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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행 1권(23화)
第九章 출관(出關)(2)


투두둑.
빗방울이 점차 거세졌다.
그 거칠어진 빗물을 고스란히 맞고 선 여인은 맞은편에 선 사내를 바라보며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탐욕스런 눈길.
화려한 금포를 걸친 서른 초반의 사내는 뱀과 같은 집요한 눈길로 빗물에 젖어 드러난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끈적끈적한 그의 시선에 짜증이 일었던 자인영이었으나 그런 그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염관의 친손 염하충은 얄팍한 미소를 입가에 띠어 보였다.
“흐흐, 모름지기 계집이란 침실에서 그 빛을 발하는 법. 어떠냐? 네가 내 침실에 들어와 준다면야 내 너에게 일부러 져 줄 마음도 있건만.”
“…….”
음흉한 속셈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노골적인 말에 화를 내야 마땅한 자인영이었으나 오히려 그녀는 염하충을 유혹하듯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였다.
“어머, 그 말 진심이신가요?”
“……?!”
뜻밖이었다.
자신의 말에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녀가 오히려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지만 의심보다는 몸 안의 욕정이 더욱 컸기에 은근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물론 진심이고말고. 그깟 대주 자리가 어디 너만 하겠느냐? 흐흐, 너만 내 침실에 들어오겠단 약조를 해 준다면 내 지금 당장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겠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 했어요.”
“물론이지.”
“좋아요!”
시원시원하다.
도저히 여자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게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그녀의 약조에 염하충은 기꺼운 마음이 되어 내력을 모아 소리쳤다.
“나 사마군자(邪魔君子) 염하충, 사령 자인영에게 패했음을 시인하오!”
“…….”
‘나 참, 사마에 웬 군자? 아무튼 멍청한 놈이 별호도 멍청한 걸 달고 다닌다니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 냈다.
그런 그녀의 귀로는 내일 있을 준결승의 마지막 승자를 가리는 대결을 목 놓아 기다리던 사람들의 야유 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비까지 맞아 가며 애써 기다렸건만, 그 기다림을 염하충은 보란 듯이 배신한 것이다. 그러나 욕설까지 섞인 분노한 사람들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염하충은 조금 있음 펼쳐질 황홀경만을 떠올린 채 음흉한 눈길로 자인영을 바라보았다.
“흐흐, 그럼 오늘의 대결도 모두 끝이 났으니, 그만 가도록 할까.”
“어머, 어딜 가자는 말씀인가요?”
“……!”
너무도 능청스런 자인영의 태도에 오히려 염하충의 눈으론 어이없는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분노한 염하충의 입에선 자인영을 향한 거침없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네년이 감히 나와의 약조를 어기겠다는 것이냐?!”
“하아, 약조라니? 그건 또 뭔 소린가요?”
“그걸 몰라서 묻느냐? 방금 네년이 나와 함께 내 방으로 가겠다 약조하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죠?”
“이년, 끝까지 시치미를 뗄 셈이냐! 분명 좋다고.”
“그래요, 좋다고요. 그래서요?”
“……!”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단지 좋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 말을 염하충 자신이 멋대로 해석해 패배를 자인했을 뿐이다.
“이, 이 계집년이 날 속였구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드려요. 덕분에 힘 하나 안 들이고 준결승전에 올라가게 됐으니.”
흥분한 염하충을 오히려 자인영이 약 올리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 그녀의 손바닥 위론 금이 들려, 자인영은 자연스럽게 일곱 개의 현 중 하나를 살짝 잡아 보였다.
“감히 날 속이다니, 네년을 죽여 버리겠다아아!”
이미 예상한 대로 흥분한 염하충이 괴성과 함께 덤벼들었다. 빗속을 뚫고 달려오는 염하충의 빠른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등 뒤에선 그의 거센 장력이 느껴졌으나 자인영은 전혀 당황치 않고 쥐고 있던 현을 튕겨 보였다.
띵.
“컥?!”
단 일음이다.
그녀가 튕겨 낸 단 일음에 등 뒤에서 느껴지던 장력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단지 염하충의 단말마 비명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일음사(一音死).
사환마곡의 금음 편에 수록된 일음사로 염하충의 내부를 뒤흔든 자인영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 비무대 아래로 향했다.
처음부터 단지 말재주로 그를 이길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그를 흥분시킨 것이다. 흥분한 그의 내부로 파고든 일음사는 그녀의 계획대로 너무도 쉽게 염하충이 잔뜩 끌어올린 내기를 역으로 뒤흔들었다. 또한 흥분한 채 아무런 방비도 않고 덮쳐들던 그는 그녀의 계획대로 역류하는 내기를 억제치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만약 자인영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전력을 다해 일음사를 펼쳤다면, 지금쯤 염하충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지.’
정식 비무에선 살인을 금했다.
그러나 비무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죽일 수 있다. 또한 그 법도대로 비무가 끝난 직후 자신을 죽이기 위해 덮쳐든 염하충이었기에 자인영은 그를 죽일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
하나 정말로 그를 죽였다간 오히려 분란만 일어날 것이다.
가뜩이나 염관과 자천광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그 둘 사이에 기름을 붓는 격인 염하충을 죽인다면, 당장은 문제가 없더라도 차후 뒤탈이 생길 것이다.
‘하긴, 뒤탈은 저자를 살려 둬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그 격이 달랐다.
염관이 끼어드는 것과 염하충 혼자 자신에게 이를 가는 것은 그 힘의 격차가 크며, 염하충 정도는 자인영 스스로 막아 낼 수 있었다.
“내일을 위해서 힘을 아낀 것인가?”
“……?!”
문득 비무대 아래로 내려서던 여인의 귀로 한 사내의 말이 흘러들었다.
서무영.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내 서무영의 질문에 자인영은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런 의미도 있지. 저자를 제대로 상대했다간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피곤해질 테니까.”
“…….”
준준결승까지 올라온 염하충이었다.
그 본 실력 또한 결코 낮다 할 수 없었으며, 그런 그를 최소한의 힘으로 꺾은 자인영은 서무영의 질문에 긍정의 뜻을 전했다. 한편 서무영은 미소 띤 여인의 얼굴을 나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짤막한 말을 던졌다.
“아쉽군.”
“……?”
“너와의 대결이 하루 미뤄지게 되다니…….”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품 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내일의 상대가 적힌 대진표를 꺼내 든 서무영의 모습에 자인영의 입가로 그려져 있던 미소는 딱딱하게 굳어 들어야만 했다.

혈영(血影)

백우의 명호다.
어제 서무영이 예측한 대로 그는 백우와 내일 대결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자인영의 얼굴이 굳어 드니, 서무영은 입을 다문 그녀를 대신하듯 특유의 저음을 흘려 냈다.
“그와는 친구라 들었다. 가서 전해 주겠나? 폐인이 되고 싶지 않다면 기권을 하라고. 나 역시 모레 있을 너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긴 싫으니 말이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자신감이다.
여전히 나른한 눈빛 속으로 감추어진 사내의 자신감을 자인영이 읽어 냈다. 그것이 못내 못마땅한 자인영이었으나 무어라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가 지금껏 보여 준 무위는 그가 가진 자신감만큼이나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눌러 왔던 것이다.
“그럼 모레 있을 너와의 대결, 기대하도록 하지.”
“…….”
오직 자신만을 의식했다.
백우를 의식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분하면서도 백우에 대한 걱정이 자인영의 마음속에서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안해. 대체 왜? 설마 내가 우를 믿지 못하는 걸까?’
멀어져 가는 서무영의 뒷모습을 자인영이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으론 지금껏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백우.
붉은 머리칼을 가진 강한 인상의 사내를 떠올린 자인영은 이내 시합을 먼저 끝내고 집으로 향했을 백우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

쏴아아아!
퍼붓는 빗줄기 속의 풍경은 그림과 같았다.
그 그림 같은 풍경 속에 홀로 선 여인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자장가 삼아 대청마루에 누워 잠을 청하는 사내를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있을 서무영과의 대결, 기권했으면 좋겠어.”
“뭐?”
퍼붓는 빗줄기 속에 선 여인의 첫마디였다.
대청마루에 누워 시원한 빗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던 백우는 난데없이 자신을 찾아와 던진 여인의 말에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빗속에 선 여인의 창백해진 얼굴에선 진지한 눈빛만이 전해져, 결국 백우는 안색을 굳힌 채 누워 있던 신형을 앉혀야만 했다.
“지금 그 말…… 날 믿지 못한다는 건가?”
“아니. 이건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냐. 비록 네가 상상도 못할 경지에 올랐다지만, 상대는 나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서무영이라고. 게다가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철저히 짓밟는 놈이란 말이야.”
“호오, 넌 그자를 상대할 수 있지만 난 안 된다는 얘기군. 후훗, 웬일로 찾아왔나 했더니, 결국 자기 자랑이나 하러 온 거였군.”
“……?!”
비뚤어져 있었다.
자신의 걱정 어린 말을 받는 백우의 태도는 분명 비아냥거림이었으나 그 말에 자인영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안색을 굳힌 채 흘러나온 백우의 말.
그 말은 그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게 아닌데.’
단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너무 자신감에 찬 서무영의 태도에 백우가 걱정이 되어 그를 찾아왔을 뿐이다. 비록 그가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된 건가,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
설사 아무도 백우를 믿지 않는다 해도 자신만은 믿어 줬어야 했다.
그것이 친구인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래, 나만은 우를 믿어 줬어야 해.’
지금 자신의 행동이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자, 왠지 허탈해졌다. 허탈감과 더불어 쓴 미소가 자인영의 입가로 걸리니,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온 백우가 여인의 마음을 위로하듯 어깨를 툭 쳐 보였다.
“알아,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 확실히 서무영 그자는 강해. 하지만 말이지…….”
“…….”
잠시 말을 끊었다.
여인이 빗물에 젖은 눈을 사내를 들어 바라보니, 사내는 그런 여인의 시선에 화답하듯 한 줄기 미소를 그려 보였다.
“조금은…… 그래, 너만은 나를 조금 더 믿어 줬으면 좋겠어.”
“……!”
입가로 그려진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여인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평상시의 짓궂은 미소가 아닌 입가로 살짝 그려진 부드러운 사내의 미소에 자인영 역시 웃어 보였다.
마치 사내의 미소를 따라 하듯.
그녀의 마음속엔 어느새 불안감은 사라진 채 편안함만이 존재하니, 자연스레 그녀의 입은 열려 사내가 원하던 답을 전했다.
“믿어. 지금은.”
“…….”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었다.
여인의 한마디 말은 사내가 갖고 있던 작은 불안감마저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내일 있을 시합.
서무영과의 시합을 기다리고 있는 백우의 마음속에 작은 불안마저 없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 그 자신 역시 서무영이란 사내가 가진 힘을 보았기에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쉽지 않은 상대였기에 작은 불안이 마음속에 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불안감을 여인의 한마디 말이 사라지게 만드니, 백우는 오히려 그 사실을 감춘 채 장난스런 눈빛이 되어 여인을 놀렸다.
“호오, 믿는다는 사람이 여기까지 온 거야? 이런, 두 번 믿어 줬다간 날 꽁꽁 묶어 놓고 아예 시합장에도 못 나가게 하겠는걸.”
“바보, 지금은이라고 했잖아!”
비를 맞은 탓일까?
다른 날과는 다르게 창백해진 뺨 위로 떠오른 그녀의 홍조가 유독 귀엽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던 백우는 문득 생각난 듯, 흥분한 자인영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바보 씨는 어찌 되셨나? 내가 없는 사이에 랑이와는 조금 진척이 있으셨나 모르겠네.”
“차였어, 삼 년 전에.”
“……?!”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여인의 답이었다.
그러나 그 답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게 흘러들었다. 여인의 입가로 그려져 있는 미소조차도 사내에겐 슬프게 비쳐 드니, 결국 백우는 자신이 던진 말을 후회해야만 했다.
“미안…….”
“괜찮아. 어차피 예상하고 고백한 건데, 뭐. 후훗, 어쨌든 지금은 모두 떨쳐 버렸으니까 너무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
웃으며 몸을 돌렸다.
볼일이 끝난 지금.
다시 경쟁 상대로 돌아가려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우가 문득 그녀를 불렀다.
“난 말이지, 널 처음 봤을 때 인형 같다고 생각했어. 네가 랑이를 인형 같다 했지만,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인형같이 예뻤어.”
“……!”
철퍽.
걸음이 멈추었다.
빗속을 나아가던 여인은 느닷없는 말을 던진 사내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렇게 일부러 아부까지 떨면서 위로해 줄 필요 없어. 내 걱정하지 말고, 내일 있을 네 시합 걱정이나 하라고.”
“…….”
가볍게 손을 흔들며 던진 그녀의 말에 사내의 입가론 쓴 미소가 그려졌다. 무슨 답이 들려올까 잔뜩 긴장되었던 마음을 너무도 허무히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어쩜 저리 자신의 일에 둔할까? 애써 힘들게 고백했건만, 그 뜻조차 몰라줄 줄이야…….’
고백이었다.
지금 백우의 말은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갑작스런 고백이었다.
비록 그 상대를 이랑과 빗대기는 했지만, 지금의 말 속엔 처음 만남의 순간부터 자인영을 좋아했던 자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자인영은 알아주지 않은 채 웃으며 사라졌다.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빗속에 남아 바라보던 백우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자신 역시 몸을 돌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