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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4화)
第六章 여심남심(女心男心)(1)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꽃이 시든 정원의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더욱더 바람을 차갑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그 바람을 맞고 선 사내 이학은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이 넘실대는 하늘을 바라보고 선 사내 이학의 뒤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 소년이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청.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소년 이청은 수중의 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말했다.
봐 달라고.
등을 돌려 자신을 보아 달라고 소년 이청은 마음속으로 외치나 사내는 여전히 맑고 투명한 겨울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놈을, 그놈을 생각하는 건가요? 내가 이렇게 있는데도 아빠는 여전히 그놈만을 생각하는 건가요?!’
묻고 싶었다.
이학을 향해 직접 묻고 싶었다.
그렇게도 궁을 떠난 이랑이 걱정되느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올 답이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의 답일까 두려워 차마 묻지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검을 움직여 그가 돌아봐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이청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학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태산이라도 되는 듯…….
“신, 노백이 보고 드리옵니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문득,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태산이 움직였다.
뒤에서 흘러든 노백의 말에 이학은 천천히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청의 눈으론 암울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다, 내가…….’
자신이 원하던 대로 사내는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등을 돌린 사내는 멈춰져 있던 걸음을 떼 노백과 함께 정원에서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크크크,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지?’
검을 멈췄다.
무심히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학의 행동에 결국 이청은 스스로 검을 멈추며 고개를 숙였다.
순간.
“네 어깨엔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 있다. 풍유류섬은 결코 힘이 아닌 부드러움이 있어야 함을 명심하거라.”
“…….”
사내 이학이 지나치듯 고개 숙인 이청을 향해 말을 흘렸다.
그것은 조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뒤에서 들려오던 바람 소리만으로도 이미 이청의 검의 잘못된 점을 파악한 이학이 조언을 남김과 동시에 장내를 떠났으나, 자신의 형인 이랑의 얼굴로 뇌리를 가득 메운 이청은 아비의 조언을 듣지 못한 채 음울한 눈빛만을 발할 뿐이었다.

***

소년과 검(劍).
태사의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묻은 사내 이학은 넓은 대전 위로 우두커니 서 있는 이랑과 그의 손에 들린 빙혼을 바라보았다. 그저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던 이학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달라졌구나.”
“…….”
궁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지금 이랑은 분명 달랐다. 또한 그 이유가 빙혼이 아닌 이랑 자체에 있음을 이학은 알아본 것이다.
“야월을 만났습니다.”
문득 이랑이 입을 열어 답했다.
그 답과 더불어 이랑은 야월과의 일을 설명하려 했으나 그런 이랑의 입을 이학이 한 손을 들어 막았다.
“되었다. 네가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허나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거라. 그가 너에게 어떤 힘을 주었든 그것은 결코 너의 힘이 아님을. 네 힘이 아닌 타인의 힘은 비록 쓰기 쉬우나 그 힘에 빠져 든다면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행여나 이랑이 지금 가진 힘에 안주할까 걱정된 이학의 당부에 이랑은 가볍게 고개 숙이며 답했다. 그 모습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학의 눈동자가 문득 슬픔으로 물들었다.
빙혼.
검집도 없이 한 마리 백룡이 새겨진 검신을 드러낸 빙혼의 모습에서 자소청을 떠올린 것이다.
“빙혼은…… 네 어미가 너에게 남겨 준 마지막 유품과도 같다. 넌 앞으로 빙혼을 간직함에 결코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
쓸쓸하게 변한 말이 사내의 마음속에 담긴 무게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이학의 말에 이랑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답할 뿐이었다. 그런 아들을 향해 이학이 손을 내젓자, 그것이 곧 축객령임을 안 이랑이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대전을 빠져나갔다. 이내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이학은 한쪽 기둥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노백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았던가?”
“…….”
축객령은 이랑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혼자 있고 싶었던 이학은 노백 역시 물러나길 원했으나 그는 오히려 이학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 노백, 주군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청?”
뜻밖의 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해 본 적이 없던 노백이었다. 그런 그가 무릎까지 꿇으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 청이란 게 궁금했던 이학이 물으니, 노백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
“이번에 도련님께서 한 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 무리가 되는 줄은 압니다만, 신 노백, 그 아이를 의손(義孫)으로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

바람.
불어오는 봄바람이 제법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 향긋한 봄바람을 이곳 마협곡에서 세 번째로 맞은 적발 사내는 청청한 빛에 감싸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 위로 육 척의 장신을 앉힌 채. 서글서글한 눈을 들어 한가로이 떠다니는 구름을 보니 제법 운치가 있다. 유유히 푸른 하늘을 헤엄치는 한 조각 구름을 바라보며 스스로 고상함과 우아한 멋에 젖어 든 적발 사내는 절로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머금었다.
“이곳이 내 집인가?”
시구를 읊듯 낮은 어조를 흘리는 사내의 음성은 즐겁기만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찾아 헤매던 진정한 가족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족뿐이던가?
말은 없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운, 즐겁지만 함께 있으면 골치가 아픈, 그 골치 아픔을 한 방에 없애 주는 귀여운 친구들이 이곳에 있었다.
각각의 개성이 아주 뚜렷해 전혀 지겹지가 않은 세 명의 친구를 이곳에서 만났고, 또한 맘 놓고 할아범이라 부를 수 있는 가족 역시 이곳에서 만났다. 이름도 없는 떠돌이 고아였던 자신에게 새로이 백우(白遇)란 이름을 지어 주고 무공이란 것도 가르쳐 준 할아범과 세 명의 친구들은 그에게 있어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또한 그 소중한 존재와 함께 보낸 지난 삼 년은 그가 지금껏 살아온 십칠 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암, 행복하고말고. 흐응∼.”
아예 풀밭에 몸을 누이며 콧노래를 불렀다.
두 눈을 감고 따사로운 태양빛을 받으며 콧노래를 부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선선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사내의 두 눈에 문득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그가 좀 더 편하게 잠들게 해 주려는 듯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사내 백우를 보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흐응,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수.”
“허허,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수련 시간에 농땡이 피우고 신선놀음이나 하고 누웠으니 당연히 즐겁기도 하겠지.”
“……!”
번쩍 두 눈이 떠졌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치켜뜬 사내 백우는 곧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마엔 푸른 힘줄이 돋은 노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백우가 하하 어설픈 웃음을 터뜨리니, 노백은 화답하듯 껄껄 웃으며 한 손에 든 도를 번쩍 치켜들었다.
“하, 할아범, 설마 그깟 수련 좀 안 했다고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죽일 생각은 아니겠죠?”
“허허, 이심전심이라더니, 손자 분께선 어찌 그리 내 맘을 잘 아누?”
“에이∼ 농담도.”
“으응∼ 진담도.”
웃고 있는 두 사내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장감 속에 계속해 머물 생각은 없는 듯, 백우가 돌연 누운 자세 그대로 튕기듯 대지를 차올리며 허공 위로 솟아올랐다.
파밧!
“……!”
짧은 순간 공중에서 세 바퀴나 돌아 노백으로부터 멀어진 백우는 이내 다시 한 번 대지를 차 그대로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한편 빠르게 사라지는 백우의 신형을 멍하니 바라보던 노백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말을 뱉어 내야만 했다.
“훌륭해! 일 년 만에 혈영비(血影飛)를 완전히 익히다니, 과연 천무지체로다!”
절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혈류노괴의 혈류마공(血流魔功)과 혈천도법(血天刀法), 그리고 신법인 혈영비를 지난 삼 년간 백우에게 가르쳐 온 노백이다. 비록 부족한 내기를 기혈신단(氣血神丹)을 먹여 보충했다지만, 백우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한 모습으로 노백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일 년 전부터 가르쳐 온 혈영비를 백우는 완벽히 펼쳐 노백에게 감탄을 안겨 준 것이다.
“허허, 아무리 날 때부터 전신 혈도가 타동된 천무지체를 타고났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차, 내가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건만!”
문득 본정신을 차린 노백이 벌써 까만 점으로 변한 백우를 향해 내력을 모아 소리쳤다.
“야, 이놈아, 수련은 안 하고 또 어디로 내빼는 것이냐?!”
대기를 떨쳐 울리는 그의 고성은 널리널리 퍼져 나가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백우의 귀에까지 흘러들었으며, 그 소리를 들은 백우는 웃으며 답해 주었다.
“하하, 걱정 마시오! 내 지금 놀려는 게 아니라 랑이와 수련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네, 네놈이 또 도련님을 함부로 부르는구나! 내 그렇게 일러두었건만, 정녕 네놈이 내 손에 죽고 싶은 것이냐?!”
“거참, 할아범도 그렇고, 유랑이도 그렇고, 또 그 말 많은 계집도 그렇고, 왜 이리 랑이 대하기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수다! 친구면 친구답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오?!”
“뭬, 뭬야?!”
점점 멀어지는 거리만큼 작아진 대화 속에서 노백이 흥분해 외쳤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음인지 이내 백우가 한마디 말로써 위로하며 노백의 시야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걱정 마시오! 내 다른 사람 있는 데선 절대적으로 도련님이라 부를 테니!”
“저, 저런 막돼먹은 놈 같으니라고.”
비록 입으로는 욕을 하나 굳이 백우를 쫓아가 혼내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랑과의 비무를 통해 백우의 실력이 그 어느 때보다 월등히 향상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마지막에 전한 말대로 백우는 타인 앞에선 언제나 이랑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그것은 곧 백우 자신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 되며, 노백 역시 그것을 알기에 이리 안심하고 이랑에게 그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쯧, 또 그 아이와 싸우지는 말아야 할 텐데.”
단 한 가지 걱정만이 쓴 미소를 그리게 만들었다.
백우와 처음 만날 때부터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여 온 아이.
어린 소녀에서 이젠 어엿한 열일곱 처녀로 변한 자인영을 떠올린 노백은 쓴 미소를 그린 채 몸을 돌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