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마도행 1권(12화)
第四章 빙혼(氷魂)(4)


장관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나무도 풀도, 위에서 떨어져 내리던 폭포수조차 얼어붙은 세상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마치 누군가가 얼음으로 조각을 해 놓은 듯, 빙목(氷木)과 빙초(氷草)가 가득한 별천지(別天地) 안으로 문득 한 소년이 발을 디뎠다.
길게 기른 흑발을 바람에 휘날리며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계곡 안으로 발을 디딘 소년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폭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앞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얼어붙은 대지는 비명을 지르고, 계곡 안을 맴돌던 바람은 낯선 이방인의 침입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소년의 몸을 공격했다.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은 매섭기 짝이 없어 벌거벗은 소년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을 자아낼 법하건만, 소년은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목적하던 곳인 얼어붙은 폭포수 앞에 도착한 소년 이랑이 그동안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보였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장소는 분명 이곳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겹겹이 둘러쳐진 얼음은 내력을 돋운 이랑의 시선마저 무시한 채 그 내부를 비밀 속에 감추었다. 결국 얼음 안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확인코자 이랑은 자신의 손을 빙벽에 가져갔으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계곡 안으론 한 줄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쿠쿠쿠쿠쿠!
“……?!”
무엇을 보았음인가.
문득 이랑의 눈으로 이채가 떠오르며, 그의 몸이 순간 뒤로 훌쩍 날아 빙벽과 거리를 둔 채 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요동치는 빙벽에 가 못이 박혔으며, 빙벽은 마치 그의 시선에 화답하듯 이내 거대한 몸체를 계곡 밖으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빙룡(氷龍).
마치 땅 위로 솟아나듯 얼어 있던 폭포수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한 마리 빙룡은 천천히 이랑을 향해 다가들며 한 줄기 괴성을 토했다. 계곡 안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괴성에 하늘도 놀란 듯 숨을 멈췄으나, 오직 이랑만은 처음과 같은 눈빛으로 다가드는 빙룡을 바라보았다.
아니, 빙룡의 이마 위로 꽂힌 한 자루 검을 본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은은한 빛을 뿌리는 검(劍).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한 한 마리 백룡이 마치 똬리를 틀듯 검신 전체에 새겨지고 백색 검병의 끝에서 용머리를 한 검은 신비로운 청색 빛을 지상 위로 흩뿌렸다. 검병에 장식된 용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은 너무도 맑고 순수해 보는 이랑의 시선마저 빨아들였으며, 이랑은 홀린 듯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보였다.
“저것이 빙혼?”


第五章 인연(因緣)(1)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몸에선 짙은 피 냄새가 흘러 퍼졌다.
설백산과 인접한 묘곡령(妙曲嶺)을 터로, 조선과 명을 오가는 상인들을 상대하며 금품을 갈취하던 묘령채(猫怜寨)의 산적들은 방금 고개를 지나던 마차를 털어 예상외로 큰 금품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모두가 기뻐 떠들었으나 한 사내만은 그들의 발밑에 있는 시신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차의 주인인 듯 보이는 중년 부부를 비롯해 수명의 사람이 죽어 있었다.
또한 그들의 육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붉게 물들이며 비릿한 혈향을 안겨 주니, 검은빛의 사내는 눈살을 찌푸린 채 채주인 오삼을 찾아가 물었다.
“큰형님, 꼭 이렇게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요?”
“응? 이놈아, 네가 우리 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이번이 첫 산행이라 모르나 본데, 저놈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다간 관아에 고발해 우리가 죽게 된단 말이다. 다 이것이 먹고살자 산적질하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한 방법이니, 너도 이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익숙해지도록 해라.”
“…….”
가족(家族).
가족이다.
묘령채의 모두는 한 가족이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그들의 울타리 속에 섞이고 싶어 사내는 자청해 묘령채에 들었다. 그것이 불과 보름 전이며,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세상을 떠돌던 자신을 묘령채 채주 오삼은 흔쾌히 맞아 준 것이다.
그 가족을 위해서 타인의 죽음은 당연하단 오삼의 말에 사내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사내의 얼굴을 오삼은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으나 결코 불만을 표하진 않았다.
‘쯧, 저놈의 힘 하나만은 쓸 만하단 말이야.’
쓸 만한 정도가 아니다.
무명(無名), 본 이름이 없기에 스스로 무명이란 이름을 지은 사내는 신력(神力)을 타고난 장사 중의 장사였다. 비록 그의 몸은 이미 어른의 형태를 취했으나 짧은 머리칼 아래의 동안은 그가 아직 어린 소년임을 말해 주었다. 실제로 무명은 올해 열네 살이 되었으며, 나이에 맞지 않는 큰 체구에서 오는 힘은 묘령채의 그 누구도 이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 오삼은 그 힘만을 보고 그를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식구가 아닌 부하겠지. 그것도 아주 쓸 만한, 크크.’
짧게 무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부하들을 바라보니, 한 사내가 마차 속에 숨어 있던 어린 소녀를 잡아 오삼에게 데려왔다. 이제 겨우 열셋에서 열넷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사내의 손에 끌려오며 부모의 시신을 보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를 데려오던 사내는 숲을 울리는 소녀의 비명성에 짜증이 난 듯 번쩍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대로 목을 내려쳐 소녀를 기절시키려는 사내의 우악스런 행동에 문득 무명이 다가가 만류하며 히죽 웃어 보였다.
“헤헤, 장 형님, 설마 요 어린 것을 그 주먹으로 때릴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런 식으로 일일이 여자를 다루다간 남아날 여자가 없을 겁니다. 자, 여기 이렇게 제가 입을 틀어막으면 비명은 안 들릴 테니 제게 맡겨 주시죠.”
“음…….”
어느새 자신의 손에서 소녀를 낚아챈 무명의 말에 장평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쩍 오삼의 눈치를 봤다. 무명이 완전히 묘령채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그의 신경을 건들지 말라는 오삼의 명을 떠올린 것이다. 장평의 시선을 받은 오삼은 무명이 아닌 소녀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제법 반반한 게 크면 미인 소리 좀 듣겠군. 흐흐, 게다가 아직 어리니 분명…….’
마음에 들었다.
뭐든지 어린 게 좋다 생각하는 오삼으로선 지금 무명의 품에서 버둥대는 소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이 있어 대놓고 음심을 드러낼 수도 없었던 오삼은 곧 답을 기다리는 장평과 무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어 보였다.
“무명아, 그 계집은 네가 책임지고 타일러서 밥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 둬라. 이제부턴 우리의 식구가 될 테니.”
“……!”
죽이지 않았다.
죽일 줄 알았으나 죽이지 않고 살려 줌은 물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오삼의 결정에 무명은 진심으로 기뻐 소리쳤다.
“네, 형님!”

털썩!
산채로 돌아온 무명은 제일 먼저 소녀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창고에 가두었다. 자신의 투박한 손을 물어뜯고 악을 쓰는 소녀의 모습이 산채 식구의 신경을 건드릴까 염려가 된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게 우선 마음을 안정시키기로 결정한 무명은 짚 위로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꼬마 아가씨, 비록 네 부모가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너도 우리를 이해해 줘야 돼. 큰형님께선 묘령채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할 수 없이 산적질을 하고, 또 관아로부터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거라고.”
“당신 바보야? 먹고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고 금품을 빼앗는다는 게 말이나 돼? 그렇게 정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싶으면 정당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될 거 아냐! 왜, 왜 타인을 죽이고 그들의 돈으로 먹고살려 하는데? 웃기지 마! 나보고 그런 헛소리를 받아들이라고? 다 자신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거 아냐? 그런 당신들의 편한 삶을 위해 엄마 아빠가 죽은 거 아니냐고!”
“그, 그건…….”
답할 수 없었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고성을 내지르는 소녀의 질문에 무명은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무명의 옷을 힘껏 움켜잡으며 소녀는 계속해 소리쳤다.
“살려 내! 엄마 아빠를 살려 내란 말이야! 왜 죽어야 하는데? 왜 엄마 아빠가 당신들 때문에 죽어야 하는데! 단지, 단지…… 친척집에 갔다 왔을 뿐인데, 단지 그것뿐인데…….”
“…….”
결국 무명의 바지를 부여잡은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려 냈다. 자신의 신발을 적시는 소녀의 눈물에 무명은 말없이 두 눈을 감아야만 했다.
누구보다 가족을 원했던 그였다.
그렇기에 가족을 잃은 소녀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진 못해도 느낄 순 있었다. 가슴이 저미는 아픔과 상실감, 그것을 무명 또한 느끼며 눈을 떠 말했다.
“내가 지금 널 위로해 주려 한다면 그것 또한 웃긴 일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지금부턴 너도 우리 산채의 가족이라는 걸. 그리고 난 가족이 된 너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것이란 걸.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
등을 돌렸다.
힘없이 자신의 바지를 놓은 소녀로부터 등을 돌린 채 무명은 창고 밖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런 그를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녀가 문득 미친 듯 웃어 대기 시작했다.
비웃음.
고개를 젖힌 채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행동은 분명 무명이 던진 말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 비웃음과 더불어 저주에 찬 욕설이 무명의 등으로 향했으나 무명은 묵묵히 그녀의 욕설을 들으며 창고 밖으로 몸을 뺐다.
당연한 것이기에.
지금 그녀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나 무명은 자신이 던진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 역시 당연한 것이기에.
무명에게 있어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산채의 식구가 된 소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했다. 또한 그 가족을 평생 지키고자 스스로 다짐한 것도 그에겐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당연함 속에서 한 소녀는 비웃고, 한 소년은 몸을 뺐다.
저녁 해가 저무는 어둠 속으로 각각의 몸을 담근 채…….

***

투두둑.
움켜쥔 주먹에서 울리는 뼈마디 소리가 섬뜩했다.
떠오른 아침 햇살이 나무로 만들어진 창고의 틈을 비집고 흘러들며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가 한 사내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여어,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군.”
“…….”
맞는 말이다.
비록 날이 밝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이기에 평소라면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그것은 무명이란 이름을 가진 소년도, 오삼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일찍 눈이 뜨여 창고에 갇혀 있을 소녀를 조금이라도 위로코자 찾았던 무명은 자신과는 다르게 밤새 잠을 자지 않은 오삼을 볼 수 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지를 추켜올리는 오삼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벌거벗은 소녀의 육신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또한 밤새 한 마리 짐승에게 유린당했을 소녀의 입에선 묽은 피가 흘러나와, 간신히 유지되던 무명의 이성을 앗아 갔다.
“형님…… 이것도 가족을 위해서인가요? 산채의 식구들을 살리고자 한 일인가요?”
“하하, 무슨 소리냐? 이놈, 이제 보니 몸만 다 컸지 아직 마음은 어린애 그대로구나. 너도 나중에 진정한 어른이 된다면…….”
콰직!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엉뚱한 무명의 질문에 애써 태연을 유지하며 답해 주던 오삼은 갑작스레 날아든 무명의 주먹에 턱이 돌아가 아예 입을 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무명은 그의 입이 자신의 주먹에 뭉개지든 말든 상관없이 그대로 좌권을 쳐올려 비어 있는 오삼의 가슴뼈를 으그러뜨렸다.
콰드득!
“컥!”
단말마의 비명이 흥분한 무명의 귀로 흘러들었다.
무명이 가진 괴력을 보여 주듯 가슴뼈가 으스러지며 그대로 허공 위로 떠오른 오삼의 입에선 비명과 동시에 피가 토해져 나왔으나, 무명은 처음부터 그를 죽일 작정인 듯 우권을 허공 높이 치켜들어 우악스럽게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쾅!
“…….”
형편없는 몰골로 바닥에 힘없이 내리꽂힌 오삼의 몸이 순간 움찔댔다. 그 육신 위로 올라탄 무명은 오삼의 머리를 향해 연속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외쳐 대기 시작했다.
“왜? 대체 왜?! 가족이라고 말했잖아! 개자식아, 가족이라면서 대체 왜! 왜 그랬어?! 왜!”
“…….”
답이 없었다. 아니, 답을 할 수 없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이미 무명의 연속된 힘에 머리뼈가 으깨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오삼은 죽어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더욱더 무명을 화나게 했는지, 그는 언제까지고 죽은 오삼의 육신을 내려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음인가.
서서히 주먹질이 멈추며, 무명은 피투성이로 변한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흘렀는지도 모를 눈물을 떨어뜨리며 멍한 눈으로 붉게 변한 양손을 바라보던 무명이 문득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크하하하하! 뭐가 가족이야! 뭐가!”
그저 가족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나의 울타리에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가족을…….
“크크, 바보 같아.”
자조 어린 웃음소리와 더불어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일으킨 무명은 곧 이름도 알지 못한 소녀에게 다가갔다.
여기저기 찢어진 소녀의 옷가지와 여린 몸에 난 상처가 무명의 눈에 비쳐 드니, 그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다. 그 아픔을 간직한 채 무명의 시선이 소녀의 얼굴로 향했다.
붉은 피.
간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혀를 물어 자결한 소녀의 입가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를 무명이 닦아 주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소녀의 얼굴은 피로 점철되었다.
“미, 미안. 하하, 나 아무래도 정말 바본가 봐. 내 손에 이렇게 피가 묻었으면서 오히려 널 닦아 주려 했으니 말이야. 크크크, 웃기지? 가족, 가족 하면서 정작 너도 지키지 못하고, 또 가족이라 불렀던 사람도 내가 죽이다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지킨다고 다짐한 게 어제였는데 지키지도 못하고……. 미안해.”
웃으면서 말했다.
분명 두 눈에선 눈물이 흐르나 무명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 사실을 무명 역시 눈치 챘는지, 피 묻은 주먹을 움켜쥔 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미안……. 너한텐 계속 미안한 일뿐이네. 나 사실 지금 엄청 슬프고, 엄청 가슴이 아프고, 또 엄청 괴롭거든. 근데, 근데 자꾸 웃음이 나와. 아무래도 버릇인가 봐. 사실 나 지금까지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많았거든. 혼자서 너무나도 외로워서 운 적도 있어. 근데 그때마다 울면서 웃게 되더라. 웃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워서 나도 모르게 웃게 되더라. 그러니까 용서해 줘. 지금 이렇게 널 두고 웃는 날…… 널 지키지 못한 날 용서해 줘.”
여전히 소녀는 답이 없었다.
이해도 원망도 없는 무심한 소녀의 육신을 무명이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어느새 창고 밖으로 일기 시작한 소란이 더 이상 무명에게 이곳에 있을 수 없음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최소한 죽더라도 이곳은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이 소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좀 더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조용히 잠들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게.”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한 밖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디며 말했다.
원망과 증오에 찬 채 죽었을 소녀를 위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