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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19화)
第七章 천마비동(天魔秘洞)(3)
붉은 용단이 깔린 서재 안은 사방 벽면으로 자리한 책장 안 가득 서책이 꽂혀 퀴퀴한 냄새를 흘려 냈다. 조금은 답답한, 오직 책만이 가득 찬 서재의 책상엔 학사풍의 사내가 앉아, 읽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찾아온 사내.
흑의 사내를 바라보는 이학의 시선에 사내 이랑은 말없이 천마심공의 내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그의 단전에서 솟아오른 내기는 혈을 타고 자연스레 외부로 뿜어져 나와 이내 이랑의 육신을 덮어 보였다.
호신강기(護身|氣).
진경에 든 자만이 펼칠 수 있는 호신강기로써 이랑은 자신의 힘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몸 주위를 맴돌던 검은빛의 기운을 거둬들인 이랑은 다시금 드러난 세상 속에서 침묵한 이학을 바라보았다.
“…….”
“…….”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 거북한 듯 이학은 두 눈을 감아 보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내리감은 이학을 이랑은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같이 말없이 바라봤고, 그 기다림에 화답하듯 얼마 후 이학이 다시금 두 눈을 떠 보였다.
시종일관 아무 말도 않는 이랑을,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들을 바라보던 이학은 오직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각오는?”
“되었습니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이학은 침묵하고, 이랑은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뒤로 홀로 남은 이학은 이내 이랑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무도 없는 서재 안으로 말을 흘려보냈다.
“뇌왕(雷王).”
텅 빈 서재 안을 울리는 이학의 명에 이랑이 사라졌던 문을 통해 한 사내가 홀연히 들어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천마대의 정복(正服)인 백색 무복에 백색 죽립, 하얀 천으로 얼굴마저 가린 사내 뇌왕은 그저 가만히 시립한 채 이학의 다음 말만을 기다렸다.
이학은 항상 자신의 곁에서 호위하던 천마대 대주(隊主) 뇌왕을 바라보며 힘이 깃든 어조를 내뱉었다.
“모두에게 알려라, 랑이가 내일 천마비동에 들 것임을.”
***
평화롭게 흘러가던 시간은 막을 내렸다.
이학의 입을 통해 전해진 뇌왕의 말은 곧 백팔 가문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린 것이다.
앞으로 삼 년 후, 천마비동에서 이랑이 나오기 열흘 전에 흑풍대의 대주와 부대주, 각 조의 조장을 뽑는 비무 대회가 천마궁에서 펼쳐진다. 벌써부터 그 비무 대회를 준비하는 백팔 가문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을 채찍질해야만 했다. 흑풍대의 주요직을 차지하느냐 못하느냐가 곧 미래에 다가올 가문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삼 년 후 펼쳐질 비무 대회에서 이겨 주요직을 차지한다면, 그 가문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힘이 있는 가문에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그 밑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엄연히 힘의 법칙이 존재하는 천마궁.
그 힘의 법칙에서 승리코자 백팔 가문은 더욱더 자신들의 후손들을 채찍질하고, 젊은 무인들은 먼저 가문의 대표를 목표로 혹독한 수련을 견뎌 냈다.
철퍽.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 했건만, 여전히 하늘은 우울한 기색을 드러내 젖은 대지를 흑의 사내에게 선물했다. 질퍽거리는 대지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내는 오직 한 곳, 천마궁 뒤로 펼쳐진 절벽의 동굴 입구만을 바라보았다.
“…….”
수십 장 높이의 절벽.
그 아래로 자리한 동굴 입구론 백의 죽립 사내들이 서서 다가오는 흑의 사내를 노려보니, 사내는 걸음을 멈춘 채 그들을 마주한다. 하나같이 똑같은 복색을 갖춘 죽립 괴한들은 흑의 사내가 멈춰 서자, 서로 다른 자신들의 애병을 뽑아 들었다.
검(劍)을 사용하는 자부터 편(鞭)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무기를 뽑아 든 열 명의 죽립 사내는 이구동성으로 오직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증명을!”
순간.
스르르릉.
맑은 검명과 함께 흑의 사내가 가진 검이 흐릿한 햇살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을 머금은 차디찬 검신은 이내 죽립 사내들과 일정 거리를 둔 채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파앗!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검은 용음을 토하고, 그 한 줄기 기음과 더불어 일어난 수십의 검영은 다시금 아래로 향하는 검을 따라 환상처럼 대지 위로 꽂혀 들었다.
콰과과과광!
천마강림.
천마검식의 전반 마지막 식인 천마강림을 흑의 사내가 무리 없이 펼쳐 내자, 천마비동을 수호하던 열 명의 죽립 괴한은 말없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다.
십월영(十月影).
정예라 일컬어지는 천마대에서도 그 개개인의 실력을 인정받아 특별히 천마비동만을 수호하란 명을 받은 사내들이었다. 천마대 대주인 뇌왕과 겨룬다 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열 명의 사내는 자신의 힘을 증명한 흑의 사내를 향해 길을 내주고, 그 열린 길을 통해 사내 이랑은 천천히 동굴 안 어둠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앞으로 삼 년.
삼 년이란 정해진 시간을 지금 들어가고 있는 동굴 안에서 보내야만 한다. 세상과는 격리된 채 그 속에서 삼 년간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지는 이랑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백팔 가문의 후손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시켜 주기 위해 주어진 삼 년을 끝내면, 그 속에서 무엇을 얻었든 이랑은 비동을 나와 도행을 시작해야만 한다. 설사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해도 그는 중원을 향해 발을 디뎌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건 이제 시작일 뿐.’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다섯 살 때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던 각오를 이랑은 지금 천마비동에 들며 새로이 다졌다. 그 각오가 말해 주듯 이제부터 시작이기에. 그는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길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말없이 허리 숙인 십월영을 뒤로한 채.
第八章 삼 년(三年)(1)
“주군, 십월영으로부터 도련님께서 비동에 드셨단 보고가 있었습니다.”
“…….”
뇌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전음성만이 이학의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귀를 간질이듯 흘러든 뇌왕의 전음을 들으며 이학은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앞으로 십 년, 아니 어쩌면 오 년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빠르게 성장한 아들이다. 그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갖게 될 날 역시 그리 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새로운 천마가 탄생하는 날이 될 것이다.
***
어둡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누구든 눈뜬장님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어둠보다 짙은 어둠을 두 눈에 간직한 이랑은 내기가 감도는 눈을 들어 거침없이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저벅…….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문득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깊은 어둠 속을 떠돌던 이랑은 정면에서 비쳐 드는 그 희미한 빛에 짧은 이채를 떠올렸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의 긴 통로를 지나 사람의 손길이 닿아 변화된 곳을 발견한 것이다.
동굴 속의 동굴이라 해야 하는가?
두 개의 철문이 굳게 닫혀 가로막힌 동벽 천장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야광주(夜光珠)가 박혀 외로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또한 그 빛이 사방을 비추니, 이랑은 밝아진 세상 속에서 철문의 중앙에 세로로 새겨진 네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천마비동(天魔秘洞)
단 네 글자만이 새겨진 비동의 입구를 잠시 바라보던 이랑은 이내 양손에 내력을 모아 녹슨 철문을 밀었다.
그그그그긍.
낯선 사내의 손길에 고통스러운 듯 철문이 비명을 토해 냈다. 그 비명 소리와 더불어 좌우로 활짝 열린 철문의 내부에선 한순간 강렬한 빛이 쏘아져 나오니, 이랑은 일순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본래의 시력을 회복한 이랑이 강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비동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의외로 넓은 동굴 안.
그 안쪽으로 형성된 광장으로 몸을 들이민 이랑은 제일 먼저 대낮과도 같은 빛을 내뿜고 있는 원인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비쳐 든 것은 삼십여 장 높이의 돌 천장에 박힌 수많은 야광주였다.
마치 하늘의 별을 옮겨다 놓은 듯, 돌로 된 천장에 박혀 빛을 내뿜고 있는 야광주의 모습은 장관이란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점 동요의 빛없이 그저 담담히 천장을 올려다보던 이랑은 이내 고개를 돌려 원형을 그린 광장 안을 훑어보았다.
서쪽의 벽 틈새를 뚫고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시작으로 줄줄이 흘러내려 움푹 파인 땅엔 못이 형성되고, 그 못을 지나 빙 둘러쳐진 동벽으론 수 개의 동굴이 뚫려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수많은 동굴 중 이랑은 이내 자신이 찾고자 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팔마동(百八魔洞).
백팔마귀의 근본이 있는 곳이었다.
천 년 전, 천마란 이름 앞에 굴복한 백팔 마인은 복종의 증거로 자신들의 절기가 담긴 비급을 초대 천마 이원영에게 바쳤다. 그것은 곧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것과 같았다. 또한 이원영은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백팔 개의 비급을 천마비동 안에 따로 백팔마동을 만들어 그 속에 보관한 것이다.
이랑은 광장 곳곳에 뚫린 수많은 동굴 중 먼저 백팔마동 앞으로 말없이 다가가 섰다. 초대 천마의 절학이 담긴 천마동(天魔洞)도 아닌 백팔마동이야말로 그가 이곳에서 제일 먼저 들어서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천마가 되기 위해선 강한 무공도 필요하지만, 힘 아래 굴복시킨 백팔마귀의 무공을 아는 것도 중요했다. 그 점을 잊지 않은 이원영은 천마비동에 든 후손들은 먼저 백팔마동에 들어 그들의 무공이 담긴 비급을 그대로 베껴 써 내려가도록 지시했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 낡아 버린 비급을 새로이 탈바꿈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하나하나 백팔마귀의 무공을 써 내려가면서 그들이 가진 힘의 장단점을 파악하라는 의미가 더욱 컸다.
비록 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백팔마귀의 후손들도 자신들이 가진 무공의 단점을 보완해 발전시켰지만, 그 근본만은 변하지 않기에 백팔마동에 잠이 든 그들의 무공 비록은 역대 천마들에게 큰 힘이 되어 왔다. 또한 역대 천마 중 몇몇은 백팔마귀의 무공 중 뛰어난 것을 골라 직접 익히기도 했던 것이다.
이랑은 이학에게 들었던 대로 그 자신 역시 백팔마동에 잠들어 있을 비급의 사본을 만들고자 천천히 동굴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