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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0화)
part 2. 만남(2)


‘진짜 답이 없군. 이 상태로라면 수도에 가서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그나마 마루탑이 멀쩡한 것을 보면 수도는 나은 환경이겠지. 그래 봤자 수도 바로 근처에 있던 다리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도 구조대도 못 보내고 수습도 못하는 상황인 것 같고. 수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인가.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낫겠지만.’
텅 빈 통조림통을 강에서 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끊긴 이상, 길을 멀리 돌아가야 했다. 강이 좁아지는 상류로 가서 건너는 방법도 있지만 전에 봤던 하류의 상류 쪽에 있던 괴물을 보니 위로 올라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류의 강을 계속 따라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이 강은 수도를 통과하여 지나는 강이니 강만 따라간다면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는 도중에 다리가 몇 개 더 있으니 운 좋으면 무너지지 않은 강을 만나 건널 수 있을지도 모르고.
깨끗하게 씻은 통조림에서 손이 베일 수도 있는 위험한 뚜껑 부분을 따낸 그는 그것을 가방 안에 넣었다. 수도로 가는 길이 예상보다 길어진 만큼, 쓸 만한 거라면 버리지 않고 지니고 있어야 했다.
얇은 철로 된 둥근 통조림통이라면 컵, 그릇 등으로 다양하게 쓸 수 있다. 떠나기 전에 철제 컵을 챙기긴 했으나 그릇으로 닮을 수 있는 용기는 몇 개 더 있어도 좋았다.
‘좋아, 그럼 슬슬 출발할까.’
천으로 두르기까지 한 각목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잃어 버리는 바람에 무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무기로 쓸 만한 나뭇가지가 없나 살폈으나 적당한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가능한 강 근처에서 움직이고 여차하면 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어제 밤 동안 마른 옷을 챙겨 배낭에 넣은 후, 배낭을 등에 메고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강을 따라 걷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다른 길로 갈 수는 없었다. 무기의 유무는 미루더라도 겉모습만큼은 안전한 곳으로 보이는 강가를 벗어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이었고, 숲으로 들어가면 괴물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다면 바로 멈추고, 혹시라도 숲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다. 도중에 강가의 모래밭을 걷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약간 옆으로 움직여 풀밭인 곳으로 바꿔 걷는 것을 빼고는 딱히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움직이는 거라고는 작게 울음소리를 내는 벌레들과 가끔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바람결에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물뿐이었다.
‘동물은 안 다니는 건가?’
보통 동물들도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물가에 있는다고 들었다. 아니, 동물들은 그들이 먹는 먹이에서 수분을 섭취할 수 있어서 특별히 많은 양의 물은 필요 없다고 했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았다.
만약 그가 기억하는 내용이 맞는다면 동물들이 강가에 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까. 그는 불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식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그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그저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로 흔히 취급받는 동물에 대한 약간의 습성을 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그가 깨어났던, 그가 살았던 도시처럼 완벽한 정적에 휩싸인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마음을 놓았다. 완벽한 정적은 더 위험하다고 들었기에 긴장했었다. 이곳은 벌레도 있고 새도 날아다닌다. 강에는 송사리들마저 있었기에 특별히 위험한 곳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긴장을 풀면 안 되지.’
그는 자연 특유의 적막함에 어우러져 자꾸 긴장이 풀려 버리자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는 애써 벌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부근에서 만난 뿔이 달렸던 괴물을 떠올리며 긴장이 유지되도록 노력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는 세상.
주의해서 걸어서 그런지 속도도 느리고 피곤했어도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동물 발자국은 안 보여. 하기야 풀밭이니까 선명히 발자국이나 흔적이 남지는 않겠지. 모래밭이라면 모를까.’
고개를 돌려 모래밭을 봤다. 흔적이 잘 남는다고 생각했던 모래밭이라도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라서 그런지 동물이든 사람이든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생의 한계일지도.’
그 생각을 하자 그는 어쩐지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비정상적으로 강해진 신체 능력이 있다고 해도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한 그가 끝까지 무사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아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을 때도 그렇지만 비관적으로 생각이 빠지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해야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기분 자체가 가라앉아 버리니 낙천적이게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위험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댔다. 정오에 다다라서야 잠이 깬 것을 보면 분명 잠은 푹 잤지만 이상하게 쉽게 피로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참을 걷고 뛰어도 느끼지 못한, 왠지 수렁 같은 기분 나쁜 피로감.
거기까지 자각한 그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진단하려고 노력하며 스스로의 상태를 살폈다.
최근 먹은 것 중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
통조림과 생수. 나중에 가면 영양 불균형으로 몸에 이상이 올지도 모르지만, 어제 최소 하루 정도 정신을 잃었었다고 해도 깨어난 지 이삼 일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그럴 리는 없었다.
괴물에 물렸을 때 감염된 병원균 같은 것이 있던 걸까? 하지만 상처가 빨리 나아 가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근육통도 없는 것을 보면 몸에 무리가 간 행동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육체가 멀쩡하다면 남은 것은 정신.
‘정신 쪽 문제는 아는 것이 없는데. 내가 지금 위험한 상태인가? 정신 쪽으로? 모르겠어. 정신병이라고 해 봤자 우울증, 조울증 정도밖에 모르는데. 그것도 겉핥기로 조금만 알고.’
몸에 힘이 빠졌다. 나무에 기대고 있던 몸이 저절로 미끄러지며 나무 밑에 앉은 자세가 됐다.
‘그래, 확실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몰라. 갑자기 세상이 이상하게 변한 상태에서 깨어나고, 시체도 보고, 죽을 위기도 넘기고 싸우고……. 게다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지금까지 한 명도 못 만났…….’
“아.”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지. 당연히 한 삼 일 동안 대화 한마디도 못했고.’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친구도 많은 편에 속했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꽤나 좋았던 그는 말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지 않은 것은 지금이 난생처음. 가족 모두가 밝은 성격이었기에 가족끼리 대화도 많아서 집에서도 항상 많은 말을 했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혼자서 집을 볼 때의 서너 시간 정도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으면 정서 장애가 생긴다는 얘기는 들어봤었다. 누가 그랬더라.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처음 얼마 간은 버티더라도 혼자서 몇 개월간,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된다면 결국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버티지 못하고 미쳐 버릴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대화를 안 하는 것이 뭐 대수인가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외로워.’
왜 감옥에서 독방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수감자들이 심하면 미치거나 독방이라는 말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고독.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시체뿐이다.
‘난 사람과 만나고 싶었던 거야.’
이 상황에 대해서 공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다쳤을 때 걱정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서로를 격려해서 함께 노력할 사람이 필요했다. 피곤할 때 돌봐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두렵고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 대다수일 거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람을 원하면…….’
“진짜… 힘들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은 한탄을 입 밖으로 꺼내며 그는 눈을 감았다. 기분 탓인지 지끈거리는 두통까지 느껴졌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나무에 기댔다. 뺨을 간질이며 다정하게 지나가는 물기를 머금은 바람도 그의 기분을 풀어 주지는 못했다.
“후우. 안 되겠네.”
한숨과 함께 눈을 뜬 그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가로 걸어갔다. 세수라도 해야 이 우울한 상태가 조금 가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가에 간 그는 쭈그려 앉아 손을 뻗어 물을 찰박거렸다. 세수하려고 다가왔는데 막상 물에 손을 집어넣으니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아무 의미 없이 손으로 물장난을 쳤다.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무섭지도 않은지 그가 손장난을 하는 손으로 다가오는 송사리들에 그는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송사리들은 슬금슬금 헤엄쳐 다가오더니 그의 손가락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거렸다. 그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키득거렸다.
“풋. 간지러워.”
세수는 비록 하지 않았지만 송사리들 덕분에 한층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주인공이 무인도에 떨어져서 혼자 살게 되고, 고독에 미치기 직전까지 가지만 새끼 늑대를 발견하고 키움으로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동물이랑 같이 되면 치료할 수 있나……? 어쨌든 송사리랑 노는 것으로 기분이 괜찮아졌으니, 앞으로도 피곤해지면 이래야 되겠다. 그렇다면 정신적으로 여전히 지쳐 있어도 최소한 미치지는 않겠지.’
부드러운 시선으로 물가에서 놀고 있는 송사리들을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걸을 때였다.
그는 다시 풀밭으로 가서 걷기 위해서 모래밭을 지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신발을 벗고 양말마저 벗어 버렸다.
‘분명히 맨 발로 모래를 걸어도 기분이 나아진다고 했지? 여긴 사람이 없어서 유리병 조각도 없고, 돌도 없는 고운 모래니까…….’
모래를 맨 발로 밟는 것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발가락 사이로 사락거리며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살짝 웃었다. 확실히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거리며 빠져나가는 것은 어쩐지 기분을 좋게 했다.
한 손에 신발을 들고 그는 활기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깨어난 이후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절로 기분이 풀리고 좋아하는 노래의 음이 흥얼거리며 흘러나왔다.
‘아, 맞다. 긴장 놓으면 안 되지.’
아까는 기분이 우울했는데 송사리와 놀고 맨발로 모래를 걸으면서 이번에는 기분이 너무 상승되었다.
‘기분이 좋아졌다고 그런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다니.’
그는 반성하며 도로 양말과 신발을 신었다. 주변을 경계하는 것까지 잊어 먹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으니 한동안은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수렁 같은 피로감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서서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았다고 해도 경계를 자연스럽게 풀어 버릴 정도로 여기는 정말 안전한 곳으로 보였다.
위험한 짐승 울음소리도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그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고, 모래밭에서도 여전히 짐승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 정말 안전한 곳인가?’
확실히 변종 동물이 곳곳에서 나타났다고 신문에 나왔긴 했고, 그 수도 상당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곳에 변종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가 정신을 잃을 상태에서 강에 있어도 무사하고 지금까지도 일반 동물이나 변종 동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확실히 안전 지역일지도 몰라. 하지만 왜? 솔직히 여긴 물도 있고 물고기도 있고 주변에 풀도 있어. 초식이든 육식이든 살기 좋은 곳 아닌가?’
인간이 살기 좋은 곳이라면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 장소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문제가 있다는 뜻.
‘왠지 자꾸 경계가 풀어지지만… 안 돼, 안 돼.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해. 이곳, 안전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수상한 느낌이야.’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홱홱 돌리며 그는 눈을 똑바로 떴다. 그리고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걷기 힘든 모래밭에서 벗어나 도로 풀밭으로 갈까 싶었지만 풀밭은 아무래도 강가랑 멀었다. 지금은 무기도 없는 상태다. 위험한 동물이 오면 강으로 뛰어들 생각이었으니 조금 걷기 힘들더라도 차라리 모래밭에서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잘못 판단한 것은 짚어서 다시 생각해야 해.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니까. 실수가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문제까지 가니까 조심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