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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7화)
第六章 여심남심(女心男心)(4)
달빛 아래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밤은 깊었건만, 이랑은 오늘 접어든 심경의 힘을 시험하려는 듯 떨리는 검세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검세를 받아들이는 초유랑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늦은 밤.
잠을 자기 전, 마무리 수련을 하던 자신을 이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오직 단 한마디, 비무를 하자는 그의 요청에 초유랑은 거절치 못하고 검을 들었다.
실력으론 아직 백우를 앞선다.
그러나 자인영보단 못한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이랑이 찾은 이유를 초유랑 또한 알고 있었다. 음공을 사용하는 자인영과는 직접 검을 맞대고 대결을 펼칠 수 없기에 자신을 찾은 것이다.
‘도련님을 실망시켜 드릴 순 없지.’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이랑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초유랑은 힘든 와중에도 우수에 내기를 모아 힘껏 검을 떨쳐 냈다. 그러나 순간순간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는 초유랑의 검세를 이랑은 무리 없이 받아 냈고,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점점 지쳐 가던 초유랑은 기어이 일 각 만에 자신의 검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길다면 길다 할 수 있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든 걸 펼치고 검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은 초유랑이 웃으며 이랑을 바라봤다. 졌다는 패배감보단 아직도 여유가 넘치는 이랑의 모습에서 오히려 기쁨을 느낀 것이다.
작은 산.
눈앞에 있는 이랑은 자신이 올려다보는 작은 산이다. 또한 그 산은 지금도 성장 중이며, 그 성장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동경의 대상인 이랑이 점점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수록 그것을 쫓는 초유랑의 힘 역시 점차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은 아니기에.
비록 이랑이 동경의 대상이라 하나 초유랑은 그저 바라만 보지 않고 그와 같은 선에 서고자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그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이랑과 검을 마주한 채 일 각이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랑이 강해지면 자신 역시 강해진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초유랑은 이랑의 성장을 자신의 성장인 양 기뻐하며 환하게 미소를 그릴 수 있었다.
第七章 천마비동(天魔秘洞)(1)
투두둑.
방울방울 쏟아지는 빗줄기가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는 흥겹기만 했다. 그 흥겨운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여인의 몸짓이 아름다워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또한 두 손을 높이 들어 춤을 추는 여인의 손목에는 금으로 된 방울 팔찌가 차여 있어,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동작에 맞춰 듣기 좋은 소리를 흘려 냈다.
딸랑∼
여인의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고, 열정적인 몸짓과 더불어 경쾌한 방울 소리로 마무리를 지은 그녀는 회관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향해 대례를 올려 보였다.
“소녀 자인영, 오늘 할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주신 어르신들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린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환갑상이 펼쳐진 회관에 앉아 그녀의 음과 춤을 감상하던 많은 이들은 여인의 다소곳한 인사에 화답하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쏟아 냈다.
“대단해, 대단해!”
“하하하! 자 장로, 이거 정말 대단한 손녀를 두신 것 같소!”
“그러게나 말이외다. 이 늙은 것이 나이도 잊고 저 아이의 춤사위에 흠뻑 취해 들 정도였으니…….”
“허, 자네는 춤에만 빠져 들었나? 쯧쯧, 자 장로의 손녀라면 당연 음이니, 저 아이가 내는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야지.”
“과찬이오, 과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칭찬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티격태격 부딪치기도 많이 했지만, 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손녀가 사랑스러워서였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좋은 놈 뺨 한 대 더 때린다고, 결코 내가 편하자고 그 애를 이용했던 것도 아니고, 결코 괴롭히는 재미가 있어 놀려 먹은 건 더더욱 아니지.’
스스로 변명을 달며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손녀를 바라보니, 축하주를 따르기 위해 온 자인영의 눈빛이 매서워 자천광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러냐?”
“어머, 제가 뭘요? 그보다 정말 감사드려요.”
“허허, 감사는 무슨. 네가 감사할 게 무어 있다고?”
“감사하죠. 폐관수련 중이던 저를 억지로 끌어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게 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어요.”
“……!”
뜨끔, 가슴 한 곳이 저렸다.
실제로 자인영은 일 년 전부터 사환마곡(死喚魔曲)을 위한 폐관 중이었으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수련동(修練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억지로 끌어낸 것이 바로 자천광이었다.
“얘, 얘야, 그건…….”
“후훗, 농담이에요, 농담. 할아버지의 환갑잔치에 손녀가 빠진다는 게 말이 되나요?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야죠.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축하한다는 말씀도 못 드렸네요. 할아버지, 정말 축하드려요.”
“인영아…….”
곤란해 하는 자신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해 주는 손녀가 이리도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자천광이 일어나 직접 안아 주려 하니, 자인영은 과분한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그럼 축하주와 축하 인사, 축하 공연까지 모두 끝냈으니, 전 이제 그만 가 볼게요.”
“엥? 가, 가다니, 이제 시작인데 대체 어딜 간단 말이냐?!”
공허한 외침만이 웃으며 떠나는 손녀의 뒤를 따랐다.
행여나 자신이 붙잡을까 두려워 빠르게 사라지는 자인영의 모습에 자천광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그의 아쉬움을 풀어 주려는 듯 어느새 회관 중심엔 외손자인 초유랑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한 자루 검을 단전 부근에서 하늘을 향해 곧추세운 채, 검병 밑동을 좌수로 받치고 선 사내의 등장에 일순 장내에서 여인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유약해 보이는 몸과는 달리 신중한 얼굴을 한 초유랑의 모습은 강과 유가 멋들어지게 조화돼 젊은 여인들의 함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 여인들의 함성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듯 검에 모든 시선을 집중한 초유랑이 월영검법의 기수식인 월하만화(月下滿花)를 시작으로 한바탕 검무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자천광은 올해로 열일곱이 된 외손자의 멋진 검무에 자인영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연신 즐거움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장로님!”
회관을 빠져나와 대나무로 만든 우산을 펼쳐 들던 자인영은 맞은편 소로에서 걸어 나오는 노백의 모습에 반가움에 찬 말을 전했다.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자인영의 외침에 늦게나마 회관을 찾았던 노백 역시 반갑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허허, 무공 수련을 위해 일 년 전 폐관에 들었다 들었건만, 벌써 대성키라도 한 것이냐?”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장로님이 더욱 잘 아시잖아요. 그보다 우는요? 백우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나요?”
“쯧쯧, 말도 마라. 이 년 전 갑자기 무슨 놈의 발끝인지 뭔지 잡기 전에는 절대 안 나온다며 폐관에 들더니, 여태껏 깜깜무소식이다.”
“…….”
쓸쓸해 보였다.
이 년 전, 이랑의 뒤를 쫓기 위해 홀로 폐관에 든 백우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한 노백은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 그런 노백을 위로하기 위해, 자인영이 활짝 웃으며 확신에 찬 말을 전했다.
“걱정 마세요. 우가 폐관에서 나오는 날, 그 자신이 각오한 만큼의 결과를 장로님께 보여 드릴 테니.”
***
쏴아아아!
잠시 옅어졌던 빗줄기가 다시 힘찬 물줄기를 쏟아 냈다.
검게 물든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이 강하게 대지에 부딪쳐 사방으로 비산하니, 그 빗물을 위아래로 맞고 선 사내는 온몸이 젖은 채 침묵을 지켰다.
“…….”
문득 그 침묵 속에서 비에 젖은 머리칼이 답답한 듯 한 차례 머리를 쓸어 넘긴 사내는 유난히 검게 잠겨 든 눈동자를 들어 보였다.
흑진주와도 같은, 보고 있으면 점점 더 두 눈에 담긴 어둠 속으로 빨려 들 것만 같은 신비로운 사내의 눈동자는 그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탁 트인 공터에 선 채, 비에 젖은 흑의 무복과는 반대로 백색의 검집을 허리에 찬 사내 이랑의 침묵에 빗소리마저 잦아드는 듯했다.
고요.
고요함이 깔리기 시작한 장내는 그 시간마저 정지된 듯 느껴졌으며, 그 속에서 이랑은 천천히 빙혼을 빼 들었다.
스르르릉.
맑은 검명(劍鳴)이 백색 검집에서 흘러 퍼지며, 이내 차디찬 기운을 내포한 빙혼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병에 조각된 백룡의 두 눈에선 푸른빛이 일고, 그 빛에 의해 서늘한 한기를 발하기 시작한 빙혼을 이랑은 자신이 바라보던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세워 보였다.
파아앗!
한 줄기 기음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 흘러 퍼진 푸른빛에 의해 쏟아지던 빛줄기는 일순 얼음으로 화하고 말았다. 오직 이랑을 향해 퍼붓던 빗줄기만이 우박으로 변해 그의 육신을 공격한 것은 순간이었으며, 그 짧은 순간 빙혼의 힘을 거둬들인 이랑의 검에선 푸른빛이 아닌 검게 물든 암흑이 일기 시작했다.
싸아아아.
바람이었다.
아지랑이처럼 일기 시작한 검은 기운은 이내 바람이 되어 검과 함께 이랑의 육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조금의 틈조차 허용치 않는다는 듯, 그의 육신을 완벽히 덮은 검은빛은 곧 연속해 쏟아져 내리는 우박을 막아 보였다.
암흑천신(暗黑天身).
천마검식의 제팔식인 암흑천신을 이용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우박을 막은 이랑은 이내 검 속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안개처럼 흘러 퍼진 검은 기운을 하나의 완연한 형태로 만들어 보였다.
검강(劍|).
형경에 든 자만이 만들 수 있는 검강을 검신에 담은 이랑이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중의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랑의 두 눈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파앗!
돌아가는 검신을 따라 수십의 검영(劍影)을 그려 내던 빙혼이 일순 이랑의 손을 떠나 암천을 향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강의 기운이 머문 채 강한 회전과 더불어 솟아오른 빙혼에 의해 그 검신을 따라 그려졌던 수십의 검영 역시 덩달아 하늘로 향했으나 그뿐.
까마득한 허공 위로 날아오른 검영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검에 머물렀던 강의 기운 역시 내기를 주입하던 이랑의 손을 떠나자 이내 소멸되며 빙혼이 갖고 있던 본연의 모습만을 드러냈다.
파밧!
힘이 다해 떨어져 내리는 빙혼을 이랑이 비은사를 풀어 낚아챈 후, 다시금 자신의 우수에 쥐어 봤다. 가볍게 한 팔을 휘저어 빙혼을 회수한 이랑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패다.
또다시 실패하고 만 것이다.
형경에 들어 천마검식의 전반 팔식인 암흑천신을 완벽히 펼칠 수 있게 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이랑은 마지막 구식인 천마강림(天魔降臨)을 완성코자 했으나, 검식 자체가 진경에 든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것이기에 요 일 년간 전혀 진척을 보지 못한 것이다.
‘천마강림은 내 손에서 검이 벗어난다 해도 그 검에 물든 강의 기운이 소멸되지 않게 해야만 펼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마음먹기에 따라 강의 기운을 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경지인 진경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진경에 들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곧 천마검식의 전반식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또한 후반 삼식이 기록되어 있는 천마비동에 들 자격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랑 또한 알기에 지난 일 년간 진경에 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엔 오히려 다급함만 늘어 갔다.
그것은 초조.
진척이 없는 자신에 대한 초조함이었다.
그 감정을 빗속에 홀로 선 채 문득 깨달은 이랑이 놀라 스스로에게 물었다.
‘초조해 한다고, 내가?’
그러고 보니 요새 들어 여유란 게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속에 텅 빈 공백이 들어차 그 공백을 메우고자 그를 더욱더 무공에 매달리게 만든 것이다. 또한 그 매달림이 무공에 진척이 없는 자신과 어우러져 초조함을 불러일으키니, 이랑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감정에 당황하여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대체 왜?’
묻고 또 물었다.
대체 지금의 감정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이다.
초조함의 근원인 공백의 원인을 찾아 고민하나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더 이상의 진척 역시 없음을 알기에 이랑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침묵했다.
그렇게 있기를 얼마.
문득 이랑의 시선이 자신의 마음과 같이 텅 빈 공터로 향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이랑은 그 속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질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혼자란 자신을…….
“혼자?”
혼자다.
언제나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세 남녀가 사라진 지금, 이랑은 혼자였다.
그러고 보니 세 명이 자신의 곁을 떠난 지 이 년 정도 된 것 같았다. 처음엔 한 사내가, 그리고 그 사내가 떠난 후 다른 두 명의 발길도 점차 뜸해지더니, 일 년 후 여인과 또 한 사내마저 자신의 곁을 떠났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 마음속에 텅 빈 공간이 생긴 것은.
“내가 이처럼 나약한 존재였던가?”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언제나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말없이 사라진 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공백이 생긴 탓일 것이다. 그 마음의 공백을 메우고자 무공에 매진했으리라. 무공에 매진해 그들의 존재를 잊고자 한 자신의 마음이 초조함을 만들었을 뿐이다.
“굳이 잊을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