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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9화)
第三章 야월(夜月)(3)


친구에게 다가가던 백현이 급히 걸음을 멈추며 두 손 가득 내력을 끌어 모았다. 백팔마귀 중 하나인 태양마후(太陽魔后)의 후손답게 양강지력(陽剛之力)을 손 안에 가득 모은 백현의 고성에 정광영도 어느새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 허리춤의 도(刀)를 빼어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
한 마디 고성을 끝으로 경계 태세에 들어간 두 사내는 한 곳을 주시하며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두 사내의 시선이 모인 곳은 방금 전까지 자인영이 서 있던 자리로, 이미 주인이 사라진 자리엔 그림자만이 남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검게 물든 어둠.
두 사내의 시선을 받은 어둠이 문득 고요한 세상 속으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의 소리도 없이 마치 형체가 없는 원혼(?魂)인 양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세운 어둠 속에서 두 줄기 자청색 빛이 뿜어져 나와 눈앞에 선 두 사내에게 향했다.
“흐흐흐, 천마란 이름 앞에 고개 숙인 개인가?”
“……?!”
“……!”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에 노하기보단 오히려 긴장감이 더욱더 커졌다.
들어올 수 없는 곳.
중원에서 그 누구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천마궁 안으로 유유히 숨어든 흑포 사내는 백현과 정광영의 무위(武威)를 훨씬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흑포 사내가 만약 자인영이 떠난 후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백현과 정광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천마각 안으로 들여놨을 것이다.
한편, 흑포 사내는 자신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답이 없는 사내들의 반응에 흥미를 잃었는지, 곧 흑포(黑袍) 속에서 검은 장갑을 낀 우수를 꺼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철컥!
순간, 흑포 사내의 예상 밖 행동에 정광영이 긴장하며 손 안의 귀두도(鬼頭刀)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흑포 사내는 당장이라도 도광을 뿌릴 듯 보이는 정광영의 행동을 무시한 채, 하늘을 향해 치켜든 자신의 손만을 바라보았다.
“가서 고하라. 나, 사신의 후예 야월(夜月)이 천마에게 도전하기 위해 왔노라고.”

***

정(精)에서 기(氣)가 생긴다.
기는 기운(氣運)이라고도 하며, 원래는 음양(陰陽)의 두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운을 두고 공자가 말하길,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물(物)이며 이 물은 물질을 뜻하니, 기는 천지, 즉 만물을 운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기화(氣化)하니 천지간에 물이 생(生)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기화란 무(無)인 기가 유(有)로 화해 물인 만물에 그 생을 안겨 준다는 말이다. 또한 만물에 깃든 기운은 자연히 태극(太極)도 시작이 되는 원리가 되며, 이는 곧 태극이 기의 주재(主宰)가 된다는 뜻이 된다.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된다는 태극.
기의 주재가 되는 이 태극이 음과 양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시초가 되는 기운이 있었으니, 이를 일컬어 원기(元氣)라 한다. 기의 시작이기도 한 원기는 음도 양도 아닌 무(無)이며,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원기의 정체는 암흑(暗黑)이었다.
태초에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던 어둠이 바로 원기의 정체이며, 또한 이 원기가 바로 이랑이 익히고 있는 천마심공의 근원이 된다. 여타의 내공심법이 음과 양의 기운에서 그 각각의 성질만을 골라 받아들인다면, 천마심공은 그 모두를 포함하는 기의 근원인 원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곧 천마심공이 얼마나 뛰어난 상승의 내공심법인지 확인시켜 주는 증거로, 비록 하루에 쌓이는 내력의 양은 적었으나 그 질적인 면에서는 다른 내공심법과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지금 지하 연공실 안에 정좌한 자세로 천마심공을 운용하는 이랑이 자신이 익힌 내공심법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나타내 주었다.
내공심법을 익힌 지 오 년.
기를 쌓을 수 있는 기경에 든 게 사 년 전이니, 지금 그의 단전에 축적된 기의 양은 극히 소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적은 기운만으로도 이랑은 반년 전 천마신공을 펼치기 위해 필요한 혈로를 뚫는 혈경에 들 수 있었으며, 오늘에 와서는 천마심공에서 말하는 통경에 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혈인 대추혈(大椎穴)을 향해 내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천마심공 자체의 뛰어남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나 그 증거만으론 통경으로 접어드는 이랑을 바라보고 선 이학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아무리 천마심공이 뛰어난 내공심법이라 하나 지금 이랑의 나이에 통경에 접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질적인 면에서 그 위력이 양을 능가한다지만, 고작 사 년. 사 년 동안 모은 원기로는 통경은커녕 혈경에 드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기 자체가 모으기 힘든 기운이므로 그것을 근원으로 삼는 천마심공을 하루 종일 운용해 봐야 받아들이는 양은 남들이 고작 한 시진 운용한 것과 같다. 그런 극소의 양을 사 년 동안 모았다지만, 그것만으론 막힌 혈 하나를 뚫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이랑은 그 힘든 일을 지난 반년여에 걸쳐 모두 뚫고 이제 마지막 한 개만을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무언가 내가 모르는 게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지나친 것이 있을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했음인가.
불현듯 이학의 눈으로 이채가 일며 그는 하마터면 자신의 손바닥으로 이마를 쳐 이랑의 연공을 방해할 뻔했다.
‘그렇구나! 내 어찌 이리 간단한 것을 놓쳤단 말인가? 무릇 사람과 기는 서로에게 맞는 것이 있는 법. 그것은 곧 사람이 타고난 기질과 일맥상통하니, 랑이와 원기의 궁합은 최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랑이 가진 성질은 무(無)다.
또한 원기의 근본 역시 무이다.
원기와 같은 성질을 가진 이랑은 역대 천마들이 천마심공을 이용해 받아들이는 양의 배가 되는 기운을 느끼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단전에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환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녀가 랑이에게 준 선물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아마 저 아이는 역대 그 누구보다 어린 나이에 도행(道行)을 시작하리라. 그녀가 준 선물이 저 아이를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시킬 테니…….’
새삼 자소청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 그녀 자신도 자신이 전해 준 설혼심결이 이랑에게 그 어떤 기연보다 값진 것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단지 빙혼을, 이랑을 빙궁의 신물인 빙혼의 주인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간절한 소망은 이랑에게 복(福)을 줌과 동시에 화(禍)를 안겼음이나 이학은 지금 당장 직면한 복만을 생각하며 미소를 그렸다. 그런 그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흘러든 것은 우연이 아닌 예정된 수순이었다.
“주군, 신 노백이옵니다.”
“무슨 일인가?”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과 이랑을 찾지 말라 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백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궁 내에 중요한 일이 터졌음을 뜻했다. 자연스레 미소는 사라지고 얼굴이 굳어 든 이학의 추측을 증명하듯, 노백이 다시금 전음을 전했다.
“사신(死神)의 후예가 주군을 찾아왔습니다.”
“……!”
순간, 충격을 받았음인가, 이학의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불끈 쥐어지며 침중하게 안색이 굳어 들었다.
‘사신의 후예라니? 설마 백아홉 번째 마귀가 실제로 존재했었단 말인가?’
드러난 백팔마귀와는 달리 숨겨진 마지막 마귀(魔鬼).
천마궁의 역사서에 기록된 사신에 관한 부분을 떠올린 이학은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아직 연공 중인 이랑을 방해치 않게 소리 없이 몸을 돌린 이학은 천천히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한 사내가 사라진 자리.
그 사내가 서 있던 자리는 공허함에 물들어 연공실을 떠도니, 미묘한 변화를 맞은 연공실 안의 분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듯 이랑이 감은 눈을 떠 보였다.
“…….”
암흑보다 더 짙은, 검게 물든 빛이 이랑의 두 눈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다시 본연의 공허한 눈빛을 되찾은 이랑은 말없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통경.
그는 아비 이학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기의 일고 짐이 자유로운 통경에 든 것이다. 이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단전의 기운은 그의 손에 머물 것이며, 원기가 모인 그의 손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위력을 발휘하리라.
또한 그 위력은 그가 외경에 듦으로 해서 배가 될 것이다.
육신이 아닌 외부로 기운을 표출하는 경지.
이랑이 통경의 다음 단계인 외경에 든다면, 그는 자신의 손 안으로 기운을 모아 거리가 떨어진 상대를 향해 장력을 떨칠 수도, 몸이 아닌 검신에 기운을 담아 천마검식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그 경지는 내기의 양과는 상관없는 깨달음의 경지이니 이랑은 지금의 상태에 잠시 머무른 채, 아비 이학을 따라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

오후의 태양은 아직 그 열기를 잃지 않은 채 세상을 밝혔다.
어둠을 지나 환한 빛이 감도는 세상 속으로 발을 디딘 이학은 천마각 주변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순간.
“신, 백팔마귀의 후손들이 천마를 뵈옵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외적이 나타난 지금 천마의 권위를 더욱더 빛내기 위한 그들의 행동에 오직 한 사내만이 당당히 선 채 비웃음을 흘렸다.
야월.
전신을 칙칙한 흑포로 감싼 채, 검은 두건 사이로 빛나는 자청색의 두 눈을 들어 이학을 바라본 야월은 기괴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흐흐흐흐, 보기보단 개들을 잘 길들여 놨군.”
“…….”
이학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꿇은 천마대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수치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런 그들을 대표하듯 이학과 함께 천마각 밖으로 나온 노백이 야월을 꾸짖었다.
“네 이놈! 네놈 또한 백팔마귀의 후손이라면, 응당 당대 천마이신 주군을 향해 그 예를 다해야 할 터.”
“미안하군, 늙은이. 난 백팔마귀에서도 제외된 사신의 후예라서 말이지, 저자에게 무릎 꿇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네, 끄끄끄끄!”
괴소를 흘려 냈다.
소름 끼치는 그의 괴소에 노백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갈 듯하자, 이학이 그를 한 손으로 막으며 대신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일순 장내론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릎 꿇은 백팔마귀의 후손도, 이학의 뒤로 선 노백도, 심지어는 야월조차 말을 잊은 채 이학만을 바라보았다.
“…….”
“…….”
고요한 정적 속에 드러난 그들의 시선.
그 시선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고 있었다.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은 이학의 힘.
그 힘을 다시 보고픈 모두의 시선을 외면하듯 이학이 두 눈을 감았다.
저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채워 주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도 알고 있었다.
천 년이란 세월 동안 천마란 이름에 봉인된 백팔마귀의 힘.
그 힘은 세상 밖으로 풀려나고, 중원무림엔 다시 암흑시대가 도래하리라.
그것을 알기에 언제나 천마란 존재는 강함이란 단어와 함께했다.
그것은 현재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은 이학 역시 마찬가지였다.
“…….”
스윽 눈을 떴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이학이 여전히 비웃음을 날리는 야월을 바라보며 말한다.
“힘을 원한다면 보여 주겠다.”


第四章 빙혼(氷魂)(1)


아무것도 없는 백지(白紙).
그 위로 한 소년이 먹이 듬뿍 밴 붓을 가져간다.

자신은 무엇을 바라는가?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소년이 바라는 것은 강함이다.
소년이 살아가는 것은 강함을 얻기 위함이다.
소년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구한 후 백지 위에 점을 찍었다.
점은 곧 힘 있게 내리그어지며 무(武) 자를 백지 위에 그리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바라고, 그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길.
그 모든 것이 소년이 써 내려가는 단 한 글자, 무(武)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