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마도행 1권(20화)
第八章 삼 년(三年)(2)
흰 눈이 내리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흰 눈이 내리고 있다.
동굴 밖으로 소복소복 쌓이는 눈은 비와 함께 시작되었던 여름이 어느새 지나갔음을 알려 줬다. 그 무덥던 여름도 종식을 고하고,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가을이 지나 훌쩍 다가와 버린 겨울의 흰 눈을 적발 사내는 동굴 입구에 앉아 바라보았다.
사방 십 장 정도의 동굴 내부를 뒤로한 채, 입구에 자리한 바위 위에 앉아 바깥의 경치를 감상하는 사내의 몰골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오랫동안 감지 않은 듯 산발한 머리칼과 마구잡이로 자라난 수염은 사내의 얼굴을 가리고, 입고 있던 낡은 의복은 그야말로 구멍이 숭숭 뚫려 차라리 입지 않느니만 못했다.
만약 누가 보았다면 아마도 그를 거지라 동정해 동전 한 푼쯤은 던져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혹여 그자가 동정심을 품기 전 사내의 눈과 마주쳤다면 동전은커녕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들 것이다.
야수와도 같은 눈빛.
지저분한 몰골의 적발 사내는 행색과는 달리 섬뜩한 안광을 갖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내력이 안으로 갈무리되지 못하고 오히려 내기가 충만해진 두 눈을 가진 사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닭고기를 게걸스럽게 씹어 먹었다.
우적, 우적……. 콰드득.
동굴 안을 울리는 소리가 제법 특색 있었다.
사내는 고기만으로 모자랐는지 뼈까지 통째로 씹어 먹은 후, 꺼억 하는 트림과 함께 만족에 찬 미소를 그려 보였다.
“역시 사람은 고기를 먹어 줘야 돼! 크크크, 이거 간만에 특식을 넣어 준 할아범한테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올려야겠는걸.”
포만감에서 오는 만족감이 마음마저 너그럽게 했다.
그 만족감을 안은 채 히죽 미소 지은 백우는 새벽에 몰래 닭고기를 놓고 사라졌을 노백을 떠올려 봤다. 자신의 수련을 방해치 않기 위해 일부러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사라진 할아범이 그립고도 고마웠다.
해가 바뀌어 지난 삼 년간 머물렀던 수련동 안에는 넘쳐 나도록 많은 벽곡단과 가까운 곳에 식수로 쓸 수 있는 샘이 있었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벽곡단 신세에 백우는 염증을 느꼈던 때가 많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노백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일 년에 몇 번 특식을 넣어 주곤 했던 것이다.
그 특식을 직접 불에 구워 먹은 백우는 동벽에 기대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휴우…….”
매일같이 수련, 수련, 수련에만 매달리다 보니 육신보다 오히려 정신이 피폐해져 이렇게 금세 피곤을 느꼈다. 그러나 그 피곤에 언제까지 안주하고 있을 백우가 아니었기에 그는 차가운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켜 수련동 중앙에 가 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금방이라도 피를 뿜어낼 듯한 붉은 도가 쥐어져 있었다. 삼 년 전, 노백이 가보라며 전해 줬던 도(刀)였다.
혈귀(血鬼).
섬뜩한 붉은 도신을 그대로 표현한 혈귀도를 손에 쥔 백우가 잠시 심호흡을 해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파앗!
순간 붉은 도광이 아래서 위로 역인(人) 자를 그리며 피어올랐다 떨어져 내렸다. 떨어졌다 싶은 도신은 이내 회전하는 백우의 몸짓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바닥 위를 스치듯 지나가며 다시금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흐릿한 어둠이 깔린 동굴 안으로 물결치듯 인 붉은 도광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게 변했으며, 그 거친 파도를 함께할 도신 위론 언제부턴가 붉은 아지랑이가 일기 시작했다.
도형(刀形).
일반적으로 강호에선 형(形)을 강(|)의 아래 단계에 둔다.
완연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검이나 도 위로 피어오른 기운을 형이라 하며, 그것은 곧 삼 년 전 이랑이 들었던 심경과 같은 경지이기도 했다. 삼 년의 폐관 끝에 그 경지에 든 백우는 도합 육 년의 세월을 무공에 투자한 데 비해 무림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천무지체란 하늘이 내려 준 신체를 물려받은 백우는 오히려 무공을 익히는 자질 면에선 이랑을 앞선다 할 수 있었다. 다만 그하고는 메우려야 메울 수 없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차이를 메우고자 지난 삼 년간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모두 무공에 전념했던 백우는 삼 년이 지난 지금 그토록 원했던 이랑과 같은 위치에 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가 아니겠지? 삼 년이 지난 지금, 넌 그때보다 더욱더 높은 경지에 있겠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직접 보지 않아도 이랑이 현재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날 때부터 타고난 무골(武骨)이라면 이랑은 스스로 만들어 간 무골(武汨)인 것이다.
아니, 차라리 무골보다는 무공광(武功狂)이란 표현이 옳으리라.
그만큼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 온 이랑을 알기에 백우는 그가 지금 자신이 올라선 경지를 뛰어넘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올라가라! 더욱더 높이! 그래야 내가 널 따라잡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비록 너와 같은 곳에 설 수는 없더라도 널 목표로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네 바로 아래 내가 있게 될 날도 올 테지. 그때야 비로소 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바로 아래 내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이 인자란 증거일 테니.’
일인자가 아니다.
이 인자가 백우의 목표였다.
언젠가 천마란 이름을 물려받은 이랑의 옆에 항상 자신이 있었음 했다. 그의 옆에서 언제까지고 그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지키고 싶었다. 그것은 곧 백우가 이곳에 들어선 이유이며, 또한 그가 그토록 원했던 가족을 갖게 되며 처음으로 다짐했던 각오이기도 했다.
그 각오를 이루기 위해선 이 인자가 되어야만 했다.
천마대 대주.
천마의 곁에 항상 머물며 그를 보필하는 천마대 대주가 바로 백우의 목표이자 꿈이었다.
***
맑은 햇살이 따사로웠다.
푸른 비단을 두른 하늘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 다가온 가을을 알렸고, 그 시원한 가을의 풍경 속에서 하늘과 닮은 푸른 청삼을 입은 사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로 열여덟이 된 사내.
사내 초유랑은 일 년 전 사라진 이랑을 기억하며 그리움에 한숨지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듯 작은 한숨만을 내쉬는 사내의 모습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던 녹의 소녀가 문득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말했다.
“오라버니는 한숨짓는 모습도 예뻐요.”
“뭐?”
예쁘다.
예쁘다는 표현 그대로 대청마루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턱선 위로 긴 속눈썹과 그윽한 눈망울을 가진 사내의 얼굴은 탐스럽게 흘러내린 흑발과 조화를 이뤄 웬만한 여인의 미모를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예쁘단 표현을 들은 초유랑의 얼굴은 찡그려져, 올해 열 살이 된 소녀의 이마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남자한테 예쁘단 말은 쓰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니?”
“흥, 예쁜 걸 예쁘다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요?!”
초유랑의 손길에서 아픔 대신 기분이 상한 소녀가 지지 않고 덤벼들었다. 한 번 심통이 터지면 집안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소녀의 반항에 초유랑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어 보였다.
“그, 그건 그러니까…… 그렇지, 멋지다 하는 거다!”
적당한 표현을 떠올렸는지 초유랑이 벌떡 일어나며 주먹을 콱 쥐어 보였다. 그것은 어린 소녀를 이겼다는 승리감에서 오는 자세였지만, 그런 사내의 승기를 소녀는 한마디 말로써 역전시켜 버렸다.
“오라버니는 멋지지 않아요! 오라버니는 예쁜걸요.”
“뭐? 그, 그럴 수가…….”
한결같은 소녀의 답에 실망한 듯 초유랑은 털썩 주저앉았고, 그런 그를 소녀가 위로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예쁘면 좋은 건데 왜 그렇게 싫어해요? 누가 오라버니를 여자 같다 놀려 대기라도 하나요?”
‘너다!’
외치고 싶은 말을 꾹 참아 냈다.
애써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어린아이 달래듯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소녀의 손길을 조심스레 뿌리쳤다.
“휴우, 지금부터 이 오라비는 검을 연마해야 하니 넌 이제 그만 어머님께 가 보도록 해라.”
“히잉, 소영이랑 놀아 주지 않을 생각인가요?”
초소영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
금실이 유달리 좋은 초씨 부부의 늦둥이로 태어난 소녀의 울먹임에 초유랑은 부드러운 말로써 그녀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너도 알지 않니, 이제 내후년이면 도련님께서 폐관을 끝내고 나오실 거란 걸. 그날을 위해서라도 내겐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단다.”
“피, 멍하니 한숨 쉴 시간은 있고 말이죠.”
샐쭉한 표정으로 톡 쏘아붙인 초소영이 말과는 달리 오라비의 곁에서 떨어져 후원을 향해 달려갔다. 작은 발을 놀려 도도도 달려가는 소녀의 귀여운 뒷모습을 초유랑은 웃는 얼굴로 바라봤고, 그런 그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모퉁이에서 걸음을 멈춘 소녀가 이내 몸을 돌려 베 하고 혀를 내밀어 보였다.
‘이런, 오라비로서의 내 권위가.’
권위고 뭐고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것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어린 동생에게 모질지 못한 그의 마음이 있어, 지금 이렇게 나이 차가 많이 남에도 초소영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도련님께 소영이를 소개시켜 드린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일 테고, 호기심 많은 초소영은 신기한 듯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볼 것이다. 그러고는 아마 자신의 뒤로 숨으리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이랑은 눈썹 하나 까닥 안 할 테니 오히려 기가 죽은 초소영이 자신의 뒤로 도망치듯 숨을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왠지 웃음이 나왔던 초유랑이 봄바람과도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천천히 눈앞에 펼쳐진 넓은 마당 위로 가 섰다.
‘도련님은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그가 올라서 있는 경지가 쉬이 예측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분명 지금의 자신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초유랑은 웃으며 검을 빼어 들었다.
스르르릉.
부드러운 사내의 인상만큼이나 살며시 뽑혀 나온 검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그런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초유랑의 눈빛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한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폐관에 든 다른 세 남녀와는 달리 집 안에 머문 그였지만, 그렇다고 검술을 익힘에 있어 태만을 부리지 않았다. 단지 어둡고 답답한 곳이 싫어 집에 머물렀을 뿐이다.
‘노력이라면.’
다른 세 남녀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의 결과 역시 다른 세 남녀에게 뒤지지 않을 거란 자신은 없었다. 그저 결과를 바라지 않고 앞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었다.
동경의 대상인 이랑을 목표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일보전진(一步前進)만이 있을 뿐이다.
촤아아아!
문득 고요하던 장내로 푸른빛의 검영이 피어올랐다.
환상처럼 피어오른 검광은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보는 이의 넋을 빼앗고, 환(幻)을 위주로 한 월영검법을 막힘없이 펼쳐 내는 사내의 얼굴은 진지해져 굵은 땀방울을 흘려 내기 시작했다.
소녀.
어미가 있을 후원으로 가지 않고 몰래 모퉁이에 숨어 있던 초소영은 저 멀리 보이는 오라비의 검술을 홀린 듯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조금은 멋질지도.’
***
띵∼
일음에 봄 꽃잎은 흔들리고.
띠딩∼
이음에 꽃을 찾아 날아든 나비들은 너울너울 기분 좋게 춤을 춘다. 그러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삼음을 튕겨 내자, 꽃잎은 충격을 받은 듯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나비들은 오히려 놀라 땅에 떨어져 숨을 쉬지 못했다.
사환마곡(死喚魔曲).
죽음을 부르는 마귀의 음이 봄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꽃피우던 대지를 흑빛으로 물들이니, 그 죽음을 불러일으킨 여인은 정작 두 눈을 감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외면한다.
‘사환마곡에서 이르는 사령(死鈴)편과 금음(琴音)편은 익혔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금 눈을 뜨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가 바뀌어 올해 스물하나가 된 여인의 몸은 예전의 청초함은 사라지고 성숙함만이 돋보여 성인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풍겨 냈다. 그 풍성한 매력만큼이나 고혹적인 눈을 가진 여인 자인영은 이내 숲의 공터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려 절벽 아래로 난 동굴을 바라보았다.
천마궁 곳곳에 자리한 수련동 중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남들보다 일 년 앞서 택한 덕에 경치 좋고 수련하기 편한 공터가 있는 좋은 환경을 얻을 수 있었던 자인영은 곧 자신이 지난 삼 년간 머물렀던 동굴 속을 향해 손을 뻗어 보였다.
파앗!
짧은 소음과 더불어 동굴 입구에 놓여 있던 옥소(玉簫)가 여인의 손에 쥐어졌다. 그 옥소를 손에 쥠과 동시에 풀잎 위로 놓여 있던 소금(小琴)을 동굴 안으로 흘려보낸 여인은 이내 허공섭물을 펼치기 위해 풀어놓았던 진기를 거둬들이며 가만히 심호흡을 해 보았다.
“휴우, 이제 일 년이 남았구나.”
일 년이다.
이랑이 비동에서 나오기까지 일 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자인영은 사환마곡에서 이르는 퉁소(洞簫)편을 익혀야 했다. 과연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익힐지는 자인영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시간은 정해져 있고,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보고 싶던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랑뿐만이 아니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수줍음이 가시지 않던 동생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고 싶고, 또한 사 년 동안이나 얼굴 한 번 비쳐 주지 않은 무심한 친구의 그 비싼 낯짝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가만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린 후 만날 순 없었다. 그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남은 일 년이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그 시간을 활용키 위해 자인영은 손에 쥔 옥소를 살며시 열린 입술을 향해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