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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6화)
第六章 여심남심(女心男心)(3)


찌르르, 찌르르르…….
오늘따라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마치 좀 있으면 다가올 여름을 알리려는 듯 힘차게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에 백우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대청마루로 나와 신형을 앉혔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자연스레 검게 물든 하늘로 향했고, 어둠을 밝히기 위해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휴우…….”
문득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저 달 속으로 떠오른 이랑의 얼굴이 그로 하여금 절로 한숨짓게 만든 것이다.
“대체 넌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그렇게 자꾸 네가 멀어질수록 난 점점 더 네놈을 따라잡기 힘들어지지 않느냐!”
따라잡고 싶었다.
처음 이곳에 와 이랑이 어떤 존재이며, 이곳이 어떤 곳인가를 들었을 때부터 다짐했던 것이다.
따라잡자고, 최소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진 못하더라도 발목이라도 움켜잡을 수 있는 실력을 키우자 다짐했었다. 또한 그 다짐을 이루고자 지난 삼 년간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겨우 이랑의 발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보인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임을 백우는 오늘 절실히 깨달아야만 했다.
“빌어먹을!”
발끝은커녕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너무도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니, 백우는 한숨만을 내쉬었다.
“휴우, 친구로서 네 곁에 서고 싶었다. 앞으로 중원에 나갈 네 옆에 누구보다 가까이 서서 널 지키고 싶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네 발끝에 닿을 만큼의 실력이라도 가져야 하는데, 난…….”
지키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이랑을 지켜보고, 또한 그를 지키고 싶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이랑에게 다가가자 노력했으나 그런 자신의 마음을 오늘 이랑은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서 포기할 셈이야, 지키고 싶다는 그 마음을?”
“……!”
문득 홀로 신세 한탄에 빠져 있던 백우의 귀로 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들었다. 예상치 못한 그 음성에 백우가 시선을 돌려 어둠에 물든 마당을 바라보니, 그곳엔 언제부턴가 한 여인이 서서 짓궂은 미소로 화답했다.
자인영.
양손을 등 뒤로 돌린 채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화사하게 변해 있었으며, 그런 여인의 모습에 당황한 듯 백우는 말을 잊었다. 자인영은 그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 화가 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정말 포기할 셈이야?!”
“포, 포기는 누가 포기한다고 그래? 그냥 내 자신이 한심해서 잠시 반성했을 뿐이야! 두고 봐. 조만간 랑이 녀석이 놀랄 만큼 실력을 키워 놓을 테니!”
“암,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라면 그 정도 호기는 있어야지! 좋아, 그럼 네 새로운 각오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 누님이 축하주 한잔 쏘도록 하지. 어때?”
화를 내듯 소리치는 백우의 말을 자인영이 장난스럽게 따라 하며 등 뒤로 감추었던 우수를 내보였다. 순간 찰랑이는 물소리와 더불어 독한 화주(火酒)가 호리병에 담겨 모습을 드러내니, 백우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듯 침을 삼켜 보였다.
“음, 네가 웬일이냐? 술을 다 갖고 이 야심한 시각에 날 찾다니……. 헉, 그, 그러고 보니 오늘 할아범은 천마각에서 장로회의를 한다고 늦는다 그랬는데. 너, 서, 설마 내가 혼자 있는 걸 알고, 날 유혹!”
퍽!
왼손에 들고 왔던 안주가 백우의 얼굴로 정확히 날아가 꽂혔다. 뒷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한순간 백우의 입을 막아 보인 자인영은 두 눈에 살기마저 담은 채 싸늘한 일갈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주거니 받거니 돌아가는 술잔이 제법 흥겨웠다.
그 흥겨움 속에 어느덧 호리병 안의 술은 바닥을 보이니, 백우는 ‘한 잔 더’라고 외치는 여인의 호령을 무시치 못하고 황급히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술독을 아예 통째로 들고 온 백우의 모습에 자인영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르 웃어 댔고, 애써 생각해 온 자신을 비웃는 그녀의 모습에 백우는 화를 냈다. 그렇게 두 남녀가 웃고 즐기는 사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 어느덧 술을 마신 지 한 시진이 지나갔다.
“아, 맞다! 너, 그거 기억나? 네가 맨 처음 랑이를 랑이라 불렀을 때 말이야.”
“기억나느냐고? 내가 어떻게 잊겠냐! 랑이를 랑이라 불렀다가 그날 너한테 맞아 죽을 뻔했는데.”
“흥, 그거야 당연한 거지! 감히 도련님을 랑이라 부르다니?! 맞아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고.”
“어이고, 그러셔? 그러는 아줌씨는 어떻고? 내가 랑이라 부른 후부터 아줌씨도 우리끼리 있을 땐 랑이를 랑이라 부르잖아!”
“그, 그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당황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지난날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두 남녀 중 여인이 당황해 말을 더듬자, 백우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능청스런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건 뭔∼데?”
“뭐긴 뭐야!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르는 개뼈다귀가 랑이를 랑이라 부르는데, 나만 안 부르면 억울하잖아!”
장난질 한 번에 돌아오는 건 성난 말과 주먹질이었다.
어느새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자인영이 능글맞은 모습의 백우를 향해 주먹을 치켜드니, 백우는 반사적으로 텅 빈 마당을 향해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 그의 뒤를 자인영이 신법을 펼쳐 따라가고, 백우 역시 신법을 펼쳐 달아나니, 넓은 마당 안에서 쫓고 쫓기는 두 남녀의 도주 행각은 세 바퀴나 돌아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헉, 헉……. 집요하기는.”
“크으, 너야말로 도망가는 재주 하나만은 랑이를 앞서고도 남겠다.”
너무 뛰어서였을까, 술기운이 제대로 오른 두 남녀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듯, 이내 다시 마루에 앉아 말없이 숨만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문득 자인영이 기둥에 몸을 기대며 숙인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술에 취해 몽롱하게 변한 눈으로 달을 바라보는 자인영의 입은 어느새 열려, 땅만을 바라보고 앉은 백우의 귀로 한마디 말을 전했다.
“넌 왜 그렇게 랑이를 지키고 싶어 하는 거지? 단순히 친구로서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잖아.”
“뭐야, 그게 또 궁금해? 하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천재님께서 이 무식한 놈 속 하나 모른다면 말이 안 되겠지.”
“장난치지 말고.”
“……!”
진지해져 있었다.
여인은 진지한 눈으로 백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과 마주친 백우 역시 굳은 얼굴로 답해 주었다.
“단지 은혜를 갚고 싶었을 뿐이야.”
“은혜?”
“그래, 은혜. 랑이는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랑이 덕분이거든. 사실 랑이를 만나기 전까진 즐거웠던 일보다 괴로웠던 일이 더 많았어. 그날, 랑이를 구하려 한 날에도 내 마음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 근데, 후훗, 정작 랑이를 구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랑이 덕에 이곳에 온 후, 난 내가 그토록 원하던 가족을 가질 수 있었어. 또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친구들 역시 가질 수 있었지. 그래서 이 모든 걸 갖게 해 준 랑이를 언제까지고 지켜 주고 싶어. 그게 유일하게 내가 랑이에게 은혜를 갚는 길일 테니까.”
“호오, 제법인데?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우리 일자무식, 다시 봐야겠네.”
어린아이 달래듯, 다가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너무 가깝게 다가온 탓에 술 냄새와 어우러진 여인의 향기가 유혹하듯 사내의 코로 흘러들었으나, 사내 백우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가볍게 여인의 손길을 거부하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장난하지 말고 이제 진실을 말하지그래?”
“어머, 무슨 소리일까나?”
“무슨 소리긴, 네가 날 찾은 이유 말이야! 단순히 술 한잔하자고 왔을 린 없잖아. 뭔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날 찾았을 것 아냐? 그것도 맨 정신으론 못할 만큼 심각한 얘기가!”
“제법인데. 후훗, 제법이야, 정말. 네가 이렇게 날카로울 줄은 전혀 짐작도 못했어.”
가볍게 웃으며 다시금 기둥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암천 위로 떠오른 달을 바라보는 여인의 입에선 사내가 기다리던 답이 흘러나왔다.
“랑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난 랑이가 인형인 줄 알았어. 전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거든. 후훗, 또 그 무표정한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해.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분명 어제까지도 내 뇌리에 기억된 랑이의 모습은 어렸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오늘 그 인형이 살아서 웃고 있는 거야. 그것도 아주 자연스런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그 미소가 충격인 거 있지. 충격이 너무 컸던지 내 속에 기억된 랑이의 그 조그맣던 모습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지 뭐야? 그리고 그 사내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거야. 아까도 잠을 자려 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랑이의 얼굴 때문에.”
“…….”
“그래서 널 찾은 거야. 너라면 내가 왜 이러는지 혹시 알지 않을까 해서…….”
안다.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 일기 시작한 감정이 무엇인지 사내는 잘 알기에 답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은 알고 있는 것만큼 쉽게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잠시, 아주 잠시 뜸을 들인 백우가 물었다.
“혹시 랑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거나 하진 않아?”
“뭐? 음…….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천연덕스런 그녀의 답이었다.
그 답에 백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너, 이제 보니 바보로구나. 혼자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그게 무슨 뜻이야? 어여 대답 못해!”
바보라는 한 마디에 흥분한 자인영이 벌떡 일어나 백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백우는 사나운 여인의 눈빛에도 기죽지 않고 다시 한 번 그녀를 쏘아붙였다.
“무슨 뜻은 무슨 뜻! 바보야, 네가 랑이를 남자로서 인식했다는 뜻이잖아!”
“남자로서라니? 설마 내가 랑이를 좋아하게 됐다는 뜻이야?”
“그걸 꼭 내가 말로 해야 하냐? 으휴, 어쩜 이리 자기 자신의 일엔 둔한지, 남 일이라면 그리 눈치가 빠르면서.”
“…….”
말이 없었다.
백우의 답변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자인영은 신형을 앉히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문득 자인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아. 아니, 네 말대로 나 랑이를 좋아하게 됐나 봐.”
“하아. 진짜 바보구나, 너.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건데?”
“뭐? 음, 글쎄……. 어쩌고 자시고, 이제 겨우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뭘 하긴 좀 그렇잖아? 당분간은 그냥 내 마음을 지켜봐야지. 그리고 정말, 정말 랑이를 많이 좋아하게 된다면, 그땐……. 헤헤,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다.”
백우의 말대로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의 모습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져 자인영이 신형을 일으켰다. 떠나려는 여인의 모습에 백우 역시 몸을 일으켰으나 그런 그의 행동을 자인영이 웃으며 저지했다.
“됐어. 바래다 줄 필요는 없어. 좀 취하긴 했지만 집에 못갈 정도는 아니거든. 참, 그리고 오늘 고마웠어. 역시 너한테 얘기하러 오길 잘한 것 같아.”
“…….”
말없이 바라봤다.
웃고 선 여인 자인영을 백우가 말없이 바라보니, 그녀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다시 한 번 작별의 말을 전했다.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오냐오냐, 밤길에 똥통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장난은 장난으로.
입가에 미소를 띤 백우의 말에 자인영은 한 차례 웃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이내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백우는 그녀가 보았던 달을 향해 고개를 들어 보였다.
소녀.
이랑이 아니다.
조막만 한 얼굴에 큰 눈망울의, 마치 인형 같은 소녀의 얼굴을 달 속에서 떠올렸다. 지난 삼 년간 항상 자신의 머리에 박혀 있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린 백우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그녀가 랑이를 좋아한다면 오히려 잘된 거다. 랑이라면 그녀를 불행하게 할 리는 없을 테니. 하긴 그것도 랑이가 그녀의 마음에 화답했을 때야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복잡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는 것 같았다.
그 복잡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내가 주먹을 쥔 채 소리쳤다.
“에이, 모르겠다, 모르겠어! 지금은 우선 그 녀석의 발뒤꿈치를 쫓는 것만 생각하자! 내일부터는 무조건 수련, 수련, 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