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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1화)
part 2. 만남(3)
긴장을 풀고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 물로 도망칠 생각을 했으면서도 걷기 조금 힘들다는 이유로 물과 거리가 먼 곳에서 걸은 것. 만약에 또 괴물이 습격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지도 몰랐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졌다고 해도 날카로운 뿔이나 이빨이 급소가 다친다면 그 누구든 죽게 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는 푸른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변할 때가 돼서야 걸음을 멈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이만 걸을까? 어두워지면 움직이기도 불편하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한 그는 적당히 편하게 누울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에는 나무에 기대 풀밭에서 잤지만 이번에는 모래밭에서 자야 했다. 여차하면 물로 바로 뛰어들 수 있게.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하얀 모래밭 사이에서 검은 부분을 발견했다.
‘저 부분만 검잖아? 저건… 재?!’
그는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모래에 섞여져 있긴 했어도 분명히 무언가를 태운 흔적이었다.
‘사람이 있어. 이건 사람이 불을 지핀 흔적이야!’
태우기 좋은 마른 나무를 많이 찾지는 못했는지 다른 것도 함께 태운 모양이었다. 그는 그을린 종이 쪼가리를 보며 자세히 살폈다. 종이는 심하게 그을려 있어서 글자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남아 있는 종이 쪼가리 전부를 모아서 전체를 보자 태워진 책의 정체를 잘 알 수 있었다. 바로 지난 몇 개월간 지겹게 그가 보고 또 봤던 책.
‘이건 교과서잖아?’
그것도 그와 같은 학년의 교과서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정말 그와 같은 나이의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없다. 종이는 생각보다 쓸모가 많으니 어디선가 주운 교과서를 가지고 있다가 태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와 같은 나이의 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혼자인 걸까? 아, 아니겠다. 이 근처에는 풀이랑 모래밖에 없으니 숲으로 가서 마른 나무를 찾았을 텐데, 혼자서 숲으로 나무를 찾으러 들어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어. 괴물도 있고 위험한걸. 틀림없이 여러 명일 거야.’
여러 명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금방 나왔다.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고 모래밭을 자세히 살펴보자 신발 자국 여러 개를 발견 할 수 있던 것이다.
전에는 그저 모래가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쌓인 것으로 보였지만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다시 보니 이제는 신발 자국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기 힘드네. 모닥불을 피운 것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보면 네, 다섯 명 같은데.’
나름대로 추측을 했지만 그것도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날씨가 별로 춥지 않으니 모닥불을 크게 피울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작게 피운 것일 수도 있다. 종이까지 같이 태운 것을 보아 그냥 장작 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그는 차갑게 식은 검은 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에 검댕이가 묻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이 있는 거야.’
사실 조금 불안을 느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사람이라고는 시체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상태에서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고독 말고도 다른 깊은 불안이 존재했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지금 그의 불안은 말끔히 씻겼다. 비록 범죄자일 수도 있는 안심할 수 없는 상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여긴 꽤 바람이 부는 곳인데 종이 쪼가리는 대부분 남아 있어. 재가 묻어서 무거워졌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길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거야.’
그는 기대와 기쁨, 경계심과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아마도 불을 지폈던 사람들이 갔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이 도중에 마음을 바꿔 수도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만나게 될 것이다. 남아 있는 흔적을 보건데 아마 그 사람들과 그와의 거리는 약 하루 이틀 정도고 많이 차이나 봤자 대략 삼 일.
사람이 있다.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쩌면 하루 이틀의 거리도 아닐지도 몰랐다. 반나절 정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 중에 자신이 아는 사람이, 혹은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안 돼.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무작정 기뻐하면 안 돼. 사람을 보더라도 안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 할 때까지 만나는 것은 보류라고 결정했었잖아. 위험한 사람들일 수도 있어. 너무 기뻐하면 실망만 커져.’
괜히 크게 기대를 했다가 범죄자 혹은 살인자들이라면 실망감에 스스로만 괴로워질 뿐이다.
‘함부로 만나면 안 돼. 그렇다고 아예 만나지 않을 수도 없어. 지금 만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사람을 만나게 될 수 있을지 몰라. 지금이 아니면… 며칠, 몇 달을 사람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만나기는 해야 했다. 만나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정확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해야 되겠어.’
그는 보랏빛과 남빛이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하늘을 힐끗 쳐다보았다. 해는 지평선의 마지막 끄트머리에서 최후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깊이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밤이 다가온 것이다.
밤이 되었지만 그는 이동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밤에 그들을 만나는 편이 그쪽에서 먼저 알아차리지 못할 확률이 더 높으니 좋았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복잡해진 마음으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은 채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한다면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될 뿐이다.
차라리 몸을 움직여 잡생각을 줄이는 것이 나았다.
그들은 모래밭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모래밭에는 모습을 감출 곳이 없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풀밭이 있는 외곽 쪽으로 몸을 숨겨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정말로 안전하든지 무언가 숨겨진 위험이 있든지 둘 중 하나겠지. 그리고 둘 중 무엇이 답이든 주위에 괴물이 없다는 결론은 같아. 외곽으로 간다고 해도 괴물 걱정은 그다지 없을 거야.’
그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모래밭을 벗어났다.
벗어나고도 숲 쪽으로 십 미터 쯤 더 걸어간 후 수도 방향으로 약간 빠른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직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을 테니 달릴까도 싶었지만, 달리는 것에 집중하다가 혹여 괴물이 나타날 경우 위험하니 관두기로 했다.
숲은 생각처럼 어둡지는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듯 달빛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찌르르 거리는 벌레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고요한 숲과 은빛의 달. 그는 문득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달을 쳐다보았다.
‘달이 참 밝네.’
여태까지 그가 깨어나서 보는 달은 항상 밝았다.
‘날이 좋아서 그런 걸까? 하긴, 초여름이니 날이 좋긴 하지. 사실 내가 초여름으로 생각하는 거니 아닐 수도 있지만. 최근 온난화가 돼서 봄이라도 여름처럼 따뜻할 때가 있으니까.’
그는 달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강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모래밭이 보이고 있었다.
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그는 인간이었고 야행성이 아니라 주행성이었다. 달빛이 환하다고 해도 기본적인 어둠은 그의 시야를 크게 제한시켰다.
‘눈보다는 귀에 의지해야 하나. 전처럼 모닥불이라도 피워 준다면 알아채기 쉬울 텐데.’
아무리 귀가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다고 해도 그는 아직 그가 조금만 집중에도 들리는 온갖 소리가 어색했다. 괴롭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는데 익숙지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눈에 더 의존했다.
그는 네 시간 정도를 빠른 걸음걸이로 걸었다.
지치지도 않고 졸리지도 않았으므로 그의 이동 속도는 처음과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 네 시간 동안 상당히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앞서 가던 사람들을 따라잡을 정도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에 그는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귀에 바람 소리와 벌레 소리와는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벌써 만나게 될 줄이야. 환자라도 있었나. 이동하는 것이 생각보다 느렸어. 하긴 환자가 없더라도 일행이 다수라면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준비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으니…….’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함부로 접근은 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위험한 인물들을 수도 있다. 자칫하면 가족들도 괴물도 아닌 같은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와서 사람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조심해야 했다.
‘일단 소리에 신경 쓰면서 천천히 가 볼까.’
그는 기대와 긴장이 어린 눈빛으로 눈을 감고 지금 들리고 있는 소리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게 서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멀어서 그런지 대화 내용은 웅얼거리듯이 들려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확인 할 수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하나. 또 약간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하나. 변성기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하나. 약간 컬컬한 음성이 남자 목소리도 있고…….
간간이 약간 어린 여성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들리는 목소리를 구분해 보면 최소 다섯 명.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그걸 감안해도 많은 수는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다가가야 했다. 그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너… 그러니… 괜찮… 먹어……?”
“싫다면… 없으니… 놔둬.”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는 오랜만에 듣는 사람들의 기뻐하면서도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는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살해당한 해골의 모습이 깊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계와 의심은 심장을 쿵 떨어뜨리는 충격과 함께 사르르 무너졌다.
점점 정확해지고 커지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 중 하나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땅을 박차고 튀어나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자제했다.
‘으……! 아, 안 돼. 아는 사람이라도 경계해야 해. 먼저 확인을… 하지만, 정말 그 애라면……!’
그의 눈이 그리움과 반가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최대한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금 빨라진 발걸음으로 숲을 걸었다. 눈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모래밭에 고정된 채였다. 그리고 약 1분 후.
마침내 그는 흔들거리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뛰어난 시력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불빛, 모닥불에는 여러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여섯 명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후 처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
그들 중 오직 한 사람만이 눈에 들어왔다.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에서 다른 사람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홀로 앉아 있는 소녀.
그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인아…….”
살아 있다. 살아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존재 중 한 사람이 살아서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눈앞이 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의 행동과는 다르게 한 번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흡, 흑…….”
민다인. 그의 먼 친척이자 항상 같은 반이 되어서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 소녀.
‘살아 있어…….’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살아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살아 있다. 그는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닦았다. 물기 어린 시야 사이로 다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계속 비춰졌다.
‘다인이랑 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심해도 괜찮을 거야.’
예전부터 착하고 상냥했고, 무엇보다 항상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같은 또래에서도 인기가 많던 그녀다. 한 달에 한 번 고백받을 정도로 남학생들한테서 인기 있고, 그러면서도 여자애들한테도 시기나 질투를 받지 않을 정도로 다정했던 다인이다.
그녀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위험한 사람일 리가 없다.
그는 겨우 그친 눈물을 깨끗하게 닦고 맑은 시야로 다시 그녀가 있는 곳을 보며 한 발자국 내디뎠다.
도시에서 피난했을 때가 학교였는지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발 근처에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책가방이 보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도중 급히 도망쳤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책이랑 피리, 필기도구가 전부였을 텐데…….
그렇다면 피난 내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몸도 건강하지 않은 편인데. 그래도 끝까지 살아서 그의 눈앞에 있었다.
두 번째로 발을 내디디며 다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올라갔다.
풀어헤쳐진 부드러워 보이는 긴 갈색머리카락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굴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친 한 사람이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똑같이 교복을 입고 있던 남자애였다. 같은 교복인 것을 보니 같은 학교 학생이었나 보다. 약간 주근깨가 있는 소년이었는데, 그가 처음 보는 얼굴인 것을 보니 다인과 그와 같은 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소년은 다인에게 나뭇가지에 꽂혀져 구워진 생선을 내밀었다. 가지에 꽂힌 생선은 다섯 개나 됐는데 크기가 작아 여러 개를 꽂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만 먹으면… 고프잖아.”
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대충 먹으라는 소리인 것 같다. 그가 추측하기로 식량이 부족했을 텐데, 먹을 것을 다인에게 건네는 것을 보면… 혹시 다인을 좋아하는 남자애인가? 다인이는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굉장히 좋았으니까.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세 번째 발자국을 내디뎠다.
다인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생선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답답했는지 소년이 재촉하듯 생선을 흔들었다. 그 재촉에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소년을 보았다.
고개를 든 다인을 본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