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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8화)
第三章 야월(夜月)(2)
좌우 양쪽 벽면으론 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가 걸려 위풍을 더했다.
검(劍)부터 시작해 궁(弓), 노(弩), 도(刀), 창(槍), 낭아봉(狼牙棒), 금과추(金瓜錐) 등 수많은 병기가 걸린 연무장 중심엔 사내아이가 초라한 목검을 든 채 침묵을 지켰다.
이랑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
아비인 이학으로부터 전해 받은 목검을 비스듬히 바닥을 향해 내려뜨린 채 두 눈을 감고 선 이랑은 고요했다. 깊은 정적만이 흐르는 연무장 안은 마치 흐르지 않는 물과 같았으나 이내 이랑의 두 눈이 뜨이며 고여 있던 물은 격한 물살이 되어 흘러야만 했다.
파바밧!
정면을 향해 한 발짝.
손에 들린 검은 하(下), 중(中), 좌(左), 우(右) 총 네 번.
네 번의 연결 동작과 더불어 시작된 검무는 이내 내디뎠던 우족을 축으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는 이랑에 의해 끊이지 않는 흐름이 되어 연무장 안으로 검화를 피워 올렸다.
천환지경(天幻地驚).
유혹하듯 피어오른 천환지경이 만들어 내는 꽃은 절정에 이르면 백 송이에 달하며, 진경에 이른 이가 만약 천환지경을 펼친다면 그 꽃은 더 이상 상대를 유혹하는 환(幻)이 아닌 실(實)이 되어 시전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적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랑이 현재 만들어 낸 검화는 총 스물한 개로 그의 검술이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려 주었으나, 그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그 또한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촤아아아!
문득 이랑이 펼치던 검세가 변화했다.
더 이상 환이 아닌 진(眞)이 된 검세는 허공 위로 피워 올렸던 검화를 잊은 채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풍유류섬(風柔流閃).
비록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러워 기분을 좋게 하나 그 속에 감추어진 한 줄기 섬광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의 묘를 담아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는 극쾌의 검술이었다. 천마검식의 이식이기도 한 풍유류섬을 펼쳐 보이던 이랑은 한순간 눈을 빛내며 폭발하듯 검을 떨쳐 허공 위로 묵빛 섬광을 그려 보였다.
파앗!
검은색 목검이 그려낸 섬광이 일순 대기를 가르며 모든 걸 정지시켰다.
수많은 검선을 그려 냈던 목검도, 그 목검을 움직이던 아이도. 모든 게 정지된 연무장 안에서 가만히 자신의 손에 들린 목검을 바라보던 이랑이 문득 시선을 돌려 한 곳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그곳엔 익히 알고 있던 초유랑과 처음 보는 얼굴의 자인영이 서서 놀란 눈으로 이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랑이 피어 올리는 검화가 열 개를 넘어가면서부터 그의 움직임을 직접 보았던 자인영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이랑의 시선에 화답하듯 감탄성을 발했다.
“대, 대단해! 대단한 거 맞지?!”
“응, 맞아! 도련님이 방금 펼친 검에선 바람이 일어 대기를 갈랐는걸. 그건 분명 미약했지만, 아빠가 얘기하던 검풍(劍風)이 틀림없었어!”
자인영의 흥분된 질문에 초유랑 역시 덩달아 흥분하며 답했다.
검가의 후손답게 보이지 않는 검풍을 느낀 초유랑은 마치 이랑이 이제 막 발을 딛기 시작한 경지를 제 일인 양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랑과 대결하기를 총 열 번.
그 열 번 중 초유랑이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릇 사람이란 연속된 패배에 이기고자 하는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건만, 초유랑은 오히려 이랑을 오를 수 없는 나무처럼 여기며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 상대가 전에는 보여 주지 않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니, 그 사실만으로도 초유랑은 기쁘고 흥분되었다. 한편 자인영은 사촌 동생인 초유랑과는 달리, 이랑이 피워 올렸던 검화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들뜬 채 그것을 시전했던 장본인인 이랑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그렇게 바라보기를 얼마.
“크으…….”
무언가를 억지로 참듯 한 줄기 신음성을 발한 자인영이 이랑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이랑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두 손을 꽉 움켜쥔 자인영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듯 부르르 양팔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않는 애매모호한 표정이 되어 그녀가 무언가를 억지로 참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으으……. 귀, 귀여워!’
더 이상 마음속 욕망을 참지 못했음인가.
양손을 합치며 활짝 웃는 자인영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뇌리 속으론 방금 담아 두었던 이랑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다른 아이에게선 볼 수 없는 저 무표정한 얼굴도, 멍한 눈빛도 너무너무 귀엽잖아!’
초유랑과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갖고 있는 이랑이었다.
그 모습을 남들이라면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나 오히려 자인영은 귀엽다 느꼈다. 본시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그녀였기에 자인영은 지금 당장 이랑의 얼굴을 더듬고 싶은 자신의 검은 손길을 애써 말려야만 했다.
‘핫! 내 이 무슨 추태를? 안 돼, 안 돼! 아무리 귀여워도 장차 내 주인이 되실 분인데, 참아야지. 암, 지금 잘못 보였다간 내 장밋빛 미래도 사라지는 게 되니까.’
“후우…….”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킨 자인영이 다시 몸을 돌려 이랑을 바라보았다.
순간.
“윽!”
여전히 멍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어찌나 귀엽게 느껴지던지 자인영은 결국 홀린 듯 이랑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댄 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아∼ 말랑말랑한 이 감촉. 너무너무 좋잖아…….”
“…….”
막힌 게 뚫린 듯 개운한 표정이 되어 미소 지었다.
여전히 이랑은 말이 없고, 오히려 당황한 초유랑이 급히 달려와 주책을 부리는 누나의 다리를 힘껏 움켜잡은 채 잡아당겼다.
“누나, 지금 도련님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너무 세게 당긴 탓일까.
한 줄기 고성이 들려온다 싶은 순간 힘없이 중심을 잃고만 자인영이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나무 바닥에 코와 이마를 찧고 말았다. 엎어졌다 싶은 순간 다시 벌떡 일어난 자인영은 동생을 향해 주저앉은 코와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가리키며 버럭 화를 냈다.
“아프잖아!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내 다리를, 헛!”
“누, 누나…….”
울먹이는 초유랑의 표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떠올린 자인영이 급히 입을 막았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어진 찻잔이니, 황급히 이랑을 향해 돌아선 자인영은 큰절과 함께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소녀 광혼마소(狂魂魔笑)의 후손 자인영이 도련님께 큰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괜찮아.”
“네?”
이랑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온 짤막한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재차 물었다. 무의식중 던진 그녀의 질문에 이랑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특유의 저음으로 답해 주었다.
“상관없어.”
“저, 정말요?”
“…….”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더 이상 답하기도 귀찮은 듯 가만히 침묵하는 이랑의 얼굴에서 자인영은 아무런 뜻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자인영이 내친김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상관없다면, 도련님의…… 아, 아니, 도련님과 친구가 될 순 없을까요?”
얼굴을 다시 한 번 매만지고 싶단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수 있는 친구란 단어로 자신의 욕망을 표출했다. 그녀의 숨겨진 욕망을 이랑은 아는지 모르는지 물끄러미 자인영을 바라보다 이내 그 시선을 초유랑에게 돌렸다. 놀란 가슴을 아직 쓸어내리지 못한 초유랑을 잠시 바라보던 이랑은 곧 시선을 돌려 자신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자인영에게 원하는 답을 안겨 주었다.
“유랑이와도 이미 친구니까 상관은 없겠지.”
“정말요?”
“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아비 이학이 초유랑과는 검술 친구라 했으니, 그와는 분명 친구란 관계로 묶여 있을 것이다. 그 친구란 관계 속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해도 그다지 문제될 게 없었던 이랑이다. 한편, 그의 무감각한 답에 자인영은 기뻐하고, 초유랑은 놀랬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바라만 보던 존재인 이랑이 자신을 친구라 불러 준 것이다. 그 사실이 감동과 기쁨을 주니 초유랑의 입가론 환한 미소가 걸리고,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자인영은 자신이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이랑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잘된 일이군요.”
“과연 그럴까?”
연무장 입구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선 이학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흘러들었다. 애써 화기롭게 변한 연무장 안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적발 노인의 전음에 이학은 여전히 웃지 않는 이랑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술을 움직였다.
“여전히 유랑이란 아이는 랑이와의 경계선을 허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저 아이. 그래, 아마 자 원로의 손녀딸이었지. 천재라 불리던……. 저 아이 또한 랑이의 진정한 친구가 되진 못할 것이다. 무릇 여인과 사내는 그 가는 길이 달라,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장차 친구란 관계는 무너질 터.”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
처음으로 이랑에게서 시선을 뗀 이학이 자신의 옆에 선 적발 노인을 돌아본다.
스스로를 노백(奴白)이라 칭하는 노인.
백진(白進)이란 이름을 가진 노인은 백팔마귀 중 하나인 혈류노괴(血流老怪)의 마지막 후손으로, 십이원로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학이 어려서부터 그를 보필하던 충복 중 하나로, 지금은 이학의 명에 의해 어미 없는 이랑을 돌봐 주고 있었다. 또 하나의 아비라 할 수 있는 노백의 말에 이학이 의문 어린 눈빛을 발하니, 노백은 주름 진 입가로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처음으로 도련님께서 다른 이를 친구라 불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뱉은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지?”
잠시 이학에게서 시선을 떼 이랑을 바라보았다.
아들도 손자도 없는 혈혈단신의 노백은 마치 친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비와 같은 인자한 눈길을 이랑에게 둔 채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도련님께선 변하고 계십니다. 스스로도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미묘한 변화가 도련님의 내부에서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저 아이들이 있다면, 지금은 그저 저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앞일이야 어찌 될는지는 이 노백 또한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저들이 있음으로 해서 도련님의 마음이 조금은 변한 것이 틀림없으니 말입니다.”
“백지 위에 점 하나가 찍혔단 말인가?”
“껄껄,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
자신의 표현이 재밌었던지 노백이 한차례 웃어 보였다.
그 웃음소리를 귓가로 전해 듣는 이학 역시 전과는 달리 미소 띤 얼굴로 이랑을 바라볼 수 있었다. 노백의 말대로 이랑의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랑 본인조차 알 수 없는 변화가.
“끙…….”
꾹 다문 입에선 난처한 신음성이 흘러나와 연무장 안을 물들였다.
방금 전까지 정자 위에서 술과 금음(琴音)에 취해 놀던 자천광은 느닷없는 이학의 호출에 부랴부랴 천마각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학이 있다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선 자천광은 이마 위로 식은땀부터 흘렀다.
노백을 필두로 이학의 뒤로 선 세 아이.
그중 자신의 친손녀인 자인영을 발견한 것이다.
‘저 어린 여우가 설마?!’
불현듯 엄습해 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을 안고 자천광이 이학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 광혼마소의 후손 자천광이 주군을 뵈옵니다.”
“연로한 나이에 본궁의 업무를 보느라 수고가 많소.”
걱정과는 달리 제법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에 마음을 놓은 자천광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 수고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가? 하긴 자신이 할 일을 어린 손녀에게 맡기고 술과 노래에 취해 있었으니, 수고라고 할 것까지도 없겠군.”
“헉?!”
싸늘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너무나 춥게만 느껴졌다. 마치 냉골에 빠지기라도 한 듯 엄습해 오는 한기에 자천광은 지체 없이 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자천광이 자신을 고자질한 손녀 자인영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지 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복수는커녕 매일같이 밀려드는 서류 뭉치에 싸여 정신없는 하루를 지내야만 했던 자천광은 어느새 복수란 단어마저 잊어야 했다.
한편, 자인영은 자천광과는 달리 맘껏 해방감을 느끼며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자신의 할 일이라고 해 봐야 가전무공을 익히는 것뿐이기에 그녀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맘껏 뛰놀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놀이의 중심엔 초유랑이, 그리고 언제나 묵묵히 지켜봐 주는 이랑이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들과 놀기 위해 천마각을 찾은 자인영은 자신보다 먼저 천마각에 도착했으나 두 사내에게 막혀 들어가지 못하는 초유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이 장면은?’
이 년 전, 자신이 천마각 안으로 들어가려다 막힌 상황과 똑같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두 사내인 백현과 정광영이 막고 선 인물이 초유랑이란 것이다. 한편, 자인영이 자신의 뒤에 와 있는 줄도 모른 채, 초유랑은 다시 한 번 애원에 찬 눈으로 백현과 정광영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안 되나요?”
‘윽, 무슨 놈의 눈빛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눈 속으로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과묵한 백현을 대신해 초유랑을 상대하고 있던 정광영은 그 눈빛에 하마터면 동정심을 머금고 길을 열어 줄 뻔했다. 그러나 고개를 흔듦으로써 본정신을 차린 정광영이 짐짓 표정을 험악하게 굳힌 채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아,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지금 도련님께선 너와 놀아 줄 만큼 한가한 입장이 아니란 말이다!”
“어머, 그 입장이란 게 대체 뭔지 설명을 해 주셔야지, 이 아이가 납득하죠. 그렇게 호통만 치면 어떡해요. 암튼 정 아저씨는 목소리만 크다니까.”
“……?!”
문득 세 사내만이 있던 자리로 어린 소녀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정광영의 호통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울먹이는 초유랑을 뒤에서 안아 주며 던진 자인영의 말에 천마각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상대.
그 상대가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끙. 꼭 이유를 알고 싶다면 알려 주지. 하지만 도련님의 친구를 자청하는 너희들이 설마 오늘의 일을 모를 줄은 몰랐구나.”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은근슬쩍 말로써 자인영과 초유랑을 비꼬며 정광영은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백현은 쓴 미소를 머금어야만 했다.
‘애들을 상대로 저러고 싶을까? 하긴 지난 이 년간 저 꼬마 계집의 말장난에 걸려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자인영을 아예 상대치 않는 자신과는 달리 정광영은 언제나 천마각에 들기 전 장난치듯 말싸움을 걸어오는 자인영의 도발에 핏대마저 올리며 상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번 자인영의 승리로 끝맺었으며, 정광영은 패배의 굴욕(屈辱) 속에 승리를 다짐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자인영을 놀릴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얻었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광영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말 속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자인영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응? 무슨 날? 무슨 날인데, 누나?”
“무슨 날이긴, 오늘이 바로 반년 전 도련님께 들었던 혈경을 지나 통경에 드는 날이잖아. 넌 어쩜 도련님을 동경한다는 애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을 수 있니?”
“……!”
그제야 생각난 듯 초유랑이 손뼉을 쳐 보였다.
궁금증이 풀려 신이 난 듯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동생 초유랑을 사촌 누나인 자인영이 이끌고 사라지니, 허무하게 뒤로 남은 정광영은 울상이 되어 땅을 쳤다.
“이, 이럴 순 없어…….”
무릎 꿇고 부탁할 줄 알았다.
제 잘난 줄만 아는 어린 계집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무릎은 안 꿇더라도 최소한 부탁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예상과는 반대로 너무도 허무히 사라지니 허탈감에 빠져든 정광영은 억울한 듯 애꿎은 땅만을 쳐 댄다. 한편, 그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던 백현은 말없이 다가와 친구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그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했다.
그러나…….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