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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0화)
第四章 빙혼(氷魂)(2)
“신 노백, 주군께 아뢰옵니다. 지금 도련님께서 빙혼이 숨겨진 설백산(雪白山)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
한기만이 가득 찬 동굴 안을 울리는 적발 노인의 말에 등을 돌린 채 선 중년 사내는 한 줄기 이채를 번득였다. 그러나 그뿐, 수려한 외모의 중년 사내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한 곳만을 응시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런 사내의 무반응에 보고를 하러 왔던 노인의 입에선 다시 한 번 말이 나옴 직하건만, 노인은 단지 조용히 몸을 돌릴 뿐이었다.
이내 자신의 일을 끝마친 노인이 동굴 밖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중년 사내는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보였다.
“부인, 내가 너무 서두른다 생각하시오?”
답이 없었다.
아니, 답을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사내 이학이 바라보는 곳. 그곳엔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자소청이 입가엔 미소를 띤 채 이학을 마주할 뿐이다. 이미 죽어 답을 할 수 없는 여인의 침묵에 사내 이학은 다시금 입을 열어 그녀와 대화하듯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나이 올해 열둘. 통경에 든 지 불과 이 년이 흘렀건만, 그 아이는 내 예상을 뛰어넘고 올해 외경에 들었다오. 그뿐만 아니라 천마검식은 이미 오식까지 익혔으며, 석 달 전부턴 잡법을 배우기 시작했소.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아이는 충분히 강해졌다 생각하오. 빙혼의 주인이 되기엔 말이오. 그대도 그리 생각지 않소?”
그저 미소만 그리고 있었다.
이학이 하는 일은 뭐든지 믿고 있다는 듯, 포근한 미소로써 그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그 미소에 이학 역시 한 줄기 미소를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말이오, 내 스스로 그 아이를 인정했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지금의 선택이 잘한 건지 의문이 든다오. 부인의 선조를 대신해 관리하던 빙혼은 스스로 주인을 택한다 들었소. 그 말대로 빙혼은 오랜 세월 동안 어느 누구도 주인으로 인정치 않은 채 본궁과 이웃한 설백산에 잠들어 있었다오. 그것은 후손 중 누군가가 무모하게 빙혼을 얻으려다 오히려 빙혼이 내린 시험을 이기지 못한 채 마음이 무너질 것을 염려한 초대 천마의 뜻이었소. 그만큼 빙혼의 시험은 가혹한 것이오. 비록 그대가 그 시험을 통과키 위해 필요한 설혼심결의 기운을 그 아이에게 넘겼다지만, 난…….”
차마 두렵단 단어를 꺼내진 못했다.
혹시라도 이랑이 잘못될까 두려운 자신의 마음을 표현치 못한 채 이학은 고개를 숙였다.
“후훗, 하긴 이제 와 이런 걱정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이미 그 아이는 내 말을 전해 듣고 빙혼을 얻기 위해 떠났건만……. 만약 그 아이가 잘못된다면 그것도 다 내 어리석은 판단이 낳은 결과. 그때는 나 역시 내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오.”
자조 어린 웃음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굳게 다문 입매가 지금 그의 마음속에 깃든 각오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런 사내를 얼음 속에 갇힌 여인은 불쌍한 듯 바라보았다.
사내 이학, 그가 걸어온 인생길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식인 이랑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이미 수십 년 전에 걸었으며, 그동안 이학은 본모습을 감춘 채 모순 속에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나고 자란 곳의 법칙이며, 그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이학은 더욱더 강함이란 단어를 종용받은 것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눈앞의 여인 자소청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죽었을 때, 이학은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무너지는 마음을 잡아 준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이랑이란 존재였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자소청의 피를 이은 아이.
이랑이란 존재가 있었기에 이학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본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만큼 큰 존재였던 이랑이 처음으로 그의 곁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것도 생사를 알 수 없는 위험한 길을.
그 길을 직접 나아가라 지시했던 이학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자소청을 향해 조금이라도 더, 지금의 불안감을 자소청의 도움으로 해소하고자.
***
짙은 어둠이 사내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 어둠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이내 덮쳐드는 어둠을 떨치려는 듯 흑포 속에서 검게 물든 양손을 꺼내 들었다.
파바밧!
허공을 울리는 기성과 더불어 사내의 양손을 검게 물들이고 있던 정체인 검은 장갑에서 일곱 줄기의 자청색 빛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 끝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은사를 통해 강(|)의 기운을 응용한 사내의 공격은 다가오는 어둠을 사방에서 감싸며 금방이라도 조각낼 듯했다.
그러나…….
화아아악!
어둠이 사내의 눈앞에서 요동치며 일순 한 마리 흑룡(黑龍)으로 화해 일곱 가닥 빛줄기를 집어삼켰다. 쩍 벌어진 입을 이용해 순식간에 빛을 집어삼킨 흑룡은 그것만으론 부족한 듯 사내의 육신마저 먹어 치웠다.
“아아악!”
긴 비명 소리와 동시에 악몽(惡夢)에서 깨어났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를 가진 중년 사내는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 거친 숨결을 토해 냈다. 그 숨결은 이내 격한 기침이 되어 피를 토하게 만드니, 사내는 이 년 동안 기거하던 동벽을 붙잡은 채 검붉은 피를 딱딱한 바닥 위로 흩뿌린다.
그렇게 피를 토하기 몇 번.
각혈이 멈춘 사내는 힘없이 동굴 바닥에 드러누워 허무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크크크, 크크크크……. 처음부터 무리였다,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년 전 천마란 이름에 도전한 것은 단순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점차 심해져 오는 병세가 사 년 전 산왕채를 떠난 후에도 무공에 진척이 없던 그를 천마궁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이미 예상했던 대로 그의 패배였다.
그것도 단 일 합.
천마란 명호를 물려받은 사내는 힘의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 주려는 듯, 그를 단 일 합만으로 무릎 꿇린 것이다. 이미 예정되었던 수순에 죽음을 각오한 사내였으나 당대의 천마는 마치 너그러움을 보여 주듯 그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자유로이 풀어 줘,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해 준 것이다.
하나 그것이 자비가 아님을 사내는 안다.
불치병에 걸린 자신.
이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병세를 알아본 천마란 자는 잔인하게도 일부러 목숨을 끊지 않아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 준 것이다.
치욕이란 이름의 고통을.
아마 그것은 천마에게 도전한 상대를 철저히 짓밟기 위해 내린 형벌이리라.
그 잔혹한 형벌이 안겨 준 치욕을 마음에 담은 채 천마궁을 떠난 사내는 천마궁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이웃한 설백산에 자신의 터전을 잡았다. 그것은 치욕을 갚아 주기 위한 복수심이 낳은 선택이었으나 그 복수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이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절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또한 그 깨달음은 이미 천마란 자가 자신에겐 복수를 할 시간이 없음을 예측하고 내어 준 고통의 시간임을 알게 해 줬다.
악몽.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날의 악몽.
그 악몽과 더불어 점점 심해져 오는 병세.
죽음을 향해 치닫는 병세와 악몽은 지난 이 년간 사내가 가진 복수심을 나약하게 만들며 그를 절망이란 늪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제는 단지 복수란 명목을 유지시키기 위한 쓸데없는 오기만이 남은 사내였다. 그 오기 하나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견뎌 내고 있던 사내가 문득 동굴 안으로 흘러 퍼지던 웃음을 그쳤다.
어둠 속을 울리던 웃음을 대신해 몸을 일으켜 세운 사내는 이내 낡은 두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후 천천히 동굴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 그날의 치욕을 갚아야 한다.”
야월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
그는 주린 배를 채워 줄 먹이를 찾아 동굴 밖으로 나섰다. 살아남아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먹이를 찾아 나선 사내 야월은 흰 눈이 쌓인 산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이미 이학의 뇌리에선 자신이란 존재가 잊혔음을 알지 못한 채.
***
온통 하얗다.
세상천지가 순백의 화폭(畵幅)에 담긴 듯 모든 것이 하얗다.
그 하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흑의를 걸친 한 소년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밭 위로 신형을 우뚝 세우고 있다. 이웃 조선과 인접한 북쪽의 장백산맥(長白山脈) 중 하나인 설백산(雪白山) 기슭에 자리한 소년의 신형은 북풍한설의 매서운 바람 앞에 금방이라도 휩쓸려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차가운 바람을 맞는 소년의 두 눈빛은 고요함을 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한기를 머금게 할 정도였다.
“…….”
깊게 침묵한 소년의 눈은 무심했다.
뼈마저 에는 삭풍 따윈 애당초 관심이 없다는 듯, 소년은 검은 호수와도 같이 깊게 잠겨 든 눈으로 정면만을 주시한 채 정적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정적 속에서 소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라앉은 두 눈 깊은 곳에 깃든 한 줄기 빛이 그가 자신의 눈앞으로 펼쳐진 거대한 설산(雪山)에서 무언가를 얻고자 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로지 소년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얼음 속에 갇힌 한 여인을 떠올렸다.
말없이 언제나 자신을 지켜봐 주는 여인을 떠올리며 소년은 무심한 말로써 각오를 다졌다. 도저히 열두 살 아이의 음성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무뚝뚝한 말투로 각오를 다진 소년은 눈앞의 설산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내딛는다는 표현일 뿐, 소년의 몸은 폭설이 내린 눈밭을 헤엄치듯 천천히 나아갔다.
뿌드득, 뿌드드득…….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나뭇잎이 사라진 메마른 나무 사이를 헤치며 미끄러운 산길을 오른 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느낄 뿐이었다. 눈에 덮인 산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와 같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미로 속으로 더욱더 깊게 파고든 소년 이랑은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면밀히 살피며 조심스레 산을 올랐다.
그러기를 얼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서서히 서산(西山)으로 저무는 가운데 이랑은 자신의 작은 발을 멈추었다.
살기(殺氣).
빼곡히 들어찬 나무 틈 사이로 진한 살기가 흐른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낀 이랑이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깊게 가라앉은 눈을 들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엔 설백산으로 떠나기 전 노백이 전해 준 당부의 말이 떠올랐다.
‘장백산과 인접한 설백산은 그 산세가 험난하며, 또한 인육을 즐기는 백호(白虎)가 서식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도련님께선 부디 그놈을 조심하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보살피던 노백의 당부.
차가운 아버지를 대신해 온정으로 대해 주던 노백의 걱정 어린 말을 떠올린 이랑은 숨을 죽인 채 우선 살기가 퍼져 나오는 위치를 파악하고자 했다. 상대가 만약 이랑이 생각한 대로 사람을 잡아먹는 백호라면, 자신 같은 연한 살결의 아이는 최상의 먹잇감일 것이다. 또한 먹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때인 만큼 제 발로 찾아온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백호는 그 몸을 눈 속에 숨긴 채 기다리고 있으리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신이 다가오기를…….
‘죽여라. 상대가 너를 죽이고자 한다면, 넌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죽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너를 보살피는 노백이라 할지라도 넌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나약함으로 내비치니, 그런 나약한 너에게 복종을 맹세할 사람은 이곳에 단 하나도 없다. 네가 내 뒤를 잇기 위해서라면 이 아비마저 죽일 수 있는 결단과 냉혹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죽여야 한다.’
한 가지 결심이 어렸다.
살기 위해서가 아닌 그 언젠가 이학이 전했던 당부처럼 강한 자신으로 남기 위해 죽여야만 한다. 결심을 굳힌 이랑은 난생처음으로 살기를 머금은 채, 복잡하게 얽힌 나무 틈 사이의 한 곳을 바라보았다.
순간.
크어어어엉!
왕 중의 왕.
백호의 기다란 포효에 나뭇가지 위로 걸려 있던 눈꽃은 휘날리고, 놀란 산새들은 일제히 날개를 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적의(敵意).
이미 이랑의 시선과 그 눈 속에 담긴 살기에서 자신의 정체가 발각됐음을 안 백호는 명백한 적의를 드러낸 채 숨어 있던 눈 속에서 거대한 몸체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일어났다 싶은 순간 백호는 거칠게 이랑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그 속도는 결코 인간이 흉내 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섬전(閃電).
오랜 사냥의 경험으로 이랑과도 같은 눈빛의 소유자는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백호였다. 그렇기에 백호는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사냥을 끝내기 위해 섬전처럼 달려든 것이다. 그런 백호의 커다란 입은 쩍 벌어진 채 그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옷깃 위로 드러난 가녀린 목.
그 목을 머리통째로 덥석 물어 단숨에 숨통을 끊기 위해…….
“…….”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도저히 열두 살 어린 소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육신과 마음을 조절한 이랑이 우수를 들어 그 손바닥 위로 검은 기운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암흑(暗黑).
거대한 공포를 간직한 암흑은 소년의 작은 손 위로 끝없이 피어올라 하나의 구체를 형성화했다.
불과 촌각.
백호가 덮쳐듦과 동시에 이랑의 작은 손바닥 위로 검은 구체가 형성된 것은 촌각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단전의 내기를 밖으로 이끌어 형성화시킨 이랑의 입에선 곧 힘찬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타핫!”
파앗!
내력이 깃든 소년의 함성은 덮쳐들던 백호의 움직임마저 멈추게 하니,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내쏘아진 검은 구체가 한 줄기 빛이 되어 벌어진 백호의 입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다 싶은 순간 검은 구체는 이내 단단한 백호의 뼈를 으깨며 그대로 머릿속에 박힌 후, 마치 불꽃이 터지듯 폭발하며 백호의 머리통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순간, 펑 소리와 더불어 폭죽처럼 터져 나가는 백호의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하얀 대지 위로 붉은 선혈을 흩뿌렸다.
사람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고 갔던 백호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허망했다.
그 자신조차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통이 사라진 육신은 아직 대지 위에 선 채 가는 떨림을 갖고 있었다. 억울한 듯, 편히 눕지 못하는 백호의 육신을 잠시 바라보던 이랑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산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빙혼을 찾기 위해…….
‘천마신공! 분명 천마신공상의 비천환(飛天煥)이다! 말도 안 되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허허, 허허허허! 그랬던가. 그래서 내가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건가?! 크크, 천마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어린 아들조차 이리 강할진대 내 어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경악(驚愕).
놀람과 두려움이 배어 든 사내의 두 눈은 자신을 지켜보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산 위를 오르는 이랑의 작은 체구를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러기를 얼마, 이내 이랑의 체구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사내는 지금까지 펼쳤던 귀영번신(鬼影륙身)을 풀었다.
스스스스…….
귀기로운 소음과 동시에 담갈색 고목나무 속에서 귀신과도 같은 형상으로 사내의 육신이 드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흑색 일색인 야월은 검은 두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으로 이랑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고민 어린 눈빛을 띠었다.
‘죽일 수 없다. 난 그를 죽일 수 없다. 크크,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이 년 전 그에게 패했을 때부터 난 그를 영원히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제 와 그의 아들을 보고 새삼 깨닫다니…….’
마지막 오기마저 사라졌다.
야월을 이 년 동안 살게 해 줬던 오기가 이랑에 의해 사라지니, 그는 허탈한 눈빛이 되어 서서히 저녁 해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핏빛.
살수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길을 보여 주듯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타인의 피와 함께한 그의 인생이었기에 더욱더 천마란 이름을 가진 사내를 순수한 무인으로서 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만큼은.
‘그래, 마지막만큼은 살수란 가면을 뒤집어쓴 살인자가 아닌 한 사람의 무사로서 남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바람을 이학은 짓밟았다.
패한 자신을 살려 둠으로써 치욕을 안겨 주고, 무인으로서의 긍지조차 짓밟은 것이다. 그 잃어버린 긍지를 찾고자 지난 이 년간 치욕을 견디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부질없는 오기였음을 깨달은 야월은 허탈한 심정이 되어 무너지는 자신을 느껴야만 했다.
“후훗,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하긴 처음부터 무리였으니 당연한 걸지도. 최소한 시간이 조금만 있었더라도, 비은사를 완벽히 조종할 수 있는 시간만 있었더라도 그날의 치욕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업보(業報)이리라.
사람을 죽이고, 그 대가로 살아온 자신의 업이 되돌아온 것이리라.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죽어 주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최소한, 최소한 잃어버린 긍지만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
문득 마음과 함께 죽어 가던 야월의 눈에 한 가닥 생기가 감돌았다.
방법을 떠올렸기에.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야월은 섬뜩한 한광을 발하는 눈으로 이랑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눈 위로 선명하게 찍힌 소년의 발자국이 향한 어둠 속을 잠시 바라보던 야월은 이내 흐릿한 미소와 더불어 장내에서 모습을 감췄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이랑의 뒤를 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