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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1화)
第四章 빙혼(氷魂)(3)


“……!”
또다시 나아가던 걸음이 멈췄다.
그것은 결코 밤이 깊어 쉬기 위함이 아닌 허깨비와도 같이 눈앞에 나타난 한 괴인 때문이었다.
야월.
흑포로 전신을 감싼 야월은 자신을 바라보며 경계심을 피워 올리는 이랑을 무시한 채 밤하늘 위로 떠오른 한 조각 달을 바라보았다.
“…….”
검게 물든 하늘 위로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달은 은은한 빛을 뿌려 사내 야월의 시선에 화답했다. 그 빛을 받고 선 야월의 두 눈은 묘한 감상에 젖어, 닫혀 있던 그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오래전 한 사내가 중원에 나타났다. 칠백 년간 강호란 거대한 흐름에 족쇄를 채운 사내, 마제란 이름을 물려받은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전설. 죽지 않는,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전설을 이어받은 사내의 등장에 강호는 요동쳐야만 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마제란 전설을 꺾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자들 중에는 당시 살수지왕(殺手之王)이라 칭해지던 나 야월 역시 함께했다. 그것은 전설이 되기 위함이었다. 살수로서 마제를 죽여 내 자신이 중원의 전설이 되고자 함이었다. 허나 그자의 뒤를 먼발치에서 쫓으며 그자가 행하는 비무행을 보고 난 내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던가를 깨달아야만 했다.”
“…….”
잠시 말을 끊었다.
이랑이란 존재를 무시한 채 혼잣말을 이어 나가던 야월은 침묵하며 두 눈을 감았다.
마치 그날의 충격을 회상하듯…….
그러기를 얼마, 다시 감은 눈을 뜬 야월이 달이 아닌 이랑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소년 이랑을 주시하며 야월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천마. 설마 마제의 근본이 천마일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말이다. 끄끄, 그가 쓰는 무공을 보고서야 겨우 알 수 있었지. 그리고 그것은 곧 내게 오래전 천마란 이름 앞에 패하고 어둠 속으로 숨어든 사신의 후예란 자각을 안겨 주었다. 또한 그 자각은 내게 살수로서가 아닌 사신의 후예로서 그놈과 승부하라 부추겼지. 흐흐, 그 승부를 하기 위해 난 긴 시간을 투자했다. 그놈의 뒤를 미행해 천마궁이 있는 장소를 알아내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놈이 가진 그 끝을 알 수 없는 힘의 한계를 알아내는 게 더욱더 큰 문제였지. 그리고 우습게도 그 문제는 그놈이 빙궁의 계집과 벌인 대결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힘을 확인한 그날 이후, 난 그 힘에 맞춰 오랜 시간 힘을 길렀다. 그를 내 발밑에 무릎 꿇리기 위해.”
“그리고 당신은 패했다.”
“……!”
꿈틀댔다.
처음으로 입이 열리며 흘러나온 이랑의 한마디에 야월의 눈썹이 꿈틀대며 그 자신도 모르게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살기.
이 년 전 이학과의 승부를 떠올린 야월의 전신에선 맹렬한 증오심에 의한 거대한 살기가 피어올라 이랑의 육신을 옥죄어 왔다. 그러나 정작 이랑은 그 살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 흔들림 없는 눈으로 야월을 마주했으며,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의 공허한 시선에 오히려 야월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을 떨어 보였다.
“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대단해, 대단해! 과연, 과연 그의 아들이로다! 나 야월을 마주함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다니, 점점 더 네놈이 마음에 드는구나!”
“…….”
한 차례 앙천대소를 허공 위로 피워 올렸다.
밤하늘 위로 떨쳐 울리는 그의 대소엔 내력이 깃들어 이랑을 괴롭게 하니, 일순 이랑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파앗!
짧은 틈조차 놓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야월의 양손이 활짝 펼쳐지며, 한순간 틈을 내보인 이랑의 육신을 구속했다.
“……?!”
움직일 수 없었다.
전신이 보이지 않는 기운에 포박된 듯, 이랑은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올가미와도 같은 기운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
그 생각을 대변하듯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우측 팔로 가는 사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그의 팔을 가린 흑의가 날카로운 검에 베이기라도 한 듯 힘없이 베어져 나갔으며, 그 속에서 드러난 하얀 살결 위론 붉은 혈선이 그려졌다. 또한 그 혈선에서 흘러나온 피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길이라도 놓인 듯 빙그르르 떠돌더니 이내 점점이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랑은 자신의 혈선이 허공 위로 그려 놓은 길을 보고는 곧 전신을 억압한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실?’
내력을 돋운 눈으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가는 은선은 목부터 시작해 양팔과 양다리는 물론이요, 그의 허리와 가슴마저 속박하고 있었다. 또한 이랑의 전신을 꽁꽁 묶어 놓은 일곱 줄기의 은선은 그 시작이 야월의 양손과 합쳐져 이랑에게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버님께 패한 당신이 그 복수로 날 죽이려 하는가?”
“…….”
이 년 전, 이랑 역시 보았다.
아비 이학의 발밑에 무릎 꿇은 야월의 모습을.
후에 사신의 후예라는 야월의 이야기를 노백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이랑은 지금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이랑의 생각을 야월은 비웃었다.
“복수? 크크, 이건 하찮은 복수 따위가 아니다! 지금 내가 너에게 하려는 것은 널 죽이기 위함이 아닌 네 몸속에서 내가 살기 위함이다!”
“……?!”
뜻 모를 말과 함께 거대한 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육신을 구속한 일곱 줄기의 은사를 통해 이랑의 내부로 야월의 내기가 주입된 것이다. 그 뜻밖의 사태에 이랑은 천마심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대항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또다시 비웃듯 각각 다른 곳에서 흘러든 야월의 내기는 이랑의 단전이 아닌 그의 막힌 혈을 뚫으며 육신 안에서 맹렬히 돌기 시작했다.
비록 이랑이 혈을 뚫어 내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통경을 지났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마심공이 정해 놓은 혈로상의 혈도뿐이었다. 지금 그의 내부에 깃든 야월의 내기는 천마심공이 정해 놓은 혈도가 아닌 각기 다른 곳에서 흘러든 일곱 가닥의 내기가 그의 전신혈도를 뚫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이랑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연이었다.
전신 혈도가 타동된다는 것, 그것은 오직 천마심공의 최후 단계인 환경에 이른 자만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단전에 쌓인 내기의 양에 부족함이 없으며 진경을 넘어선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육신은 껍질을 벗고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거치게 되는데, 이를 환경에 들었다 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혈도가 타동되어 무공을 익히고 펼치기에 최상의 상태가 됨을 뜻하는 말이다.
이랑은 그 최후 단계를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에 의해 이룩하니, 결국 그것은 그의 육신만이 환경에 들게 된다는 뜻이 되며, 환경이 논하는 진정한 경지인 육신과 마음이 기와 하나 됨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 비록 육신만이라 해도 앞으로 이랑이 무공을 익힘에 있어 지금의 기연이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 도움을 안겨 주고 있는 야월이 문득 소리쳐 물었다.
“무인(武人)에게 있어 무공(武功)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
답이 없었다. 아니, 답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이랑의 내부를 제멋대로 휘저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한 야월의 내기에 의해 이랑은 입조차 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저 듣고 보는 것만이 전부인 이랑의 육신을 야월은 자신의 코앞으로 끌어당기며 계속해 외쳐 댔다.
“무인에게 있어 무공이란 전부이며, 곧 또 하나의 자신! 지금부터 난 네게 내가 그동안 익히고 깨달은 모든 것을 전할 것이다! 그것은 너를 통해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함! 또 하나의 자신인 내 무공이 너의 내부에서 살아 숨 쉬며 언젠가 너를 통해 내가 잃어버린 긍지를 되찾을 것이다! 이 년 전, 네 아비한테 빼앗겼던 무인으로서의 긍지를!”
“…….”
자청색의 빛이 타오르듯 야월의 두 눈에서 피어올랐다.
그 빛은 이내 코앞으로 다가온 이랑의 두 눈을 잠식해 들어가 결국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사고마저 앗아 가며 이랑의 두 눈을 흐릿한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사륜혼백공(邪淪魂魄功).
영혼마저 잠식해 들어간 사륜혼백공에 의해 이랑의 이지가 완전히 소멸되자, 야월은 흐릿한 미소를 그리며 자신의 모든 걸 입 밖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그동안 익힌 무공과 깨달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와 이랑의 귀로 스며들며, 이제 그것은 이랑의 뇌리에 각인되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은사를 통해 그의 내부로 주입된 자신의 내기와 마찬가지로…….

***

‘훗날 천마대전(天魔大戰)을 통해 네 아비와 네가 싸우게 되는 날. 그날이 바로 네 몸속에서 살게 될 또 하나의 내가 이미 죽어 있을 나를 대신해 잃어버린 긍지를 찾는 날이 될 것이다.’

“…….”
눈을 떴다.
머릿속에 남은 야월의 마지막 말과 함께 이랑은 감은 눈을 떠 봤다.
빛.
두 눈을 뜬 그에게 제일 먼저 찾아든 것은 어둠이 아닌 빛이었다. 이미 세상은 밤을 지나 빛이 충만한 오전이 되었으며, 그 빛 속에서 이랑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봤다.
흑수(黑手).
팔목까지 감싼 비은사라 불리는 검은 장갑이 이랑의 작은 손에 끼워져 은은한 빛을 뿌렸다. 헐렁하지도, 그렇다고 조이지도 않는, 마치 처음부터 이랑의 것인 양 그의 작은 손에 맞춰진 비은사의 모습에 이랑은 다시금 야월의 말을 떠올렸다.

‘비은사란 곧 내가 낀 장갑을 일컬음이다. 가죽과는 달리 독각괴망(獨角怪罔)의 실로 만들어진 열 가닥 은사는 유류마공(柔流魔功)에 의해 주인 된 자의 손에 맞춰 장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또한 그 열 가닥 은사를 완벽히 조종하기 위해선 분심공(分心功)을 대성해야만 가능하다. 각기 따로 움직이는 열 가닥의 은사는 곧 마음이 열로 나뉜 것과 같아 나조차도 일곱 개를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허나 너라면 가능하리라. 처음 한 개가 아닌, 내 깨달음을 얻어 일곱 개의 은사부터 시작하는 너라면 열 개 모두를 조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 열 개의 은사를 모두 조종할 수 있다면 적의 수가 십이든 천이든 상관없이 사신무(死神舞)의 범위 안에 든 자 모두를 갈가리 베어 죽일 수 있다. 그것이 설사 네 아비인 천마라 할지라도!’

자신감에 찬 야월의 말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소.”
정면으로 야월의 자신감을 부정하며 이랑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벌거벗은 몸.
의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눈보다 하얀 피부를 드러낸 이랑은 공허한 눈길로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흑포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주저앉은 야월은 말이 없었다.
그저 정좌한 자세로 두 눈을 들어 가만히 이랑을 바라볼 뿐. 생기는 사라진 채 회색빛으로 물든 그의 눈을 마주하며 이랑은 가만히 양손을 움켜쥐어 봤다.
생각보다 강한 힘.
유류마공의 부드러운 성질이 모든 걸 포함하는 천마심공과 합일돼 그의 양손으로 강한 힘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이랑이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강한 힘이었으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비록 그 힘이 자신을 환골탈태시켜 육신을 변화시키고, 또한 그 최상의 육신과 강한 힘을 바탕으로 한 사신무가 상승의 무공이라 하나 그뿐. 결코 천마란 이름을 가진 사내의 무공을 이기기엔 부족한 것이다.
천마란 이름을 꺾을 수 있는 자, 오직 같은 힘을 익힌 자뿐.
그것을 알기에 이랑은 모든 걸 잃음과 동시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야월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들리지 않는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 주려는 듯…….
“훗날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기 위해 천마대전이 펼쳐지는 날, 난 그날 그대가 전해 준 무공이 아닌 아버님께 배운 천마신공을 사용할 것이오. 허나 그 무공 속엔 그대가 전해 준 내력 역시 함께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생각은 없소.”
무슨 뜻일까.
이미 천마심공의 기운과 하나 된 야월의 내공을 이랑은 결코 부정치 않는다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였다.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말로써 야월이란 사내를 위로해 준 이랑이 차갑게 몸을 돌렸다. 이미 추위 따윈 느끼지 않기에 벌거벗은 몸으로 산을 오르는 이랑을 야월은 회색빛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언젠가 지금 산을 오르는 소년의 몸과 같이 살아갈 또 하나의 자신이 잃어버린 긍지를 찾는 날을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지켜보겠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