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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8화)
第七章 천마비동(天魔秘洞)(2)
없다.
애써 그들의 존재를 잊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모습을 감췄지만,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는 그들이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웃어 주리란 확신이 더 강했다.
그것은 느낌.
말 그대로 단순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 속에서 이랑은 비로소 친구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당연한,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 느껴지는 당연한 존재가 바로 친구인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잊을 필요는 없겠지.”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속 공백의 원인을 찾아낸 이랑은 너무도 쉽게 그 공백이 메워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초조함 역시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초조함이 사라진 편안한 마음으로 이랑이 다시 검을 바라봤다.
그는 검을 바라보며 자신이 찾은 해답을 그 검 속에서 재현코자 했다.
우우웅!
사내의 의지에 따라 검이 울며 또다시 검신엔 검은빛의 검강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이랑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저 완연한 형태를 띤 검강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당연한 것을 느끼고자 했다.
강을 만들어 낸 기운.
자신의 단전에서 뻗어 나온 기운을 이랑은 느끼고자 했다.
또한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 낸 무척이나 당연한 느낌을 다시 한 번 머리가 아닌 마음에 새겼다.
“잊을 필요는 없다.”
아니, 잊힐 리가 없었다.
손에서 검이 떠난다 해도 검에 물든 기운을, 그 기운을 만들어 낸 느낌은 잊힐 리가 없었다.
웅, 웅, 웅……. 파앗!
순간, 그의 손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검이 다시 한 번 암천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검이 회전하며 만들어 낸 검영과 더불어 솟구쳐 오른 검을 바라보며 이랑은 우수를 뻗었다.
마치 허공을 격해 검을 쥐듯 우수를 뻗은 이랑은 검 속에 맺힌 기운을 느끼고자 했다.
너무도 당연해서 잊었던, 자신의 몸 안에 깃든 기운과 같은 유(類)의 기운을 검 속에서 느끼고자 하니, 곧 검에 맺힌 기운이 화답하듯 한 줄기 기성을 토했다.
우우웅!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울부짖듯 한 줄기 기음을 토해 낸 검은 여전히 검은빛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다. 검에 맺힌 강의 기운과 자신의 내부에 깃든 내기가 허공을 격해 하나 됨을 느끼며, 이랑은 순간적으로 우수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았다. 그런 그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에서 맹렬히 회전하던 검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히니, 이내 그 검을 따라 그려졌던 원형의 검영 역시 지상으로 향했다.
가운데에 선 이랑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쏟아져 내린 검은 빛줄기는 이내 빙혼을 무리 없이 손에 쥔 이랑의 주위로 연속된 폭음을 불러일으켰다.
콰과과과과광!
땅이 파이며 천지가 진동했다.
빙혼이 그려 낸 수십의 빛줄기가 강의 기운을 그대로 담은 채 지상 위로 함께한 파괴의 흔적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 전율 속에서 오직 홀로 살아 숨 쉬고 선 이랑은 그저 깊게 잠겨 든 눈으로 빙혼을 다시 검집에 꽂아 넣을 뿐이었다.
천마강림을.
진경에 들었다는 기쁨조차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이랑은 이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몸을 돌려세웠다.
이학이 기다리고 있을 천마각을 향해.
철퍽.
문득 나아가던 걸음이 멈췄다.
공터를 지나 천마각을 향하던 이랑은 걸음을 멈춘 채, 마주 보이는 단풍나무 아래로 우산을 받치고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길게 땋은 흑발을 가슴 위로 늘어뜨린 채 양손으로 우산을 들고 선 백의 여인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인영.
일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가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머금고 이랑에게 향하니, 이랑 역시 그 미소를 따라 하듯 흐릿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
뜻밖이었다.
설마하니 이랑이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줄 거란 생각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입가엔 옅은 미소마저 그려져, 그 미소와 더불어 전해진 사내의 말은 일순 자인영을 혼란케 만들었다.
‘변했어.’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 역시 일 년 전과는 뚜렷한 차이를 두니, 여인은 그 변화된 모습에 적응치 못한 채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달라졌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아.”
“그런가? 그럴지도…….”
스스로 생각해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친근감이 그의 내부에서 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감정이 조금 전 자신이 깨달은 친구란 존재와 연관이 있음을 이랑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음, 정말 변했구나. 예전엔 내 말에 대꾸조차 잘 해 주지 않았는데.”
“나는 나다.”
“……?”
문득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굳어 든 얼굴로 이랑이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자인영이 알지 못해 바라보니, 이랑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답을 전해 줬다.
“설사 내가 네 말대로 많이 변했다 해도 어디까지나 나는 나다. 내가 나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의미를 깨달은 자인영이 다시 웃으며 이랑을 마주했다.
“그러네. 후훗, 어디까지나 랑이는 랑이이니까……. 참, 그보다 무공은 어때? 지금도 수련하고 오는 길이지? 진척 좀 있어?”
이미 노백한테서 이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자인영이었다.
오늘도 진척이 없는 무공을 수련코자 숲의 공터를 찾았다는 그의 말에 이리 찾아왔건만, 이랑은 그런 그녀의 걱정과는 다른 한마디 말로써 화답해 주었다.
“진경에 들었다.”
“정말? 그럼!”
기쁨도 잠시, 여인의 얼굴이 굳어 들었다.
진경에 들었다는 건 이랑이 천마비동에 들 자격을 얻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인 삼 년이 지나면, 그는 역대 천마들이 그러했듯 중원을 향한 도행을 시작할 것이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 나갈 백팔마귀의 후손들과 함께.
“하하. 뭐야, 이거. 너무 이르잖아.”
“…….”
빨랐다.
확실히 이랑의 진보는 다른 그 어떤 누구보다도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기재라 칭송받던 이학조차 스물여섯이 되어 천마비동에 들 수 있었으며, 그의 나이 스물아홉에 도행을 시작한 것이다. 젊은 날의 이학마저 뛰어넘은 이랑의 빠른 진보는 자인영을 당혹하게 했으나 그것은 이랑에게 있어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자소청이 남겨 준 설혼심결의 기운이 천마심공과의 상승효과를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야월이 전해 준 기연 역시 그의 빠른 진보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인영으로선 그저 당황한 채 힘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조금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정할 수 있는 시간이.
그러나 이랑은 그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대론 랑이와 함께 도행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아.’
다음 대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을 자와 함께 도행을 시작하는 백팔마귀의 후손들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천마궁의 주춧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백팔 명의 젊은이들을 일컫는 흑풍대(黑風隊)의 대주와 부대주, 여섯 개 조의 각 조장들은 후에 십이원로에 올라 당대의 천마와 더불어 천마궁을 관리할 확률이 높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각 가문에선 천마도행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젊은 가솔들을 모아 놓고 서로 간의 실력을 비교케 했다. 도행을 따라갈 수 있는 자는 가문에서 오직 하나뿐이기에 그 심사는 자연 엄격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인영 역시 형제들과 사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겨야만 비로소 이랑을 따라 중원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론 안 돼.’
요 일 년간 진척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년 전부터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랑을 한 남자로서 인식한 다음부터 그녀는 무공에 집중을 할 수 없었으며, 그런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잊고자 일 년 전 폐관에 들었다. 하나 세상과 단절된 수련동 안에서조차 쉽사리 이랑의 생각을 떨치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무공에 별 진척을 보지 못한 것이다.
“후우…….”
긴 한숨과 더불어 각오를 다졌다.
이대로 가다간 이랑과 함께 중원에 나갈 수조차 없음을 깨달은 자인영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말없이 선 이랑을 바라보았다.
“날 어떻게 생각하지?”
“…….”
직접적인 말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을 꺼내 든 자인영의 두 눈엔 긴장이 감돌았다. 우산을 든 손에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고, 심장은 터질 듯 방망이질치나 여인의 애타는 마음과는 상관없이 사내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저 고요히 잠겨 든 눈을 들어 애써 태연을 유지하고 있는 자인영을 잠시 바라보던 이랑은 엉뚱하게도 답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이지?”
“……!”
정말로 몰라서 묻는 듯했다.
그녀가 갑작스레 던진 질문의 뜻을 정말로 알지 못하기에 이랑이 솔직히 물어 오니, 자인영은 일순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바보.’
누가 바보인지 모르겠다.
그 좋은 머리 써먹지도 못한 채 아무 계획 없이 마음을 고백한 자신이 바보인지, 아니면 힘든 고백의 뜻조차 알아주지 않는 이랑이 바보인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저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이랑의 한마디에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각오하고 고백한 거다. 그의 답이 어떤 것이 되었든 받아들여야 한다.’
이대로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자인영은 이랑의 질문에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방금 전보단 편한 눈빛으로 이랑을 바라보며 자인영이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널 좋아해. 친구가 아닌 한 남자로서. 그러니 확실히 답해 줬으면 좋겠어. 넌 날 어떻게 생각하지?”
“…….”
조금 전보단 알기 쉬운 말이었다.
여인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자인영의 고백에 이랑은 잠시 생각했다.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
그 의미를 머리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론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랑은 그것을 알기 위해 여인과 보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 속에서 친구로서가 아닌 다른 감정이 있었던가를 찾아봤다. 한참을 눈앞에 선 여인을 바라보며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던 이랑이 문득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보였다.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후훗, 역시 그렇구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이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이랑은 무공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만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란 존재가 친구 이상이 될 수 없음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대로 어정쩡한 마음을 유지한 채 무공을 익힐 순 없기에 스스로 결론을 짓고 싶었다.
“아아, 하지만 좀 섭섭한걸. 널 잡았으면, 장차 내가 천마궁의 안주인이 되어 백우 녀석을 실컷 부려 먹는 건데.”
“…….”
홀가분함과 실망감이란 상반된 마음을 한마디 농으로 숨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랑의 입은 열려 무언가 말을 전할 듯했으나 결국 다시 닫혀 침묵만을 지켰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그건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일.’
자인영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봤다면,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한 사내가 있었음을. 이랑은 지난 과거를 회상하던 중, 항상 그녀를 바라보던 한 사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내에 대한 존재를 자인영에게 알려 주지 않는 것이 낫다 판단한 이랑은 다시금 멈췄던 걸음을 떼어 보였다.
그녀의 볼일이 끝났음을 안 이랑의 걸음은 천천히 여인을 스쳐 지나가고, 그런 그를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바라보던 자인영이 속삭이듯 한마디를 전했다.
“우린 여전히 친구지?”
“앞으로도.”
영원이란 말은 쓰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도 친구란 이랑의 답에 자인영은 만족한 듯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이걸로.’
이걸로 된 것이다.
자신을 거절한 이랑의 마음에 미련을 두고 싶진 않았다. 그 미련이 친구란 관계조차 무너트리고 말 거란 사실을 알기에 오히려 시원하게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였다.
아직 마음 한편은 쓰리지만, 그 쓰림도 시간이 가면 사라지리라.
“천마각으로 갈 거지? 바래다 줄게. 어차피 또 폐관에 들면 당분간은 못 만날 테니까.”
실연의 아픔을 오히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며 자인영이 이랑의 옆으로 다가섰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준 후, 나란히 걷기 시작한 자인영의 입에선 미소가 떠날 줄 몰랐고, 그 미소와 더불어 전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랑은 그저 묵묵히 들어 주었다.
***
여인은 떠나고, 사내만이 남았다.
다시 폐관에 들기 위해 떠나는 여인의 뒷모습을 천마각 입구에서 바라보던 이랑은 이내 말없이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 그의 눈으론 우중충한 날씨 탓에 햇빛조차 들지 않은 긴 복도의 어둠이 비쳐 들었다.
그 어둠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이랑은 뚜벅뚜벅 텅 빈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더욱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걸어가던 이랑의 귀로 문득 자신과는 다른 류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가 정면에서 들려왔다. 그 발걸음 소리에 이랑은 걸음을 멈춘 채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이청.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이청은 사이한 분위기를 흘리는 혈포 노인을 대동한 채 걸어오다 이랑을 발견하곤 그 자신 역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사마대제(邪魔大帝)의 후손 염관이 도련님을 뵙습니다.”
깡마른 체구에 유난히 붉은 눈동자를 가진 혈포 노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의 인사는 빳빳이 세워진 허리와 더불어 입가엔 옅은 조소마저 걸려 오히려 이랑에겐 거만함으로 비쳐 들었다.
사령마군(死靈魔君) 염관.
십이원로 중 하나이자 사공(邪功)을 주로 쓰는 마령대(魔靈隊)의 대주이기도 했던 염관은 이청의 생모인 염원화의 친부였다. 이청에겐 외할아버지가 되는 염관의 거만한 인사에 이랑은 단지 눈살만을 살짝 찌푸렸을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이학의 그늘 아래 있는 그로선 천마의 명만을 따르는 염관의 형식적인 인사에도 무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위상으론 그가 이랑보다 위에 있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듣자 하니 요새 도련님의 무도(武道)가 큰 바위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한다 하더군요.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 건 아닌지…….”
“…….”
침묵한 이랑을 걱정하듯 말을 흘리는 염관의 눈동자가 더욱더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요괴를 보는 듯했으며, 이내 그 빛은 이랑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
붉게 소용돌이치는 눈동자로 이랑을 직시한 채 염관은 계속해 부드러운 말을 흘려보냈다.
“허허, 이 염관, 장차 천마궁을 이끌어 나가실 도련님의 흉보를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어 진척이 없는 거라면, 신경 쓰지 마시고 허심탄회하게 이 노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도련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민 따윈 없다.”
“……?!”
문득 침묵하던 이랑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힘을 주어 한 자 한 자 내뱉는 이랑의 답에 염관은 흠칫 놀란 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이랑은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상대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랑은 오히려 강하게 나가며 상대를 압박해 들어간 것이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신비롭게도 검은빛이 일렁이기 시작해 염관의 이마 위로 식은땀을 자아냈다.
사륜혼백공(邪淪魂魄功).
영혼마저 제압해 들어가는 사륜혼백공은 비단 상대의 이지를 빼앗을 뿐 아니라 역으로 상대가 펼치는 사공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힘 역시 갖고 있었다. 이랑은 염관이 자신에게 무언가 사악한 술법을 펼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야월이 전해 주었던 사륜혼백공을 펼쳐 그 사술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혼공(消魂功)이 통하질 않다니?’
상대의 넋을 빼앗는 소혼공을 펼쳐 이랑의 실력을 확인코자 했던 염관은 아예 소혼공 자체가 통하지 않는단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자신의 이지가 이랑의 눈빛에 현혹될 듯하자, 염관은 팔성의 내기를 끌어올려 그의 사공에 대항하며 어색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고민이 없다니 잘된 일이로군요.”
“…….”
말없이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오는 이랑의 모습에 염관은 눈살을 찌푸린 채 길을 비켜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옆을 당당히 지나가며 이랑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곧 비동에 들 것이다.”
“……?!”
“……!”
염관뿐만이 아니었다.
무심히 흘러나온 이랑의 한마디에 그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키던 이청의 눈으로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이랑이 비동에 든다는 것은 곧 이청 자신에겐 비동에 들 기회조차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을 자 오직 하나뿐이며, 그 하나를 위해 천마의 후손들은 먼저 진경에 오른 자만이 천마비동에 들어 초대 천마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나머지 형제들은 비동에 들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반쪽짜리 무공만을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이청은 분노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감정에 빠져 한바탕 웃어 보였다.
“후훗, 후하하하하! 결국 이리되고 마는가? 난 결국 네놈의 뒤에서 네놈의 그림자만을 바라봐야만 하는가?!”
“…….”
답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동생의 물음에도 이랑은 답하지 않은 채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묵묵히 앞만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 이랑의 행동은 그가 지금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다. 그 어떤 말도 이청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랑은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었다.
앞을 향해 걸어가라.
그 끝이 무엇이 되었든 앞을 향해 걸어가라는 이랑의 침묵 어린 조언을 이청은 이해하지 못한 채 노려봤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 이청은 힘껏 두 주먹을 움켜쥐어 봤다. 그런 그의 곁으론 어느새 염관이 다가와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 주니, 이청은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아비를 대신해 항상 자신을 지켜봐 주는 염관을 바라보았다.
“틀렸어요. 랑이 놈이 비동에 든 이상, 아버지는 이제 내 존재마저 잊게 될 거예요.”
“후훗,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단다. 설사 네 형이 비동에 들어 도행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꼭 그 도행에서 성공해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는단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
도행을 실패한다는 것.
그것은 곧 이청에게 기회가 돌아옴을 뜻했다.
도행에 실패한 자는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으며, 그 다음 후계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이청 또한 알고 있으나 염관의 말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어요.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역대 그 누구도 천마도행에서 실패한 이가 없다는 걸.”
“…….”
침울해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마저 사라진 채 우울해 하는 그의 모습에 염관의 눈동자가 다시금 붉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붉게 소용돌이치는 두 눈으로 이청을 바라보며 염관은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나 성공했다고 그 아이마저 성공하란 법은 없다, 흐흐흐. 암, 그렇고말고. 그러니 넌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우선 진경에 드는 일에만 전념하거라. 언젠가 너에게 찾아올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도.”
꼭두각시 인형처럼 염관의 말을 따라 했다.
흐릿한 눈빛으로 변한 채 자신의 말을 따라 하는 이청을 바라보며 염관은 더욱더 짙은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