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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2화)
part 2. 만남(4)
‘……어?’
그는 눈을 깜빡했다.
항상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녀는 곱게 휘어진 녹색 눈동자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민다인은 생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등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왜…….’
저런 표정은 결코 우울하거나 화가 나서 짓는 무표정한 모습과는 달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질적인 얼굴.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죽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그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지금까지 내딛었던 만큼 뒤로 물러났다. 다인이 아니다. 그가 알고 있던 민다인은 저런 표정은 지을 줄 모르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째서?
‘……다인이랑 같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지?’
처음으로 다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민다인을 합쳐서 총 6명의 사람들. 한 명은 다인에게 다가갔던 교복을 입은 남자애. 모닥불 바로 근처에서 구운 생선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의 여성과 거칠한 수염이 약간 있는 30대 중반의 중년인.
그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생선을 먹고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과 바로 그 옆에 마찬가지로 생선을 뜯어 먹고 있는 같은 나이대의 청년.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야. 다인이도 도시에서 도망치는 도중에 만난 것 같은데… 다인이네 가족은 어디 있지? 나처럼 가족과 헤어졌나?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학교에서 바로 도망친 것 같은데… 가족과 만날 시간이 없었겠구나. 그럼 나처럼 가족을 만날 가능성을 찾기 위해 수도로 가는 건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잠이 든 기간은 최소 한 달.
그 동안 아무리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고 해도 겨우 이 정도까지밖에 못 왔을 리가 없다.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면 진작 도착했겠지.
그렇다면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머물다가 수도로 가기로 한 걸까? 하지만 머물렀다면 어디에서? 왜 수도로 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지? 또 식량은 무엇으로?
여섯 명이 먹어야 될 정도의 식량과 물이라면 상당할 터다. 게다가 괴물까지 있지 않나.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잘못하면 오히려 잡아먹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마음 놓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다. 다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마치 괴물과 전혀 마주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괴물이 그의 예상보다 적어서 그들은 운 좋게 마주치지 않은 걸까.
아니다. 그는 뿔이 달린 개과 괴물, 이상한 고양이 떼와 비록 멀리서지만 분명히 보았던 강의 촉수 괴물. 겨우 삼 일 정도지만 그는 세 종류의 괴물을 보았다. 괴물은 그의 생각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히 운이 좋아서 괴물을 지금까지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 사람들 이상해. 괴물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해. 그런데도 싸운 흔적이 전혀 없어. 부상자들도 없고. 표정들도 다인이만 제외하면 다 태평해 보여. 위기감이 하나도 없어.’
다인의 변화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다인과 같이 있는 무리도 위화감이 있다.
‘접근은…….’
그는 다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변화 없이 앉아 있었다.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는 마치 유령 같았다.
‘……접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거리를 두고 지켜보자. 우선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만.’
다인을 보아서 기쁘다. 그 감정은 여전하다. 다인이 살아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변화가 두려웠다.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흐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들을 향해 움직였다. 아직 대화가 잘 들리지 않으니 조금만 더 다가갈 생각이었다. 숲에 있기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은 많아서 다가가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저 무리들이 경계라고는 조금도 하지 않기에 많이 조심할 필요도 없었다.
나무 기둥 사이, 수풀 사이로 조금씩 이동해서 나아갔다. 이윽고 그들과의 거리가 몇 십 미터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선명하게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며칠째 생선만 구워 먹으니까 좀 질린다. 맛은 좋긴 한데 어디 고기 없나?”
“꿈 깨셔. 여기 풀때기랑 생선밖에 더 있냐.”
친구로 보이는 같은 나이대의 20대 청년들의 대화 소리가 주로 들렸다. 상대적으로 여성과 중년인은 작은 소리로 얘기하고 있고, 교복을 입은 소년은 그들의 대화에 간간이 끼어들 뿐 딱히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짜증나! 진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모르겠네.”
“어… 강을 계속 따라가야 하니까… 꽤 걸릴 텐데, 벌써부터 그러면…….”
“누가 너한테 물어봤어?!”
소년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여성의 말에 중년인이 생선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으며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어때? 여긴 안전한 것 같은데 느긋이 가도 상관없지. 먹을 걱정 없고 좋잖아.”
“난 싫어요. 빨리 수도에 도착하고 싶어!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고! 아, 정말…….”
여성이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곳’에 있을 걸 그랬나.”
그녀의 말에 소년과 중년인이 흠칫했다.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고 약간 소심한 느낌을 주던 소년 또한 입술을 꾹 깨물며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그들을 힐끗 보더니 비웃음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미친 곳은 더 싫으니까. 거기에 조금만 더 있었어도 ‘내 차례’가 됐을지도 모르고 말이지.”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하지 말라고. 특히 저 두 녀석에게는. 잘못했다가는…….”
중년인이 힐끗 큰소리로 자신들의 대화에 빠져 있는 두 청년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죽는다고.”
스산하게까지 들리는 그 목소리는 진심이 베어져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으며 그는 의문이 치솟았다.
‘‘그곳’? ‘내 차례’……? 게다가 저 둘에게 죽는다니?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이 말하는 ‘그곳’은 절대 좋은 곳은 아니라는 것. 저 여자는 냉소적인 말투로 ‘미친 곳’이라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도 부정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했던 ‘차례’라는 것도 거슬렸다.
무슨 차례를 말하는 걸까.
그는 자리에서 멈추며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그들을 계속 살피며 그들의 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는 두 청년의 대화보다는 신경 쓰이는 말을 내뱉는 여자와 중년인, 소년의 말에 좀 더 집중했다.
아쉽게도 그 후로는 별로 정보라고 할 수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그들과 약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청년들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중년인이 잘못했다가는 ‘죽는다’라고 말한 만큼 저 청년들은 꽤나 위험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저 두 사람은 위험해. 기억해 두자.’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이었다. 언뜻 보기에 중년인과 여성 그리고 그와 같은 또래의 소년은 그리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소년은 다인에게 음식을 권했을 정도로 다인에게 여러모로 신경 쓰는 것 같았고, 여성은 신경질적이긴 하지만 딱히 위험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중년인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그냥 옆집 아저씨와 같은 흔하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다인이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다가가기 꺼릴 정도로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는 몇 분 동안 그녀의 표정도, 자세도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인형처럼.
‘다인아…….’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떼고 다시 다른 사람을 관찰했다. 다인이 계속 저 상태로 있는 것은 무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계속 저들을 지켜본다면 그녀가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들어봐야 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다인을 그들에게서 빼내 올 것인지 혹은 그가 그들과 합류할 것인지 정할 수 있으니까. 인원수가 많은 것이 조금 걸리지만 그의 향상된 신체 능력으로는 갑작스레 기습한다면 다인이를 빼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인이가 순순히 그 무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동의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상당히 수다를 떨고 있던 세 명이 어느 순간 묘한 침묵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눈치챈 것일까?
그가 긴장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서로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들 중 중년인이 수염이 듬성듬성 난 턱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됐으려나?”
‘그 녀석이라니?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나?’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한 명이 더 있다면 곤란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상대의 인원이 늘게 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또 저곳에 없다면 숲 쪽으로 정찰이라도 나간 모양인데, 그럴 경우 그는 저들뿐만 아니라 숲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그 한 사람도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들의 말에 그는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쯤 죽었을 것 같은데. 그 괴물에게.”
괴물에게 죽어?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정찰을 보낸 것이 아니라 그냥 헤어지게 된 건가. 괴물의 습격을 받고 일행이 나눠질 수도 있으니까. 저들이 말하는 사람은 운 없이 홀로 떨어진 경우인 걸까?
그들의 말대로 혼자라면 괴물들에게 습격당해 죽을 위험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그 떨어진 사람에 대해서 걱정하는 거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저들의 말은 그 한 사람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느낌이었다. 걱정한다는 느낌도 없고 그냥 건성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죽음을 많이 겪어서 무감각해진 사람들이서 그럴까?
하나, 차라리 그런 경우라면 좋았을 것을. 그의 의문은 바로 풀렸다.
“일찍 죽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자비’를 약간 베풀어 줘서 나무 윗부분에 묶어 줬잖아?”
뭐?
순간적으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팔 한 짝이 떨어져서 짐만 되는 주제에 제발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다니. 따라오려고 하기에 결국 나무에 묶어 버렸잖아.”
“에… 저, 원래… 그러려고… 하지 않았나요? 그 사람이… 먹혀야 괴물이 따라오는 속도가… 느려진다고.”
“응. 최대한 오래 버티라고 나무 윗부분에 묶었지만 하반신은 역시 다 먹혔겠지?”
“그러고도 살아 있다면 좀 불쌍한데? 흠, 숨은 끊어 줄 것을 그랬나.”
“살아 있는 피가 더 괴물을 끌어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귀찮게 하던 놈이었으니 잘됐죠. 애초에 그런 용도로 데려온 놈이고.”
저 사람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분명히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니, 알아듣기 싫었다. 저들에게서 느껴졌던 위화감 중 하나. 부상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괴물을 마주친, 싸운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
그 이유는…….
‘사람을, 부상자를 미끼로 해서 버리고 왔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세상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잔혹하게 변해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그런 잔인한 짓을 제정신으로 어떻게…….
그는 저들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혹은 혐오나 공포 때문인지 가늘게 떨리는 몸을 양손으로 감쌌다. 심장이 얼어붙은 것같이 소름 끼치고 머리가 터져 버릴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현실에서 그들이 직접 행한 일. 사람을 미끼로 버리고 왔다고 하면서 조금의 죄책감 없이 키득거리는 저들.
저들이 괴물보다도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 세기말, 혹은 멸망으로 몰린 사람들을 주제로 그린 영화, 만화나 소설들을 읽었었다. 광기에 빠진 사람들과 갖가지 범죄를 웃으며 저지르는 사람들. 폭력과 살인과 광기로 물든 세계. 그런 내용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상의 세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살해당한 흔적의 백골을 보며 어느 정도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막상 이렇게, 누군가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살인했을 것이 틀림없는 사람들을 보자 강해진 육체의 우위에 상관없이 두렵고 혐오스러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저들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흐리게 변한 그의 시선이 움직여 한 사람에게 향했다. 여전히 존재감 없이, 마치 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녀.
‘민다인… 다인, 다인!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