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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3화)
part 2. 만남(5)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과 상처 하나 없이 같이 있는 그녀는 뭘까. 그녀는 상처 하나 없이 여전히 매끄럽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저항의 흔적이 없다.
한 집단 내에서 한 사람이 맹렬히 반대한다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온다. 지금 저들의 행동과 말을 추측해 볼 때 만약 혼자서 반대한다면 제대로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반대를 하지 않아 살아남았다는 것을 기뻐해야 할까, 분노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가 저들에게서 외면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
‘다인이와 얘기해 봐야 해.’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던 그녀를, 따뜻한 느낌이 들던 그녀의 연주를, 간혹 놀러갔을 때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던 그녀를 기억했다.
‘믿기 싫어. 믿고 싶지 않아.’
가족 다음으로 가장 믿었던 친구였다. 그녀가 살인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만약, 만약이라도 다인이가 살인을 했더라도… 저렇게까지 변한 세상에서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진실이 뭐든 다인이와 이야기를 해야 해.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난 후 다인이와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자. 그러고 난 후에도 안 늦어.’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대로 도망치면 된다. 고양잇과 네발짐승과 달리기를 해서 따라잡히지 않았던 그다. 비록 완전히 따돌리는 것은 실패했지만, 아무튼 저들이 그와 같이 육체가 변하지 않았다면 위험상황일 때 도망치는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와 헤어진다면 영영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붙잡았다.
그녀의 일행이 괴물을 만나 죽게 될 수도 있다. 말 한마디 못하고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위급한 순간 그녀만 도울 수도 있다. 하나 그가 숨어서 지켜보다가 거리 때문에 미처 돕기도 전에 강력한 괴물에게 전멸 당한다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합류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지켜만 보며 관찰할 수도 있었다. 그 방법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도저히 지켜만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합류하자.’
그는 주먹을 꽉 그러쥐며 결심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세계였다. 누군가에게 정보를 얻는다면 그나마 지금 당장 신뢰가 가는 사람은 다인이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녀와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고 합류한다고 쳐도 문제는 남아 있어.’
어떻게 저들에게 접근해야 일행이 될 수 있냐는 것.
‘역시 일행과 있었다가 괴물에게 간신히 도망친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이 좋겠지.’
마침 어깨에 피가 묻은 옷도 있으니 그걸로 갈아입으면 영락없이 싸우다 도망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저들도 다짜고짜 사람을 공격하거나 하진 않을 테고. ‘미끼’로 이용하러 데리고 있었다느니 하는 사람들이다. 이용해먹으려고 데리고 있으면 있었지 바로 죽이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그런다고 해도 도망치면 되니 별문제 없고.
그는 가방에서 어깨에 피가 묻어 더러워졌었던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가방은 두고 가자. 저들이 내게 식량이 있다는 것을 알면 바로 뺏어서 좋다고 먹어 치울 것이 뻔해. 그러면 너무 아까워. 나무 높은 곳에다가 두면 괜찮겠지. 나중에 도로 가지러 오면 될 거야.’
신체가 비정상적으로 좋아져서 그런지 나무 위로 가방을 숨기는 것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아주 높은 나무도 아니었고 발을 디디기 좋은 넝쿨이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넝쿨의 일부를 끌어내서 나무에 단단히 묶기까지 했다.
‘가방은 이걸로 됐어.’
그는 나중에 찾으러 왔을 때를 대비해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표시했다. 꺾으면서 나는 소리에 눈치챌까 싶어 힐끔 그들이 있는 쪽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대책 없을 정도로 무방비했다.
저것도 그가 눈치챘던 위화감 중에 하나.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저 위화감도 살인에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
시간이 흐른 후 그가 그들에게 다시 느끼는 감정에 두려움과 혐오감 대신 적대감이 추가되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동족 살해에 대한 거부감과 이성적인 도덕심 때문이다. 적대감이 비춰지는 그의 눈동자는 미묘하게 그가 ‘괴물’을 상대했을 때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는 곧 찡그렸던 인상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는 그다지 자신 없은데.’
선택 사항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는 그들을 만나고 취할 행동을 생각했다.
‘저들과 자연스럽게 합류해야 해. 잘못하면 죽이려들지는 않더라도 쫓아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방법이 가장 좋을까. 가장 의심 없이 저들에게 합류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시선이 다인에게로 향했다. 방법이 떠올랐다.
‘다인이를 이용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나.’
그는 머리 회전이 좋고 임시방편이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사람에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익숙하지 못했다. 해 본 적도 거의 없을 뿐더러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를 대한 적 자체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는 싫은 상대가 있다면 보통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싫어하는 상대와의 대화는 스스로에게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넌 너무 냉정해.”
그런 그를 보며 다인은 언젠가 한 번 그렇게 말했다.
다정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들었지, 냉정하다는 말은 그녀에게 들은 것이 처음이기에 이해할 수 없어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저 웃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넌 그때 내게 너무 냉정하다고 말했었지. 그때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비록 살인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살인을 방관한 친구에게 접근하고 정보를 얻을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그 친구는 가족 외에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친구를 의심하고 이용해야 하는 상황. 그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다인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앞으로 자신이 할 행동에 자괴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 자신은 결정한 행동을 하겠지.
‘나는 그런 성격이니까.’
괴롭고 힘들지라도 한 번 결정한 일은 한다.
슬픔이나 고통 같은 괴로움은 그 행동을 한 후에도 늦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 성격이 나중에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상관없었다.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성격 덕분이었으니까.
인간이 잔인하게 변하고 괴물이 있으며 가족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세상. 갑자기 그런 세상에 던져진 그가 주저앉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비록 육체적으로 강해지고 정신도 같은 또래보다는 어른스럽고 차분한 편에 속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버티기에는 그가 너무 미숙했다.
그가 미치지도, 패닉에 빠지지도 않은 이유는 순전히 괴로움도 고통도 절망도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이었다.
수도로 도착해서 가족을 찾는다.
그는 그 명제 아래에서 다른 모든 감정은 그 후로 미뤄 버렸다. 어쩌면 이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자기 방어일지도 몰랐다. 그 명제가 ‘불가능’해질 경우 아주 치명적으로 작용해 버리고 마는 아주 위험한 방어 수단.
그는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한가롭게 성격 진단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접근한다. 그는 긴장으로 약간 차게 변한 손을 꾹 쥐었다.
마침내 그들과 아주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일부러 바로 앞에 있는 수풀을 헤쳐서 큰소리를 만들어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래밭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그들 중 한 명이 이쪽을 보았다.
그 한 명을 보며 그는 쓰게 웃었다.
하필이면 그녀, 민다인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는 그녀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나. 어지간히 둔한 사람들이다.
“뭐야, 왜 그래?”
20대 후반의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인은 가만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 그도 수풀에서 벗어나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어두운 숲속에서 나타난 그의 모습에 세 명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거리를 두고 있던 두 명의 청년들도 재빨리 일어나 무기를 쥐었다. 다인 또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처음으로 변한 표정이었다.
앞서 행동한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눈빛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흐리게 웃었다가 그대로 뛰쳐나가 그녀 앞에서 섰다.
깊은 숲 속의 녹음을 닮은 눈동자와 심해를 옮겨 놓은 것 같은 검푸른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소리 없는 그들만의 놀람이 그들을 감쌌다. 다인과의 거리는 이제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에 정적은 깨졌다.
다인의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담겼다.
“너… 설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율이야?”
허공으로 퍼지는 자신의 이름에 그는 울었다.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느끼며 그녀를 강하게 끌어 앉았다. 그것이 연기를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흘리는 눈물인지, 정말 그녀와 만났다는 것을 직접 체감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인지는 그도 몰랐다.
그냥 울고 싶었다.
part 3. 민다인(1)
시율의 울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그라졌다.
다인은 눈물로 붉게 변한 그의 눈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시율의 한쪽 손을 잡았다. 서늘한 그녀의 손이 따스한 시율의 손으로 미지근하게 변했다.
그는 무게감 없는 그녀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았다. 다인은 시율을 살며시 그녀가 원래 앉아 있었던 자리로 이끌었다. 시율은 별 다른 말없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의 20대 여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들을 살폈다.
단정한 외모를 가진 소년은 조금 다쳤는지 어깨가 붉게 물들여 있었다. 어깨의 상처나 옷의 모습을 보면 괴물에게 쫓기다 도망친 모양이었다.
무기도 없는데 용케 도망쳐서 이곳까지 왔군. 발이 빠른가? 그럼 조금 쓸 만할지도…….
그녀는 벌써 몇 달째 관리를 못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다인과 아는 사이인 것을 보니 같은 나이의 학생인 모양이었다. 아까 울 때는 몰랐지만 단정한 외모의 소년은 차분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쫓기다 이곳에 도착한 것 치고는 다인과 얌전히 있는 모양새가 이런 경험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괴물에 쫓겨본 경험이 없는 이가 누가 있겠나.
쫓기다 잡히면 죽고, 무사히 따돌리거나 죽이면 산다.
그 어떤 경우든 살거나 죽거나 두 가지 결과밖에 없으니 지금 세상에서 살아남은 모든 인간은 후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침착함은 이해가 갔다.
‘발 빠르고, 침착하고 외모도 반반하고. 괜찮은데? 곁에 두면 확실히 쓸모 있겠어. 교환용이든 미끼로든 말이지. 저 어리벙벙한 녀석보다는 낫군.’
그녀의 냉담한 시선이 그녀가 속했던 원래 무리에 있었던 소년에게 향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평범한 소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은근히 집적거리던 다인과 친한 것 같은 낯선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심한 녀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질투 따위를 하다니. 게다가 이미 맛 볼 대로 보지 않았나.
그녀는 내심 그를 비웃었다.
‘다음 정해진 미끼가 자신인지도 모르고.’
애초에 어른보다 힘도 약하고 손재주도 없고 눈치까지 없는, 잘난 것 하나 없는 저 자신을 왜 데려왔다고 생각한 건가. 당연히 도주를 위한 미끼로 데려왔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인지, 다음 차례는 본인인 줄도 모르고 전 미끼를 히죽거리며 나무에 묶는 것에 동참했었다. 질투로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을 본 그녀는 결국 결정했다.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시율을 노려보고 있는 소년 외의 다른 사람에게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슬쩍 손으로 소년을 가리키자 다른 약간씩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청년들도 고개를 까딱여 동의했다. 원래라면 도중에 합류한 자를 우선적으로 미끼로 만든다. 공범끼리 있는 것이 더 편한 탓이다. 그렇지만 합류한 자가 원래 미끼로 찍어 놓은 자보다 확실히 쓸모 있다면 말이 달라지지.
암묵적인 동의하에 시율이 다인과 함께 앉는 것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단, 시율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결정했으나 그들은 시율과 가까이 가지도 않았고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일단 더 탐색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시율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을 이해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니까. 어차피 그도 그들과 가까이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다인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 위해서라면 저들과도 어느 정도 얘기를 해야 되는데. 가능한 직접 얘기를 듣고 싶지만 쉽지 않겠지. 본인이 살인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남에게 쉽게 할 리가 없으니까.’
그녀에게 벌어진 일 말고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도대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나 자신의 같은 반 친구들, 가족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은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그러나 직접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왜 자신만 모르냐고 그녀가 묻는다면 자신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