞은 장평을 흑포 사내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작 일곱 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는 고작 일곱 개가 전부다. 비록 팔 년 전보다 두 개나 더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이 정도론 그를 이길 수 없다.”
뜻 모를 말.
그 말과 더불어 흑포 사내의 눈이 자신의 양손으로 향했다. 이내 그의 눈 속엔 검게 물든 장갑이 비쳐 드니, 그것을 바라보던 사내는 무언가 화가 나는 듯 양손을 꽉 움켜쥐어 보였다.
“이래서는 천 년 전과 같은 결과가 날 뿐이다! 사신(死神)이 그랬듯, 나 역시 천마의 손에 패하고 말 것이다!”
조급했다.
일생을 인내 하나로 살아왔던 그였다.
그러나 점차 깊어만 가는 병세가 조급함을 불러일으켰다. 하나 다행히도 조급함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한 사내의 모습과 어우러져 사라질 수 있었다.
팔 년 전, 혼자의 힘으로 절벽을 탈출하던 이학의 모습.
그 모습을 기억해 낸 흑포 사내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팔 년간 얻었던 힘을 시험키 위해 찾았던 산왕채를 떠났다.
‘아직은, 아직은 시간이 있다.’
***
맑던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빗속에서 계집아이는 영롱한 빛을 발하는 눈망울을 들어 조심스레 주변을 훑어보았다. 천마궁을 다스리는 십삼대 천마 이학이 기거하는 천마각을 눈앞에 두기는 했지만, 그 건물 입구를 지키고 선 천마대(天魔隊)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마대는 백팔 가문에서 뛰어난 자들만을 골라 만든 단체로, 천마궁에서 자랑하는 십이대와는 달리 오직 천마만을 수호하며, 그의 명만을 받는 직속 호위무사들이다. 또한 그들은 미리 허락을 받지 못한 자들을 천마각 안으로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 자인영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떼를 써 볼까? 아서라, 아서. 누가 너 같은 꼬마 계집의 응석을 받아 주고, 궁주님께 안내하겠니? 흠, 그럼 어쩐담.’
“……!”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부터 천마각 안에서 소궁주의 검 상대를 해 주는 사촌 초유랑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그것을 떠올린 자인영은 풀잎을 따서 손에 쥔 채, 저 멀리 보이는 천마각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디뎠다.
당당한 모습으로 정문을 지키고 선 호위무사들 앞으로 다가간 자인영은 의문의 빛을 발하는 그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랑이를 만나러 왔어요.”
“음?”
“……?!”
너무 갑작스러워서였을까.
정문을 지키고 있던 두 호위무사는 당돌한 꼬마 계집의 말에 어이가 없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앞에 선 여아의 신분을 알고 있던 흑의 사내가 이내 두 눈 가득 힘을 준 채 그녀를 질책했다.
“아무리 원로님의 손녀라 하나 감히 도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이건 도저히 묵과(默過)할 수 없구나!”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제가 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말한 랑이는 유랑이를 말한 거라고요. 천마각을 수호하는 아저씨들이라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도련님의 검 상대를 해 주는 제 사촌 동생 초유랑을 말이에요.”
“음…….”
물론 알고 있었다.
또한 초유랑의 어미인 자서인이 바로 자인영의 할아버지인 자천광의 둘째 여식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질책을 던졌던 흑의 무사는 안색을 펴며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요 당돌한 것이 어른을 놀리다니……. 흠, 그래, 미리 허가는 받은 게냐? 그렇다면 당연 허가증이 있겠지?”
“허가증요? 그게 뭔가요? 전 단지 유랑이가 오늘 아침 도련님께 제 풀피리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해서 이렇게 찾아왔는걸요. 정 의심나시면 유랑이를 불러 확인시켜 주세요.”
답하는 데 있어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당당해 거짓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자인영의 태도였으나, 그렇다고 그 행동만을 놓고 그녀를 통과시켜 줄 만큼 천마대는 유순하지 않았다.
“백현, 자네가 가서 유랑, 그 아이를 데리고 오게나.”
“…….”
자인영을 상대하던 사내가 옆에 선 친구를 돌아보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백현이라 불린 사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천마각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편 자인영은 자신의 말 놀림에 넘어가지 않고 확인 절차를 거치려는 두 사내의 움직임에 오히려 회심의 눈빛을 발했다.
‘후후, 모두 내 생각대로 되어 가는구나. 그래그래, 빨리 가서 유랑이를 불러오시라고요.’
처음부터 목적은 초유랑이었다.
초유랑을 통해 소궁주인 이랑을 만나는 것이 바로 이곳 천마각에 도착해서 그녀가 짠 계획이었던 것이다.
‘천마각에 들어간다 한들 내가 궁주님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궁주님과 가까운 도련님을 이용해 만나면 모든 일은 만사형통(萬事亨通), 술술 풀리는 거라, 이 말씀이야. 문제는 유랑이를 데리러 간 그 아저씨가 순진한 유랑이에게 쓸데없는 것을 묻지 말아야 하는데……. 후후, 이 또한 천운이 도왔다 할 수 있겠지.’
과묵한 사내였다.
척 보기에도 말수가 없어 보였던 사내는 아마 묵묵히 초유랑을 자신에게 데려와 줄 것이다. 과연 그녀의 짐작이 맞았음인지 얼마 있지 않아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초유랑이 백현의 뒤를 따라 천마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아이고, 요 귀여운 것! 이 누나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네가 오늘 아침에 나한테 도련님께 풀피리 소리를 꼭 들려주고 싶다고 천마각으로 찾아오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바쁜 시간을 쪼개 이 빗속을 뚫고 왔는데, 글쎄 이 아저씨들이 허가증이 없다고 날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지 뭐야? 이게 다 네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뭐, 넌 귀여우니까 이 마음 넓은 누나가 오늘의 과오를 용서해 주도록 할게.”
“으, 응.”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듯했다.
평소 자신을 끔찍이 귀여워해 주다 못해 괴롭히던 사촌 누나인 자인영을 발견했다 싶은 순간, 그녀는 초유랑이 입을 열기 전 어느새 다가와 덥석 껴안으며 폭포수 같은 말을 던진 것이다. 그 빠른 말솜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초유랑은 그저 누나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준다 하니 고마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정신없기는 백현과 그의 친구인 흑의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재빨리 본정신을 차린 흑의 사내가 말없는 백현을 대신해 확인 차 질문을 던졌다.
“지금 네 누나의 말이 사실이더냐?”
“네?”
직시한 사내의 시선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시선을 재빨리 머리로 가린 채 초유랑을 향해 미소 짓는 자인영의 모습이 그에겐 한층 더 두렵게 비쳐 들었다.
“저것 봐, 이 누나를 거짓말쟁이 취급하잖아! 유랑아, 넌 이 누나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이니? 아니지?”
“으응…….”
교묘한 말솜씨로 사내의 질문과 자신의 질문을 합쳤다.
하나로 합쳐진 질문에 대한 초유랑의 대답은 긍정이니, 곧 힘을 얻은 자인영이 몸을 돌려 흑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봐요. 응이라잖아요! 참나, 사람 말도 못 믿어 주고. 내가 뭣 때문에 거짓말하면서 굳이 도련님을 만나려 하겠어요? 이게 다 알고 보면, 내가 거짓말쟁이 취급받는 것도 유랑이 너 때문이야! 하긴 뭐, 네가 우리 집안의 아름다운 음(音)을 들려주고픈 마음은 이해를 해. 대대로 음공(音功)만을 전문으로 연구하고 익힌 우리 집안의 음은 천하제일이니, 그 소리를 도련님께서 듣는다면 아마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아무리 도련님께서 우리 집안의 음을 좋아하신다 해도 거짓말쟁이 취급받으며 들려주고픈 마음은 없다고.”
“하아.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좀 떠들고 들어가라. 이거야 원, 머리가 아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정말로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부러 목소리마저 크게 한 자인영의 청산유수(靑山流水)와도 같은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흑의 사내가 손을 휘휘 내저으니, 자인영은 그를 향해 ‘베∼’ 하고 혀를 내민 후 냉큼 천마각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런 그녀의 뒤를 아직도 어리둥절한 모습의 초유랑이 따르고, 이내 두 아이의 모습이 천마각 안으로 사라지자 그동안 침묵하던 백현이 살았다는 표정으로 장탄식을 흘려보냈다.
“휴우, 천재는 확실히 천재로군.”
“그래, 확실히 천재지. 말솜씨에 관해선 아마 그 누구도 저 아이를 따라오지 못할걸. 그나저나 이거 왜 이리 찝찝한 기분이 드는지……. 왠지 저 계집아이의 말장난에 놀아난 것 같단 말이야.”
“…….”
뭔가 영 아닌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백현 역시 마찬가지이나 이미 활 떠난 화살이기에 두 사내는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무언(無言)의 합의를 본 채 침묵을 지켰다.
“헤헤, 오랜만에 입을 좀 놀렸더니 목이 다 아픈걸. 그나저나 유랑아, 이 누나의 연기 솜씨가 어떠니? 괜찮았지?”
“누나, 정말 여긴 왜 온 거야?”
이제 좀 정신이 들었는지, 긴 통로를 지나던 초유랑이 걸음을 멈춘 채 자인영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게 느껴지던지 자인영은 참지 못하고 사촌 동생을 꼭 안아 보았다.
“왜 오긴, 우리 유랑이가 보고 싶어서 왔지. 이 통통히 오른 볼 살 하며, 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어찌나 그립던지. 아이고, 귀여운 것! 우리 유랑이, 나중에 크거든 꼭 이 누나에게 장가오렴.”
말과 행동이 완전히 애늙은이였다.
답답할 정도로 허리를 부여안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론 이리저리 얼굴을 매만지며 뽀뽀를 해 대는 자인영의 행동에 초유랑은 기겁한 듯 급히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몸을 뺐다.
“시, 싫어!”
“뭐, 싫어?! 지금 이 누나에게 장가오기 싫다는 거야?!”
“하, 하지만 무…….”
차마 무섭다는 말은 못했다.
그저 쭈뼛쭈뼛 선 채 고개 숙이는 초유랑의 모습에 자인영은 싱긋 웃어 보였다.
“바보. 농담이야, 농담. 할아버지가 외사촌끼리의 혼례를 허락할 리가 없잖아. 어쩜 넌 이리 숙맥이니,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하고. 후훗, 하긴 그 모습이 또 귀엽긴 하지만……. 자아, 어쨌든 이곳에 온 볼일은 끝마쳐야 하니까 도련님이 계신 곳으로 날 안내해 주렴.”
“응!”
자인영에게 장가를 안 가도 된다는 생각에 초유랑이 기뻐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자인영은 자신의 말에 짧은 대답과 더불어 신이 나 앞서 걷기 시작한 초유랑의 모습을 보며 쓴 미소를 그려야만 했다.
‘뭐가 저리 기쁘담? 너무 기뻐하니까 이거 오히려 내 기분이 나빠지는걸.’
차여도 완벽하게 차였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던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유랑은 들뜬 걸음으로 비를 피해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랑에게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