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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4화)
part 3. 민다인(2)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몰랐다고? 최소 한 달, 혹은 몇 달의 기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게다가 그날은 세상에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날인데다가, 몸도 정상이 아닌 것같이 예민하게 변했다고?
‘절대 말 못해.’
최소 미치광이. 혹은 괴물 취급받고 쫓겨나겠지. 아니, 죽이려들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상대해 주면서 조금씩 알아보는 수밖에 없어.’
만약 다인이 그가 알던 그녀라면 망설임 없이 사실대로 얘기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옆에 앉은 다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은 계속 맞잡은 채였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그녀는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시율은 고개를 들어 보이는 다인의 하얀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다인아, 정말 다행이야. 살아 있어서.”
“너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네.”
다인의 입가가 살짝 휘었다. 그녀의 웃음은 분명 약하게나마 기쁨이 담겨 있었지만 어딘지 처연해 보였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와 잡고 있는 손을 뺐다.
‘뭐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에 다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아주 작은 변화지만 반쯤 적지라는 생각에 민감하게 곤두세우고 있던 시율은 그 변화를 알아챘다.
시율은 의아함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인아?”
그녀는 시율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재차 그녀를 부르려 할 때쯤 갑자기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너도 수도로 가려는 거야?”
“아, 응. 수도로 가면 가족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헤어져 버렸거든.”
“헤어졌다고?”
그의 손을 놓은 대신에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다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멈췄다. 다인의 반응에 시율도 몸을 굳혔다.
스스로가 한 말에 무슨 문제가 있나 생각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가족과 헤어졌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발언이었나? 그가 긴장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살짝 웃었다.
“그럼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겠네.”
“조금. 하지만 괜찮아. 저기, 그런데 우리 가족 본 적이 있니? 세상이 변한 후에, 한 번이라도…….”
헤어졌다는 말에 무덤덤한 다인의 반응을 보고도 미련을 버릴 수 없어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다인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날 이후 너희 가족은 한 번도 못 봤어.”
“그렇구나…….”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실망감이 그의 마음에 퍼졌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다인은 말을 돌렸다.
“그런데 가족이랑 헤어졌다고 해도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 텐데, 누구랑 같이 있었던 거야?”
“아, 운 좋게 마찬가지로 수도로 가는 사람들을 발견해서 합류했었어. 그런데 뿔 달린 괴물이 나타나서 도망치면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거든. 난 정말 천운으로 널 만났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
이미 생각해 놨던 바가 있었기에 시율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물으면 너무 짧은 시간 동안 합류해서 모른다고 할 생각이었기에 걸릴 것도 없었다. 운이 좋은 건지 그는 준비했던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면서 끼어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의 여성 탓이다.
“자자! 둘이서만 그렇게 얘기하지 말고 우리도 좀 껴 주지 그래?”
도착하기 전 들었던 신경질적인 어조와는 다르게 활기찬 말투와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을 보며 시율은 경계했다. 그래도 최대한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살짝 웃는 표정에 미안한 눈빛을 담아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친구를 봐서 반가운 마음에 다른 분들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저는 가온시율, 다인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사이입니다.”
“아, 음, 그래. 난 문지나. 그냥 지나라고 불러.”
그녀, 지나는 시율의 모습에 한순간 친근한 미소를 지우고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른 녀석들은 네가 좀 더 믿어도 될지 지켜 본 다음에 할 거야. 너도 이해하지? 일단 다인이 친구라니 받아 주긴 하겠지만 수상한 행동은 하지 마. 음식 조달은 스스로 해결하고. 뭐, 바로 옆에 강이 있고 물고기도 많으니 쉬울 거야. 이곳은 괴물도 없거든.”
“괴물이 없어요?”
“그래. 왠지는 모르지만 이 강 근처에 오니 괴물이 더 이상 안 보이던걸.”
“이곳에 얼마나 있었죠?”
“한 삼사 일쯤 됐는데, 왜?”
시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삼사 일 동안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계를 이렇게 풀었다고? 괴물이 없다고 자신하며? 그들은 최소 한 달은 괴물들에게 쫓기면서 살았을 터다. 그만큼 경계심이 크고 방심하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그러나 그녀는 진심으로 시율이 한 질문의 이유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곳… 역시 뭔가 이상해. 주의해야 되겠어.’
시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저도 갑자기 끼어든 만큼 얌전히 있을게요. 그래도 다인이랑 얘기하는 건 괜찮죠? 오랫동안 못 봤고, 상황도 힘들어서 다인이와 얘기하고 싶은데…….”
지나는 시율의 말에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굉장히 묘했다. 잠시 후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피식 웃으며 답했다.
“마음대로.”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율을 가볍게 위아래로 흩고는 다시 중년인과 소년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의아함을 무시하며 지나는 시율과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율이 한 인사를.
‘아직도 저런 녀석이 남아 있었나?’
그래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접근해서 다 같이 통성명을 하고 친밀함을 유도하여 조금씩 공범이 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율의 태도에 그녀는 마음을 바꿨다.
그는 민다인을 여전히 친구로 보았고, 문지나에게 정중하게 행동했다. 비록 시율의 눈에는 경계심과 경멸감, 적대감이 있었지만 욕망은 없었다. 그 스스로 나름 숨긴다고 한 거지만 그녀는 알았다. 지나는 시율보다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동시에 비참한 생활을 했다. 애초부터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것에 탁월했던 그녀는 여러 경험까지 겹치자 더욱 예리하게 변했다.
그런 그녀에게 애초에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율의 감정쯤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경계심, 적대감, 경멸감. 이 감정들이야 상관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이니 그런 시선을 보내도 이해한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니까.
지나가 진심으로 이상해 한 것은 시율의 모습에 광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저 녀석은 미치지 않았어. 지극히 제정신이야. 좀 위태로워 보이긴 해도.’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족을 짓밟고 친구를 버리고 살아남았다. 도와달라는 외침을 외면하고,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을 버리고, 다친 자를 미끼로 이용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스스로 반쯤 미쳤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거다.
‘인간을 물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게 미친 것이 아니고 뭐겠어.’
인간을 물건으로 보게 되어 버린 지는 몇 년 전이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사실, 세상이 변하고 나서 조금이지만 그녀는 기뻐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복수할 기회가 왔으니까.
미친 세상에 기뻐하다니.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쳐 있었을지도 몰랐다.
낮게 키득거리며 돌아온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중년인과 소년이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 물었지만 대충 대답하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그녀는 모래를 부드럽게 펴고 그 위에 담요를 깔았다.
담요 위에 누운 그녀의 눈이 흘끗 다인과 대화 중인 시율에게 향했다. 그들은 정말 ‘대화’만 하고 있었다.
‘재미있네. 미친 세상, 미친 인간 속에 정상인 한 명이라. 어떻게 될까.’
문지나는 히죽 웃었다.

“네 가족은 어때?”
시율은 다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족에 대한 문제를 묻는 것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외동딸인 다인을 무척이나 아꼈던 다인의 부모님들을 떠올리며 부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다인은 시율을 대답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앞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밤하늘에 검게 물들어 마치 빨려 들어갈 정도로 깊어 보이는 강이 비춰졌다.
“아빠는 도시에서 도망칠 때, 그러니까 세 달 전에 돌아가셨어. 엄마도 한 달 전에 눈을 감으셨고.”
“다인아…….”
“괜찮아. 돌아가신 지 벌써 몇 달인걸.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 말고도 죽은 사람을 너무 많이 봐 버렸어. 이제 눈물도 안 나와.”
그 내용이 도저히 죽은 가족을 얘기하는 거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시율은 그녀처럼 담담하게 있을 수 없었다. 다인은 추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어투였다. 시체를 직접 보지 않는 한, 사람은 자신의 가족의 죽음을 쉽게 인정하거나 결론짓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기간까지 말하며 부모님의 죽음을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는 부모님이 죽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말이 된다.
어떤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까.
직접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죽음을 봐 온 다인. 그녀가 자신처럼 잠든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거라면 알고 있는 사람들의 죽음도 봐 왔겠지.
친구나 친척이든, 가볍게 지나가며 만난 사람이든 간에.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지도 못한다.
알고 있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이나, 이미 죽은 모습이나 그 어떤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 장면들을 느낄 고통들도. 그가 어떻게 감히 그녀에게 섣부른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인도 그에게서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지나쳤다.
아무 말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하나 싶기도 했으나 다인의 흐리게 변한 눈을 보니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그나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같았다.
시율은 위로를 포기하고 다인이 해 줬던 말을 정리하기로 했다. 대기의 움직임을 따라 스르륵 움직이는 모래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인이 아버지가 도시를 나올 때 돌아가셨다고 했었지. 그게 삼 개월이 전이었다고……?’
그가 잠들었던 날은 3월 15일. 그 후 삼 개월이 지났다는 말은 6월 중순쯤이라는 소리가 된다.
‘삼 개월. 그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던 건가.’
최소 한 달에서 최대 다섯 달까지 기한을 잡아 두고는 있었다지만 정말로 무려 세 달 동안 잠을 잤다는 것을 알자 충격이 일었다.
그 기간 동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독수리처럼 뛰어난 시력, 자잘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까지 전부 들릴 정도로 예민해진 귀와 수십 분을 전력으로 달려도 지치지 않는 체력.
거기에 비정상적으로 빨리 낫는 상처까지.
모든 변화가 잠든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자신이 잠든 날은, 자신은 잘 모르지만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날.
가족을 찾는데 필요한 힘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결정했다고 해서 단칼에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라 삼 개월 동안 몸의 변화가 불안하고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변화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없는데. 그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이런 것보다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야…….
그는 순간 생각을 멈췄다.
다른 사람들 중에 자신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
“저기, 다인아. 갑자기 이런 질문해서 미안한데 지금까지… 그, 뭔가… 이상한 이야기 들은 적 없었어?”
“이상한 소문?”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차분한 얼굴의 다인이 살짝 의아함을 담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뭔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문이 돌 정도로 사람들끼리 교류는 많지 않아. 일단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법도 질서도 없는 상태다 보니 서로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 만나도 접촉도 잘하지 않고. 또 사람이 많으면 괴물을 상대하기 좋은 동시에 괴물을 더 끌어들이기도 하거든. 하지만…….”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가 있었던 곳은 예외였지. ‘마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 그자들이 있었으니까.”
“‘그자들’?”
“아니, 아냐. 그건 별로 상관없는 얘기야. 아무튼 이상한 소문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곳에서나마 들었던 것 조금이 다인데, 그거라도 알려 줄까?”
그자들이라는 말을 했을 때 강렬한 증오가 그녀의 눈에서 스쳐 지나갔다. 금방 자취를 감췄지만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말을 돌리는 모습을 보아 혹 묻는다고 해도 그녀가 얘기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는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그자들’에 대해서 얘기할 때 순간적으로 저 무리에서 반응이 있었다. 다인과 대화하면서도 쭉 그쪽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을 돌렸기 때문인지 그 반응은 곧 사라졌지만.
자신이 억지로 물어 알아내려고 한다면 저쪽에서 제재가 오겠지.
어차피 지금 당장 알 필요는 없었다. 저들의 속셈이 무엇이든 간에 확실히 합류한 만큼 물은 시간은 나중에 언제든지 있었다. 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