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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21화)
第八章 삼 년(三年)(3)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빛은 폭염을 불러일으킨다.
그 무더위가 싫어 폭포수에 몸을 담근 적발 사내는 오 년간 더러워졌던 몸을 깨끗이 씻어 내기 위해 무려 한 시진이란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아무리 밀어도 계속 나오는 때를 겨우 정리해 장신의 체구를 물 밖에 드러낸 사내는 곧 폭포수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을 거울삼아 그동안 길렀던 머리칼과 수염을 잘라 냈다.
사각사각 흔들리는 소도(小刀)를 타고 흘러내린 수염은 매끄럽게 변한 사내의 턱을 드러내고, 그 턱을 지나 머리 위로 올라간 소도는 이내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칼이 답답한 듯 짧게 잘라 낸다. 시원스레 잘려 나간 머리칼 아래론 짙은 검미와 서글서글한 눈이 자리해, 호쾌한 사내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좋아.”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든 듯 한 마디 말과 더불어 몸을 일으킨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처음부터 사내의 행동을 지켜보던 적발 노인이 서서 듬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들고 있던 의복을 건네줬다.
붉은 머리칼과 같은 적색 무복을 노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내는 이내 말없이 의복을 걸친 후, 노인의 손에 아직 들려 있는 붉은 도집의 도를 허리 뒤로 차 보였다.
“…….”
강해 보였다.
머리색부터 도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붉은색으로 통일한 사내의 모습은 척 보기에도 강해 보였다. 그 강함이 겉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적발 노인의 마음속으론 흐뭇함이 일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마음속에만 간직된 채 결코 밖으로 표현치 않으니, 곧 노백이라 불리는 적발 노인은 엄숙한 눈으로 자신의 의손 백우를 바라보았다.
한편, 굳은 얼굴을 한 노백의 시선에 백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무릎을 땅 위로 꿇어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산과 같던 사내가 자신 앞에 무릎 꿇음에도 노백은 오히려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짧아진 그의 머리칼 위로 주름 진 손을 올려놓았다.
의식(儀式).
지금 노백은 천마궁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던 의식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우가 더 이상 자신의 그늘 속에 있는 아이가 아닌 한 무사(武士)가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을…….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그 의식을 끝맺기 위해 노백은 엄숙한 말을 흘려보냈다.
“이제부터 너의 명호는 혈영(血影)이다.”

길게 기른 흑발이 부담스러운 듯, 그 끝에서 푸른 수실로 묶은 사내가 고개를 숙인 채 두 눈을 내리감았다. 긴 속눈썹을 자랑하듯 살며시 눈을 감은 사내의 머리 위론 이내 온기가 전해지고, 그 온기와 더불어 그의 귀론 아비 초현의 부드러운 말이 흘러들었다.
“네 명호는 청월(靑月)이다.”
“…….”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별호에 사내 초유랑은 살짝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읽고도 남았을 초현이었으나 변명은커녕 오히려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어 초유랑의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참고로 네 별호는 동생 소영이가 지은 것이다. 예쁜 사람에겐 예쁜 별호가 있어야 한다는 그 아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은 것이니, 가서 고맙다 하거라.”

여인.
여인은 쏟아지는 햇살 속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큰절을 올리듯 고개 숙인 여인의 머리 위론 한 노인의 손이 얹혀지고,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손녀를 대견하단 눈으로 바라보던 자천광은 이내 닫혀 있던 말문을 열어 보였다.
“너의 명호는 사령(死鈴)이다.”
“…….”
여인의 양 손목에 찬 금색 방울 팔찌와 같은 이름이었다.
처음부터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사령과 같은 명호가 마음에 든 듯 여인 자인영은 살포시 미소를 그렸다.

암흑(暗黑).
검은 기운이 광장 안을 뒤덮고 있었다.
검을 대지 위로 꽂아 넣은 채 두 눈을 감고 선 사내.
사내 이랑의 손을 통해 검에서 흘러나온 흑빛 기운은 천장에 박힌 수많은 야광주의 빛마저 집어삼키며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
그 기운의 중심에 선 사내 이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태양마저 집어삼킬 듯 짙은 어둠을 두 눈에서 발하기 시작한 이랑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보였다.
“앞으로 열흘.”

***

둥! 둥! 둥!
광장 안으로 힘찬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을 중심에 형성된 드넓은 광장엔 흑풍대의 서열을 정하기 위한 비무대가 만들어져 있었으며, 그 주위론 구름 같은 인파가 모여들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각 가문을 나타내는 형형색색의 깃발이 꽂힌 비무대 주위가 일순 북소리와 함께 정적에 물들자, 고요해진 비무대 위로 사내 이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신 백팔마귀의 후손들이 천마의 존체를 뵈옵니다!”
수천의 사람들이 한순간 허리 숙여 외쳤다.
그 음성은 진동하는 대지와 더불어 하늘마저 떨쳐 울렸으나 사내 이학만은 오히려 세상을 오시하듯 당당한 눈빛이 되어 허리 숙인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닫혀 있던 입에서 짧은 한 마디를 내뱉으며…….
“시작하라.”
“와아아!”
서두도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그의 한 마디 말에 장내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 속에서 오직 백팔 명의 젊은이들만이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흑풍대.
이번 비무 대회가 끝나면 정식으로 흑풍대란 이름을 물려받고, 전통대로 이랑과 함께 중원으로 나갈 이들이었다. 비무대를 중심으로 각각 오십사 명씩 동(東)과 서(西)로 나뉜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명호를 호명하길 바라며 약속이라도 한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총 팔 일.
팔 일에 걸쳐 펼쳐지는 대결투다.
그 결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대주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한 젊은 남녀 속에는 백우와 초유랑, 자인영 역시 끼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너무도 쉽게 찾아냈다.
동쪽 비무대 끝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은 서로를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그 누구도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단지 미소를 그린 그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이제부턴 적이다.’

***

한여름의 태양빛.
그 빛 속에서 펼쳐진 대회는 오 일째에 접어들며 열기를 더했다. 백팔 명이라는 많은 인원수에도 불구하고 대회 오 일째가 시작되는 날 비무대 위에 설 수 있었던 이는 오직 열네 명뿐이었다. 그중에는 이번 비무 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백우를 비롯해 자인영과 초유랑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까지는 같은 선에 설 수 있었던 그들이다.
그러나 대회 오 일째 서로의 대진표를 받아 든 그들 중 백우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청월(靑月)

초유랑의 명호였다.
지난 오 일간 그의 명호가 불릴 때마다 비무대 아래로 터져 나오는 여인들의 함성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도저히 상대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청월이란 명호가 적힌 종이를 백우는 힘껏 구겨 쥐며 씨익 미소 지었다.
“운 나쁜 녀석이군.”
저 멀리 보이는 초유랑을 향한 말이었다.
그 말 그대로 초유랑에겐 운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펼친 실력을 보아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결승전까지 올라가 부대주 자리 정도는 차지했을 것이다.
“뭐, 마찬가진가?”
지금의 생각, 그 생각을 초유랑 또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서로에게 지지 않겠단 결심을 하고 있었던 두 사내였다. 친분을 넘어 절대 지지 않겠다는, 대주란 자리를 차지해 누구보다 이랑의 곁에 가까이 있겠단 결심을 가진 두 사내 중 먼저 백우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와아아!”
장내에서 세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붉은 무복에 적색 도집을 허리 뒤로 찬 사내의 등장이 모두의 마음속에 열기를 담은 것이다. 그만큼 그가 지금껏 보여 준 대결은 시원함을 넘어 호쾌함을 안겨 줬다.
도저히 외인이라 볼 수 없는 혈영 백우는 날 때부터 무(武)라는 한 글자를 가슴에 새겨야 했던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중도에 천마궁으로 들어왔지만, 그의 도법은 그를 경시하던 자들마저 놀라게 만든 것이다.
한편, 비무대 아래에 선 초유랑은 많은 사람들의 함성 속에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한 백우를 긴장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우의 생각과는 다르게 초유랑은 지금껏 백우가 보여 줬던 도법을 머릿속에 그리며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뒤로는 이번 대회에 들어 처음으로 자인영이 가까이 다가섰으며, 여인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잔뜩 긴장한 그의 어깨를 그녀가 가볍게 쳐 보였다.
“뭐 해? 저 일자무식 놈이 기다리잖아. 설마 벌써부터 겁먹은 건 아니겠지?”
“누나…….”
여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여전히 긴장한 눈으로 자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서 초유랑의 마음을 읽은 자인영이 동생을 꾸짖듯 굳은 얼굴이 되어 물었다.
“뭐야? 너의 삼 년은 모두 헛수고였나 보지?”
“그렇지 않아!”
“…….”
왜일까, 그녀의 말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지난 삼 년간 투자한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초유랑은 자신이 노력한 시간을 비웃듯 던진 자인영의 질문에 난생처음으로 그녀에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런 동생의 반항이 결코 싫지만은 않은 듯, 비로소 자인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초유랑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잘됐네, 헛수고가 아니라니. 그럼 가서 우에게 보여 주라고. 네가 삼 년간 노력한 시간을.”
“……!”
자연스럽게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힘에 못 이겨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막힘이 없었고, 어느새 긴장감이 사라진 초유랑은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누나를 바라봤다.
“고마워.”
짧은 말이었다.
그 짧은 말 속에는 자신의 긴장감을 풀어 준 누나에 대한 감사의 뜻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자인영은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 질문을 던졌다.
“고맙다니, 뭐가? 얘가 또 알 수 없는 소리 하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가. 가서 저놈과 재밌게 놀다 오라고.”
모른 척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어서 가라는 그녀의 손짓보다 재밌게 놀다 오라는 말에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놀다 오라니…….’
대결이 아니다.
놀다 오라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전히 비무대 위로 따분한 표정이 되어 선 백우를 바라보던 초유랑은 한 줄기 미소를 그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놀다 올게.”

“꺄아아!”
사뭇 달랐다.
반대편 비무대 위에서 청의 사내가 등장하자, 백우 자신과는 다르게 여인들의 함성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 사실이 못마땅했던 백우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자신과 마주 선 사내를 노려보니, 오히려 초유랑은 웃는 얼굴로 검을 빼어 들었다.
스르릉.
“지지 않겠어요.”
“……?!”
여유가 있기에 웃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초유랑은 자신과의 대결을 즐기려 하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때처럼…….
초유랑은 서로 검과 도를 맞댄 채 웃으며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던 그때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백우 역시 허리춤의 도를 빼어 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스으윽.
“못 본 사이에 많이 건방져졌어.”
가벼운 농으로써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아닌 검과 도를 장난감 삼아 놀던 친구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 말에 초유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의 검을 수직으로 세워 가슴 위로 끌어올리며 짧은 답을 전했다.
“갈게요.”
파앗!
한 마디 말과 더불어 대지를 박찼다.
한순간 검과 하나되어 날아드는 초유랑의 모습에 백우는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자신의 도를 비스듬히 흘려 내렸다.
다가드는 초유랑의 검을 받기 위해.
촤아아!
순간 허공 위론 검광이 피어오르고, 검을 받기 위해 도를 흘려 내렸던 백우의 눈으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환상처럼 피어오른 검광은 순식간에 백우의 전신을 뒤덮으며 어느 것이 허이고, 어느 것이 실인지 구분조차 못하게 만든 것이다. 그 수많은 검광이 함께할 환상적 아름다움에 취한 듯, 일순 백우의 신형이 흔들렸다. 흔들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초유랑의 검세에서 벗어나 우측으로 돌아가며, 손에 있던 도는 비어 있는 초유랑의 허리를 베어 들어갔다.
깡!
“……?!”
빠르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초유랑이 순식간에 검의 방향만을 바꿔, 옆에서 덮쳐드는 백우의 도를 막았다. 그 빠른 변화에 백우가 놀랄 사이도 없이 차디찬 검날은 그대로 붉은 도신을 타고 미끄러져 도병을 쥔 백우의 손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파앗!
힘껏 검신을 뿌리쳤다.
손에 내력을 모아 검날을 허공 높이 날리듯 쳐올린 백우는 이내 비무대 바닥을 박차 초유랑과 간격을 둔 채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향해 초유랑이 다시 검을 고쳐 잡고 덮쳐드니, 오히려 백우는 기다렸다는 듯 마주 달려가며 혈천도법상의 혈류만해(血流萬海)를 펼쳐 보였다.
백우의 손에서 인 붉은 도광은 일순 거대한 파도가 되어 초유랑을 덮쳐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