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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5화)
第六章 여심남심(女心男心)(2)
봄 향기가 열일곱 처녀의 방심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들뜬 마음과는 반대로 사뿐사뿐 내딛는 여인의 걸음은 너무도 차분해, 그녀의 속내가 어떤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저 긴 치맛자락을 이끌며 반듯한 자세로 걸음을 내딛는 여인의 고운 자태만이 남아 대로변을 걷는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짝을 찾아 헤매는 사내들의 시선에 여인이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 숙여 긴 속눈썹을 흘러내리니, 그 모습이 또 순백의 꽃과 같아 사내들은 넋을 잃었다.
어디 그뿐이던가?
목 언저리에서 길게 땋은 머리칼을 한쪽 앞가슴 위로 흘러 보낸 탓에 반대편 목의 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난 여인의 모습은 사내들의 두 눈으로 기이한 열기마저 담아 보였다.
청초함과 야릇함.
그 상반된 매력을 동시에 지닌 여인은 속으로 웃음을 흘려보냈다.
‘아무튼 사내란 것들은 단순하다니까. 그저 조금만 꾸미면 이리 시선을 떼지 못하니.’
그렇다고 그 시선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싫었다면 굳이 본성마저 숨긴 채 이리 꽃단장을 하고 내숭을 떨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남에게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며 겉으론 차분한 걸음만을 놀렸다.
그렇게 걷기를 얼마.
“……?!”
문득 여인의 눈으로 이채가 감돌았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두 남녀를 주시하고 있는 장면이 비쳐 든 탓이다. 또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두 남녀 중 갸름한 얼굴형에 부드러운 선을 지닌 미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여인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좋아해요!”
“네?”
천마각으로 가기 위해 큰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백의 소년은 난데없이 앞을 가로막으며 던진 소녀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소년을 향해 소녀는 한술 더 떠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건네니, 소년은 더욱더 당황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대로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어린 두 남녀를 주시하니, 결국 소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전, 전…….”
“흠, 제법인데. 아주 제법이야.”
어찌 답해야 좋을지 몰라 더듬대는 소년의 뒤로 문득 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이미 익숙한 여인의 음성에 소년의 눈이 반짝이니, 마치 그 시선에 화답하듯 여인은 거리낌 없는 동작으로 소년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누, 누나.”
목을 끌어안는 것도 모자라 어깨 너머로 얼굴을 내민 여인을 알아본 소년이 살았다는 듯 그녀를 불러 보았다. 그런 소년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여인은 이내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홍의 소녀를 바라본 채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난데없는 고백은 순간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 게다가 그 고백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이라면 상대는 쉽게 거절할 수도 없을 테고, 또 만약 그 상대가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연인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 되겠지. 아주 제법이야. 머리를 잘 썼어. 하지만 한 가지 실수를 했군. 이 아이는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다고. 후훗, 아마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벌써 이 아이는 줄행랑을 쳤을 거라, 이 말이지.”
“으으…….”
모든 걸 꿰뚫고 있었다.
자신이 힘들게 세운 고백 계획을 모두 꿰뚫어 보는 여인의 말에 소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소리쳤다.
“대체 언니와 유랑님은 무슨 관계죠?! 설마 언니가 유랑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죠!”
처음부터 듣고 있지 않았다.
소녀는 단지 초유랑을 자연스럽게 끌어안은 여인 자인영의 행동에 열이 뻗쳐 있었을 뿐이다. 한편 자인영은 가시 돋친 소녀의 외침에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하며 초유랑의 뺨 위로 자신의 뺨을 가져갔다. 너무도 다정하게 뺨을 비벼 대는 그녀의 모습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소녀의 마음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과 같았으며, 자인영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아예 결정타까지 날려 보냈다.
“어머, 좋아한다니? 어쩜, 무슨 표현이 그러니. 이왕이면 사랑한다고 해야지. 흐응, 이렇게 사랑스러운 유랑이인걸.”
“흐윽.”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큰 충격에 할 말을 잃은 소녀는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과 더불어 몸을 돌린 채 뛰어가는 소녀의 입에선 오직 단 한 마디 말만이 터져 나왔다.
“저주할 테야!”
“휴우…….”
이제는 익숙해진 듯, 저 멀리 사라지는 소녀의 등을 바라보며 자인영은 짧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소녀들의 고백에서 곤란해 하는 초유랑을 구해 준 적이 벌써 열 번도 넘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들려오는 게 저주 아니면 원망 어린 눈빛이니, 이제는 똑같은 반응들에 지겹기까지 했다.
한편 초유랑은 답답한 듯 자인영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마움을 말로써 대신했다.
“누나, 고마워어어어!”
순간, 너무도 뻔한 초유랑의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인영이 그의 뺨을 힘껏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질책 어린 말을 던졌다.
“암튼 너도 문제야.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어째서 말을 못하니? 그래, 좋아. 힘들게 고백한 어린 소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싫다는 생각은 좋다, 이거야. 하지만 오히려 너의 그 우유부단한 태도가 더욱더 그 아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단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니?”
“으음, 잘모해쪄.”
“……!”
어눌한 말 놀림이 귀여웠다.
비록 몸은 훌쩍 커 버려 어느새 자신의 눈 밑까지 자랐으나, 여전히 어렸을 때의 맑은 눈망울을 간직한 초유랑의 모습은 너무도 귀엽게 자인영의 눈으로 비쳐 들었다. 순간, 자인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덥석 초유랑의 몸을 껴안으며 술에 취한 듯 몽롱한 말을 흘려보냈다.
“흐응, 그래그래, 알았으면 됐어. 그보다 유랑아, 이 누나에게 장가올 생각은 없니? 우리 유랑이가 장가오면 이 누나가 평생 귀여워해 줄 텐데.”
“시, 싫어!”
그 언젠가 들었던 말에 초유랑은 당시와 똑같은 답을 전하며 급히 뒤로 몸을 뺐다. 한편 자인영은 농인지 진담인지 아직도 구분 못한 채, 지난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걱정스런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
“……?!”
“……!”
우연도 이런 우연은 없었다.
초유랑을 대동한 채 천마각으로 다가서던 자인영은 반대편 길에서 걸어오던 한 사내와 정확히 시선이 마주친 것이다. 짧게 기른 붉은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사내의 등장에 반가운 표정을 짓는 초유랑과는 달리 자인영은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여어, 일자무식.”
“여어, 망불녀.”
씰룩씰룩 눈초리를 움직이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입가엔 억지 미소를 그린 채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녀 사이엔 긴장감이 흘렀고, 그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초유랑은 슬쩍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호홋, 망불녀라니? 그건 또 뭘 까나.”
“하핫, 뭐긴. 다른 사람들 앞에선 언제나 얌전한 척 내숭을 떠는 널 일컫는 말이지. 망할 불여우 같은 계집애의 줄임말. 어때, 잘 지었지?”
파직.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잘 짓긴 뭐가 잘 지어?! 어디서 문장 같지 않은 문장 갖다 붙이고선 우쭐해 하는 꼴이라니. 하이고, 너한테 글을 가르쳤던 내가 다 부끄럽다!”
“뭐, 스승이 엉망이었으니 내 문장 실력이 엉망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안 그래, 망불녀?”
“이, 이게 끝까지!”
여인으로서 가졌던 차분한 몸가짐은 어느새 사라지고 소매를 걷어붙인 자인영이 백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백우는 웃으며 천마각 안으로 줄행랑을 놓고, 그 뒤를 쫓는 자인영마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홀로 남은 초유랑만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휴우, 도대체 우형과 누나는 왜 이리 사이가 나쁜 걸까?”
모르겠다.
노백의 부탁으로 글을 모르는 백우에게 글을 가르치러 왔던 것이 자인영과 백우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리 사이가 나쁘지만은 않았으나, 어쩌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만나기만 하면 다투는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그것이 초유랑으로선 못내 안타까웠다.
“쯧, 저건 진심으로 미워서 다투는 게 아니다. 가벼운 장난 정도로 봐 주면 되겠지. 그래, 오히려 사이가 너무 좋아서 다툰다고나 할까. 서로가 너무 잘 알기에 격이 없고, 격이 없기에 쉽게 싸우고, 또한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게지.”
“정말요?”
백우와 자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정광영의 말이었다. 백현과 더불어 벌써 십여 년 넘게 천마각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내의 말에 초유랑은 반짝 눈을 빛냈다. 한편 정광영은 골치만 썩이는 두 남녀와는 달리 여전히 귀엽게만 느껴지는 초유랑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그리며 가슴을 쳐 보였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너보다 오래 산 인생 선배로서 내가 장담하마!”
***
싸우는 게 아니다.
겉은 싸우는 거지만 진심으로 싸우는 게 아니란 정광영의 말에 기분이 좋았던 초유랑은 가벼운 걸음을 놀려 이랑이 언제나 무공을 연마하는 연무관을 찾았다.
“……!”
마치 정광영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인영과 백우가 다정히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연무관 입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아 초유랑이 웃으며 다가갔으나, 그는 두 사람을 부를 수가 없었다. 뒷모습과는 달리 심각하게 굳어 든 두 남녀의 얼굴이 말조차 붙이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어딘가 이상했다.
한 곳만을 바라본 채 굳어 든 그들의 얼굴에서 이상함을 느낀 초유랑은 곧 백우와 자인영의 시선을 쫓아 연무관 안을 바라보았으며, 그 속에서 이랑을 발견한 초유랑의 얼굴 역시 두 남녀와 똑같이 굳어 들었다.
흑룡(黑龍).
한 마리 흑룡은 마치 안개처럼 흐릿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흐릿한 형상의 흑룡은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랑.
길게 기른 흑발이 한쪽 얼굴을 가리며 흘러내린 까닭에 반쪽짜리 얼굴만을 드러낸 이랑은 체구가 이미 오 척을 넘어 같은 나이인 초유랑과도 그 차이를 두었다. 그러나 드러난 얼굴은 아직 소년의 티가 남아 어린 시절의 무심한 눈빛을 드러내니, 그 눈빛은 주변을 맴도는 한 마리 흑룡을 바라봄에도 전혀 동요의 빛이 없었다.
“…….”
그저 담담히 서서 주위를 맴도는 흑룡을 지나 자신의 검만을 바라봤다. 은은한 청색 빛에 물들기 시작한 빙혼을 바라보는 이랑의 모습은 담담하기만 해, 오히려 지금의 기현상이 당연한 듯 비춰졌다. 그러나 세 남녀는 그저 놀란 눈으로 이랑과 흑룡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이건?”
들어 본 적도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기에 초유랑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으나 백우와 자인영은 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인 것이다. 다만 그 질문을 초유랑이 먼저 말했을 뿐…….
아무도 지금의 현상을 설명치 못한 채 침묵이 감돌기 시작하자, 마치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뒤에서 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묵룡기(墨龍氣)라는 것이다.”
“……?!”
“……!”
갑작스레 흘러든 사내의 음성에 세 남녀가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이학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태연히 그들의 시선을 받았다. 소리도 없이 자연스럽게 세 남녀의 뒤를 점한 이학은 자신을 알아본 그들이 소리 내 인사를 하려 하자, 오히려 한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중요한 고비에 있는 이랑을 방해치 않기 위한 그의 당연한 행동에 세 남녀도 무언가를 느낀 듯, 그저 말없이 고개만을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인 이학은 곧 이랑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말을 흘려보냈다.
“묵룡기라는 것은 천마심공의 내기와 마음이 합일되는 경지인 심경에 들어설 때 나타나는 고유 현상이다. 또한 내기가 외부로 형성화된 묵룡을 자신의 의지로 검 안에 머물게 했을 때야 비로소 심경에 들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흑룡은 여전히 이랑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랑은 흑룡이 아닌 검만을 바라보고 있어, 그가 이학이 말한 심경에 아직 들지 못했음을 나타내 주었다.
‘심경부터는 깨달음의 경지다. 비록 외경에 들어 몸 안의 내기를 외부로 발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육신을 이용한 방법. 자신의 육신이 아닌 검에 내기를 담아 펼치는 무공은 그 위력 면에서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이랑은 강호에서 흔히 상승의 경지라 일컫는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금의 고비를 넘지 못하는 한 이랑에게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상승의 경지로 접어들 수 있는 깨달음은 우연히 찾아오며, 그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그런 기회가 찾아오리라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라면 지금의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결코 부정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이랑에 대한 이학의 믿음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으며, 그 믿음에 호응하듯 문득 이랑의 주위를 맴돌던 흑룡에 변화가 일었다.
스스스스…….
한 줄기 기음과 더불어 흑룡이 움직임을 멈췄다.
더 이상 이랑의 주위를 맴돌지 않겠다는 듯 멈춰 선 흑룡은 그 방향을 바꿔 이랑이 바라보고 있는 검신 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듯 천천히 움직인 흑룡이 검신과 합일되는 모습을 이랑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검무를 추었을 뿐이다.
언제나 자신과 함께했던 세 남녀가 아직 찾지 않은 연무관 중심에서 홀로 천마검식을 시전했던 이랑이다. 그러나 그 검무가 세 번째 반복되던 중 이랑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충동이었다.
몸 안에 잠들었던 내기가 그의 단전에서 들고 일어나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 외쳐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의 충동을 이랑은 흘려보내지 않고 검무를 멈춘 채 느낌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내기를 풀어놓았다. 이내 자유로워진 내기는 그의 육신을 벗어나 외부에서 형성화되었으며, 한 마리 흑룡으로 변화한 내기의 모습에 이랑은 언젠가 이학이 말했던 심경을 떠올린 것이다.
또한 이학이 경고했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낸 이랑은 지금의 느낌과 외부에서 자유로워진 내기를 하나로 합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반 시진이 지난 지금, 이랑은 마음과 하나로 합해진 내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검 안에 담아 보일 수 있었다.
순간, 한 줄기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검 안으로 흘러든 내기가 다시 검병을 쥔 손을 지나 단전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이랑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입가로 그려진 한 줄기 미소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었다. 삼 년 전 백우의 미소를 따라 했던 어색함은 사라지고 흐릿한 미소를 머금어 보인 이랑의 귀로 문득 한 사내의 말이 흘러들었다.
“좋은 표정이구나.”
“…….”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내의 표정이었다.
그것을 이학이 직접 말로써 표현하니 이랑의 입가에 그려져 있던 미소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모습에 이학은 방금 전의 말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웠기에.
처음으로 본 아들의 미소를 좀 더 보고 싶었건만, 그런 아비의 바람을 무심하게도 이랑은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이것으로.’
아쉬움을 떨치고, 그나마 미소를 보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영원히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미소를, 비록 잠시라 하나 보았다는 그 자체에 만족하며 이학은 다시 엄숙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금의 느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네가 심경을 지나 형경에 들고, 또한 형경을 벗어나 진경에 드는 데 있어 지금의 느낌은 뿌리와 같다. 그 뿌리에서 줄기가 나와 싹을 피우듯, 지금의 느낌은 앞으로 네가 더욱 높은 단계에 들기 위해 필요한 깨달음을 얻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 점을 명심하거라.”
“아버님의 말씀, 명심토록 하겠습니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이랑의 음성이었다.
어디까지나 일정한 그 음성을 흘려들으며 이학은 만족한 얼굴로 몸을 돌려세울 수 있었다.
‘멀지 않았구나. 저 아이가 천마비동에 들 날도. 천마비동에 들어 저 아이가 다시 내 눈앞에 서는 날, 강호는 새로운 마제를 맞이할 것이다.’
천마비동에서 나온다는 것.
그것은 이학 역시 거쳤던 길인 천마도행(天魔道行)이 시작됨을 뜻했다. 또한 천마도행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마제란 족쇄가 채워진 강호가 다시 한 번 그 족쇄를 풀기 위해 요동침을 뜻하는 것이다.
새로운 마제를 자신의 품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