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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3화)
第五章 인연(因緣)(2)


“후훗, 이거 나도 지치는데.”
검게 물든 하늘이 밤이 다가왔음을 알려 주었다.
그 밤하늘 위로 떠오른 달을 불빛 삼아 주변을 훑어보던 무명은 이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좁디좁은 토굴 속으로 자신의 몸을 디밀었다. 짐승의 집으로 사용된 듯 보이는 토굴 안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어, 무명은 자신보다 먼저 토굴 속에 자리 잡은 소녀의 시신을 앞에 둔 채 발을 펴고 앉을 수 있었다.
“휴우, 아무래도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아.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네가 여기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줄게.”
피곤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소녀를 안고 이름 모를 산으로 숨어든 것이다. 채주가 죽은 것을 안 산적들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빼기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신력을 타고난 무명이라지만 이미 육신은 지쳐 있었다.
자연 답답한 토굴의 어둠 속에서 시신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금세 잠이 들었으며, 그가 눈을 뜬 것은 날이 훤히 밝은 후였다. 어느새 하루가 넘어갔음을 안 무명은 재빨리 몸을 토굴 밖으로 빼 주변을 훑어보았다. 눈 덮인 산속으로 다른 이의 발자국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한 후, 아무도 없음을 안 무명은 어제 미리 봐 두었던 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린아이 크기만 한 바위를 별반 힘들이지 않고 들어 올린 무명은 자신이 빠져나온 토굴 입구를 향해 그것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쿵!
쿠르르릉…….
순간 얼어 있던 토굴의 입구와 거세게 부딪친 바위는 사내의 힘을 보여 주듯 입구를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그대로 토굴의 흙과 함께 묻힌 바위를 무명은 슬픈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이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야. 그 안에서 부디 편히 쉬길…….”
한마디 말로써 토굴에 잠들어 있을 소녀의 넋을 위로하며 무명은 몸을 돌렸다.
산 아래가 아닌 산 중심을 향해.
일부러 눈 위에 큰 발자국을 찍으며, 아직도 자신을 쫓고 있을 산적들을 유인키 위해 걸음을 옮기는 무명의 신형은 이내 수풀 속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후우, 후우…….”
얼마나 걸었을까.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걷던 무명은 눈앞으로 보이는 계곡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추위에 하얀 입김을 토해 내야만 했다.
‘설마 이대로 얼어 죽는 건가? 후훗, 그것도 괜찮긴 하겠군. 산적 놈들 칼에 찔려 죽는 것보단 낫겠지.’
금방이라도 전신을 얼릴 듯한 한기에 절로 쓴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를 입가에 담은 채 계곡 안으로 들어서던 무명은 뜻밖의 광경에 그대로 몸이 굳어 들었다.
“저, 저것은?!”
쿠쿠쿠쿠…….
거대한 한 마리 뱀과 같았다.
그 길이는 수십 장에 달하며, 투명한 얼음으로 된 몸통을 이용해 계곡 안을 가득 메운 빙룡의 자태는 위압(威壓) 그 자체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그 떨림을 간직한 채 무명은 계곡 입구에 숨어 빙룡을 바라보았다.
“…….”
태양에 타들어 간 듯 검은 피부를 간직한 사내.
고슴도치처럼 하늘을 향해 삐쭉삐쭉 솟은 짧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사내 무명은 몸이 굳은 상태로 저 멀리 보이는 빙룡과 그 용 앞에 두려움 없이 선 소년을 바라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쳇, 이런 건 딱 질색인데.”
마음속 두려움을 반증하듯 딱딱하게 굳어 든 얼굴 위로 억지 미소가 그려졌다. 그 두려움과 함께 밀려든 고민은 사내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으나, 신비로운 빛을 뿌리는 검을 이마에 박은 한 마리 빙룡은 사내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눈앞의 소년을 향해 거대한 입을 쩍 벌려 보였다.
“젠장, 왜? 어차피 죽을 거라면 좀 더 평범하게 죽고 싶었다고! 이런 죽음은 내 쪽에서 사양하고 싶단 말이야!”
개죽음이다.
저 거대한 빙룡을 상대로 인간인 자신이 소년을 구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분명 지금의 선택은 개죽음이 확실하건만, 그래도 사내는 소리치며 대지 위에서 발을 뗐다.
첫발은 힘들게, 그러나 두 번째 발은 거침없이 대지를 내디뎌, 저항도 하지 않는 소년의 육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빙룡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소녀.
그 소녀를 대신하듯 마주친 소년 이랑을 구하기 위해.

***

빙룡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느렸다.
지루하다 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을 보이는 빙룡이나 이랑은 자신을 향해 다가드는 빙룡에게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빙룡의 이마에 박힌 검에서 흘러나오는 청광(靑光)이 이랑이 생각할 수 있는 사고를 앗아 간 것이다. 마치 머리가 텅 빈 듯 멍한 눈으로 이랑은 빛을 바라볼 뿐이다. 그것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설혼심결의 기운이 빛과 공명해 깨어나며 이랑의 마음을 백지 상태로 되돌려 일어난 현상임을 정작 이랑 본인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서서 점점 더 강하게 다가오는 빛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빛과 함께 이랑의 지척에 이른 빙룡은 이내 거대한 입을 벌려 이랑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순간.
화아아아아!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이랑의 눈앞에서 터져 나온다 싶은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빙목도, 빙초도, 거대한 입을 벌렸던 빙룡도, 심지어 이랑의 육신마저 사라진 백색 공간으로 신비로운 말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심혼지관(心魂之關)을 통과해 자격을 얻은 아이야,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내가…… 두려워한다?”
육신이 사라진 이랑이 되물었다.
백색 공간을 인식한 순간부터 생각할 수 있는 정신만이 남은 이랑의 질문에 문득 공간 안으로 청색 빛이 모여들며 하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인.
발목까지 흘러내린 흑발이 유난히 아름다운 여인은 백색 공간 위로 태연히 서서 미소를 그렸다. 상냥한 그녀의 미소에 이랑은 처음의 질문조차 잊은 채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지?”
“난 빙혼을 만든 빙마(氷魔) 일족의 마지막 후예. 사람들은 날 일컬어 검화(劍花) 지연화라 불렀다.”
검화 지연화.
그녀는 이미 사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여제라고까지 불리며, 빙궁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했던 지연화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랑은 놀라지 않았다.
단지 그는 계속해 물을 뿐이었다.
“빙마 일족?”
“그것은 존재해선 안 될 자. 빙이란 얼음을 뜻하며, 마란 마귀를 뜻한다. 냉기를 다스리는 마귀, 그 마귀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이 빙마 일족의 정체.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힘을 가진 자. 그 힘은 몸 안에 잠든 마의 피에 의해 파멸을 낳으니, 빙마 일족은 스스로 세상의 어둠으로 사라지길 원했다. 또한 그 바람대로 그들은 세상과의 연을 끊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멸망을 향해 치달렸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후손이 바로 나 지연화였다. 하지만 난 세상을 보길 원했다. 혼자 남은 난 세상을 보길 원했고, 세상으로 나갔다. 평범한 인간을 만나고,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웃으며, 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간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잠시 말을 끊었다.
침묵한 채 지난날을 회상하던 지연화는 이내 백색 공간에서 정신체가 되어 떠돌고 있을 이랑을 향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즐거웠고, 때론 슬펐다.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서 웃는 법을 배웠고, 우는 법 또한 배웠다. 비록 괴로운 날도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분명 나에게 행복이었다. 난 그 행복을 안겨 준 사람들을 이끌고 천산에 빙궁을 세웠다. 좀 더, 좀 더 그들과 함께하며 행복을 느끼고자……. 하지만 내 몸에 잠든 마의 피가 눈을 뜨며 행복은 깨졌다. 마의 피는 순식간에 내 몸과 마음을 점령하며 외쳐 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여라! 모든 걸 죽이고, 모든 걸 파괴하라! 그것은 결코 내가 바라지 않는 갈망. 파괴에 대한 욕구. 그 욕구가 내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 난 빙마 일족이 고대부터 갖고 있던 힘을 이 빙혼에 봉인했다. 그것은 육신과 마음이 마의 피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한 내가 타인을 피해 입히지 않기 위함. 난 빙마의 힘만을 빙혼에 봉인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가졌던 힘과 설혼심결이라 불리는 기운마저 내 제자에게 주었다. 무력해진 나를 그 아이의 검으로 벨 수 있도록…….”
“그 말은 당신이 제자의 손에 죽었단 뜻인가?”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당신은 뭐지?”
“여기 있는 난 단순한 사념체(思念?)에 지나지 않는다. 빙마의 힘을 빙혼에 봉인하던 날, 난 훗날 강한 힘을 가진 빙혼을 악인이 가질까 염려하여 내 정신의 일부를 검 속에 옮겨 놓은 것이다. 설혼심결의 기운을 가진 자만이 심혼지관을 통과해 빙혼을 얻을 수 있도록.”
“설혼심결?”
“후훗, 그것은 바로 세상에 나오기 전 내가 가졌던 본연의 마음. 순백의 아무것도 존재치 않는 순수함이 바로 설혼심결의 정체다. 세상을 알지 못하기에 너무나도 순수했던 내 본성이 설혼심결이라 불리는 기운인 것이다. 또한 그 기운은 이미 완성된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어 순수한 하나의 형태로 변화시킨다. 순수한 선이든 순수한 악이든……. 난 설혼심결의 기운을 가진 자가 과연 악인가 선인가를 심혼지관으로 판단한 후, 만약 악이라면 그의 마음속에 심마가 들어 죽게 만들며, 만약 선이라면 그에게 빙혼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넌…….”
또다시 말을 끊었다.
긴 대화를 이어 가던 지연화의 사념체는 말을 끊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이랑을 향해 그녀는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넌 마치 나와 같다. 이 세상에 나오기 전 백지 상태였던 내 마음과 같다. 그렇기에 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한다고?”
“그래, 두려워하고 있단다. 세상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했던 나와 마찬가지로 넌 타인을 모르기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용기를 내거라. 내가 세상을 향해 발을 디뎠듯 너 또한 발을 디뎌라.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가 느끼는 감정을 너 또한 느껴 보거라. 그것은 때론 널 아프게 하고, 때론 널 슬프게 하겠지만, 때론 널 웃게도 만든단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타인은 결코 두렵기만 한 존재가 아니란다. 그래, 바로 저자처럼 널 생각해 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깨닫도록 하거라.”
뜻 모를 말.
그 말과 동시에 지연화가 서 있던 발밑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공간이 사라지며 드러난 세상은 바로 이랑이 조금 전까지 있던 계곡 안의 풍경이었다. 또한 그 속에는 빙룡에게 먹힌 자신의 육체를 구하기 위해 생전 처음 보는 사내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자는?”
단순한 주먹질로 빙룡을 쳐올리는가 하면 거대한 빙룡의 목을 억지로 끌어당겨 보기도 했다. 투명한 입 속에 잠자듯 누운 이랑의 육신을 빼내기 위해 진땀을 흘려 내는 사내의 입에선 연신 고성이 터져 나와 계곡 안을 울려 댔다.
“이런 빌어먹을, 뭐가 이렇게 단단해! 어이, 꼬마 친구, 정신 좀 차리라고! 꼬마 친구 구하려고 용쓰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제기랄! 야, 이 더럽게 큰 용대가리야, 차라리 날 먹어라! 덩치 큰 내가 더 맛있어 보이지도 않냐?! 꼬마 친구 먹어 봐야 간식거리도 안 된다고! 왜, 겁나? 크크, 하긴 내가 네 입 속에 들어가면 아마 제일 먼저 네 아가리부터 찢어 놓을 테니 겁나기도 하겠지! 이 겁 많은 지렁이 같은 새끼야, 몸통이 부서지고 싶지 않으면 어서 꼬마 친구를 내놓으란 말이다!”
혼자 화내고 열 내고 웃고 욕한다.
이랑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그의 표정은 무명이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자인가를 보여 준다. 이랑과는 다른, 수많은 감정을 가진 무명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랑은 생각했다.
“나하고는 다르다.”
“그래, 다르단다. 저 아이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 너완 달리 모든 감정에 충실한 성향이라 할 수 있지. 후훗, 조금은 열혈(熱血)이랄까?”
농을 던졌다.
생전 지연화가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딘 후 가졌던 성격을 보여 주듯 여인은 농을 던졌으나 이랑은 웃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입을 가린 채 아직 웃고 있는 지연화를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감정을 모르는 난 빙혼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단다. 넌 나를 만났을 때부터 이미 빙혼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은 거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곳에 내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 되겠군.”
“돌아가고 싶은 거구나. 원래의 네 몸으로……. 후훗, 상냥한 아이.”
미묘한 말을 끝으로 지연화의 몸은 다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이랑과 마찬가지로 정신체가 된 지연화는 곧 육신으로 돌아가는 이랑을 향해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네가 주인이 된다는 것은 빙혼에 머문 내가 잠드는 것을 뜻한다. 이곳에서 잠이 든 난 의지가 사라진 단순한 기억으로써, 네가 필요로 한다면 빙혼이 가진 힘에 대한 정보는 물론 지연화가 인간으로서 익혔던 무공에 대한 정보 역시 전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네가 앞으로 걸어가는 길을, 빙혼을 통해 잠이 든 나 역시 같이 걷고 같이 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고다.
빙혼 안에 잠들기 시작한 지연화의 경고를 끝으로 이랑이 눈을 떴다. 동시에 이랑은 우수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빙혼.
어느새 이랑의 손에 들린 빙혼은 비은사를 뚫고 직접 그의 손 안으로 서늘한 기운을 안겨 준 것이다. 단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를 맑게 해 주는 빙혼의 감촉을 느끼며 이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빙혼이 그의 손에 쥐어짐과 동시에 무너진 빙룡 안에서 몸을 일으킨 이랑은 곧 자신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고 선 무명을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건? 어이, 꼬마 친구, 너무 태연한 거 아냐? 난 널 구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했다고. 그런데 넌 어쩜 그리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쳇, 결국 나 혼자 헛다리 짚고 멍청한 짓을 한 건가? 푸하하하하! 뭐, 그건 어찌 됐든 상관없겠지. 꼬마 친구가 무사했으니 그걸로 만족하지, 뭐.”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무명이 차가운 바닥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빙룡을 본 순간부터 많이 놀랐던 무명이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말로만 전해지던 용이란 존재를 본 것만으로도 기절할 일이건만, 기괴한 용이 집어삼킨 소년이 멀쩡히 살아 나온 것이다. 한순간 무너진 용의 육신 속에서 살아 나온 소년의 모습이 너무도 말끔해 오히려 허탈감에 빠진 무명은 이랑이 보든 말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아 버렸다.
“휴우…….”
피곤했다.
가뜩이나 이틀간 계속된 긴장의 시간으로 인해 피곤이 축적되었던 육신이다.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을 알지도 못하는 소년을 구한답시고 혹사했으니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했다. 등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만으로 겨우 혼미해지는 정신을 유지했기에 무명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이랑에게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이봐, 꼬마 친구, 아니 용에게 먹히고도 멀쩡히 살아남았으니 꼬마 신선이라고 해야 하나? 크크, 어찌 되었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난 무명. 참고로 이건 내가 지은 이름이라고. 그러니 성 따윈 물을 생각도 마. 어차피 난 내 성도 모르는 인간이니까.”
“…….”
미묘한 눈길로 무명을 바라봤다.
편하게 두 눈을 감은 채 입가엔 미소를 그려 보인 무명을 잠시 바라보던 이랑은 이내 그가 알고 싶어 하던 답을 전해 주었다.
“이랑.”
짧은 답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답조차 무명은 듣지 못한 채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드르렁 코까지 골며 태평하게 잠이 든 무명의 입가로 그려진 미소를 이랑은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계속해 바라봤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이랑의 입가로 문득 흐릿한 미소가 걸린 것은 찰나였다.
무명이 그려 낸 미소를 어색하게 흉내 내 그려 보던 이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다시 본연의 얼굴로 돌아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이랑은 잠이 든 무명의 곁을 무심히 지나쳐 계곡을 빠져나가며 말문을 열었다.
“노백, 그를 본궁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도록 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이랑의 말에 적발 노인이 그동안 숨어 있던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내 무명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걱정이 되었기에.
자신이 보살피던 어린 주인이 걱정되어 이랑보다 먼저 계곡 속에 숨어 있었던 노백은 사라지는 소년의 등을 보며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훗, 상냥한 분이건만, 그분처럼 본성은 상냥한 분이건만 스스로 그것을 모르는 게 안타까울 뿐이로구나.”
이미 사라진 이랑의 그림자를 좇던 노백은 이내 그 시선을 돌려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차가운 대지에서 태연히 잠을 청하는 무명을 기이한 눈길로 바라보던 노백은 곧 그의 육신을 일일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
“껄껄! 처음부터 평범한 놈은 아닌 줄 알았지만, 천무지체(天武肢體)라니! 하늘로부터 타고난 무골을 내 직접 이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크하하하하!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로다!”
마음에 들었다.
그가 이랑을 구하기 위해 보여 줬던 행동도, 그가 그 행동 속에서 내비쳤던 성정도 노백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그의 육신이 말로만 전해지던 천무지체임을 알아본 노백은 결국 한 가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키워 볼 만하겠어. 가뜩이나 내 대에서 혈류노괴의 대가 끊길 것을 염려했건만……. 후훗, 이 아이라면 내 뒤를 잇기엔 충분하고도 남으리라!’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의 갈등은 없다는 듯 결정을 내린 노백은 곧 무명이 깨지 않도록 수혈을 짚은 후 그의 육신을 어깨에 들쳐 멨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큰 무명을 거뜬히 들쳐 멘 노백은 이내 이랑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 계곡에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