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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5화)
part 3. 민다인(3)
“그거라도 부탁해.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알았어. 우선… 아아, 그래. 우리 학교나 우리 동네 사람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서 그 마을에 있었어. 아무래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것이 나은 것 같아서 같이 있었지. 그런데 상대적으로 나중에 합류한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했었어.”
“무슨 말을?”
“그때는 도시를 벗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니까, 분명히 시간이 아무리 오래 지나봤자 4월 달이었을 텐데…….”
다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웠데.”
“뭐?”
얼어 죽을 정도로 추었다고? 다인의 말대로라면 오래 시간이 지나 봤자 4월, 그것도 아니면 3월이었을 텐데. 설마 이상 기후 같은 현상이라도 일어났었던 걸까.
하나 그런 것 치고 자신이 일어났을 때는 약간 쌀쌀한 정도의 날씨였다. 이상 기후라면 삼 개월 만에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을 리 없었다.
“나중에 폭동이 일어나고 범죄자들이 들끓어서 엉망이 되긴 했어도, 우리 도시는 다른 재해는 안 일어난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전했었잖아. 괴물들도 다른 곳에서 나타난 수에 비해 무척 적었고. 그래서 다른 도시에서 치안이야 어쨌든 우리 도시에 피난을 올 정도였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도착했던 사람들마저 떠날 정도로 추웠다고 했어. 너무 추워서 가는 도중에 약한 사람들은 얼어 죽고 건물들도 태우면서 갈 정도로.”
기억났다. 그는 집에서 벗어나 도시를 빠져나오면서 단순히 방화로만은 보이지 않는 탄 건물들을 발견했었다.
‘그것이 그저 불에서 온기를 얻기 위한 행위였던 건가? 그 정도로 추웠단 말이야?’
그 정도였다면 그곳에서 삼 개월 동안 잠들었던 그도 얼어 죽었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는 잠시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그때 몸의 변화와 함께 무엇이로든 추위로부터 벗어나게 된 현상도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더 믿음이 갔다. 애초에 삼 개월 간 잠만 자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거기에 몇 개 더 추가 된다고 해도 놀랄 것 없었다.
“별것 없지? 날씨가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워진 거야, 다른 때라면 충분히 놀랄 기상 현상이지만 상황이 이래선……. 다른 것들도 별거 없어. 기껏해야 거대한 늑대를 봤다든가, 수도 쪽에서 불꽃놀이처럼 불꽃이 터지는 것을 봤다는 것 정도. 아마 불 뿜는 괴물이라도 있나 보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것은 심적인 이유도 있지만 어느새 달이 저물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영향이 있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깨달은 듯 다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 졸린데… 이만 하고 내일 얘기해도 될까?”
“아, 물론. 늦게까지 잡고 있어서 미안해.”
“괜찮아. 나도 너랑 얘기하고 싶었는걸.”
다인은 그의 말에 살짝 웃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얇은 담요 하나를 꺼내고 부드러운 곳을 찾고 몸을 눕혔다. 시율은 잠깐 고민하다가 다인과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누웠다.
아무리 괴물이 없는 것 같다고는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괴물이 나타나더라도 바로 다인을 지킬 수 있도록 그는 그녀와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그가 자리를 잡고 누웠을 때 다인은 크게 움찔거리며 담요를 움켜쥐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손에 쥔 힘을 풀었다. 그리고 살며시 시율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율은 복잡한 머릿속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아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인과 시율이 눕는 모습을 보더니 하나둘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이 전부 잠이 들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용해진 강가에는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바람에 흔들이며 물이 찰랑이는 소리와 풀벌레가 우는 소리뿐이었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적막에 점점 시율이 눈이 감기기 시작할 때, 다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 더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지.”
“다인아?”
“마을의 탈을 쓴 지옥에서 한 남자가 알려 준 사실.”
시율은 다인 쪽을 향해 돌렸다. 그의 감청색 눈동자와 그녀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시율아, 넌 아무것도 모르지?”
그녀의 말에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은, 무슨 뜻……?
시율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그녀가 웃었다. 지금까지 보여 줬던 작은 웃음이 아니라, 얼굴 가득 찬 미소였지만 그는 그 웃음을 보고 기뻐할 수 없었다.
웃음과 함께 알리고 싶지 않은 진실이 새어 나왔기에.
“잠들어 있었잖아. 아주 깊이.”
머릿속이 텅 비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그의 방문에는 못질이 되어 있었다. 창문은 테이프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그는 그에 관련하여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민다인은 혼란스러운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적의도 호의도 아니었기에 그는 더욱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전부 다 알려 주기는 싫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알려 줄게.”
다인이 붉은 입술이 휘어졌다.
“네가 잠든 날,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환했었어.”
“왜?”
힘겹게 짜낸 그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달이 두 개나 있었으니까.”
part 4. 살아남은 대가(1)
아침에는 잔잔한 물안개가 꼈다. 상쾌한 공기와는 별개로 자욱한 물안개 때문에 흐리게 변한 시야는 왠지 모를 답답함을 주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해마저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아침임에도 잔뜩 흐린 초저녁의 하늘처럼 칙칙한 회색빛이었다. 비라도 올 모양이었다.
다인과 시율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 않았다.
시율은 복잡한 심정 때문에 차마 다인을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인은 그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일부러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시율은 잔물결이 찰랑이는 강가와 그 위에 구름처럼 떠있는 안개를 보았다. 흐린 하늘과 물안개는 그의 시야를 가로막아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았다. 건너편뿐만 아니라 그의 앞으로 가야 할 방향과 되돌아갈 수 있는 길조차도.
그는 문득 이 모습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겠어.’
다인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달이 두 개라는 의미는 뭘까. 그는 분명 지금까지 단 하나의 달만을 보아 왔다. 유난히 밝은 달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오직 하나였다.
그렇다면 비유일까? 마을의 탈을 쓴 지옥이라는 그곳은 뭐지?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남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실은? 그것을 알려 준 남자는 누구? 너는 정말 사람을 죽이는 것을 묵인했어?
그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수많은 의문을 담은 하나의 물음에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하얀 달빛 아래 그녀의 미소가 빛났다.
“말했잖아? 전부 다 알려 주기는 싫어. 알려 주는 것은 한 가지만이야. 만약 더 알고 싶다면…….”
그녀의 미소가 부서져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바람에 쓸려 나가듯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때마침 밤 구름이 달빛을 가려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만 남아 버렸다. 그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네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줘.”
뭐를 보여 달라는 건데. 네가 바라는 것이 뭐야. 소리치며 그녀를 닦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그녀가 한 말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답답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
전에는 몰랐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책이나 컴퓨터에 물으면 그만이고, 정 답을 찾을 수 없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아 그냥 넘어간 적도 많았다.
틀려도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시험 점수가 깎이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알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는 다리 밑에서 보이던 썩어 가던 시체들과 주방에서 봤던 백골을 떠올렸다.
‘죽기는 싫어.’
입술을 질끈 깨무는 그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음울한 침체는 소란스러운 소리로 인해 깨졌다. 그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이 물가에서 송사리들을 건져 그들이 가지고 있던 냄비에 담고 있었다.
“오늘도 많이 잡히는데?”
“근데 크기가 너무 작아서… 끙, 강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어제는 구워 먹었으니까 오늘은 찜해 먹자.”
저 사람들은 정말 태평하군.
우울했던 기분이 허탈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이 음식 조달은 스스로 하라고 했으니 시율도 물고기를 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숲 속에 들어가서 과일이나 먹을 만한 풀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나 잠깐이라도 일행과 떨어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숲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고.
생선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편식을 하지 않았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사 가지고 투덜거릴 정도로 경우가 없지도 않았고.
저쪽에서 별 다른 도구도 없이 쉽게 생선, 정확히는 송사리라는 표현이 맞는 물고기들을 잡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맨몸으로 강가에 가서 잡아도 될 것 같다.
물고기는 저렇게 쉽게 잡히는 녀석들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저 송사리는 사람의 손길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여든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잡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또 비록 생선을 싫어하더라도 부모님이 좋아하셨기에 자주 식탁에 올렸었고 덕분에 그의 기호와는 별개로 생선 손질도 익숙했다.
문제는 칼이 없어서 그 손질을 못한다는 거지.
‘저쪽이 칼을 빌려 줄 것 같지는 않고.’
생선의 비늘을 벗기고 내장을 빼야 했다. 생선을 손질 없이 그냥 먹으면, 생선 비늘 사이에 있는 이물질이나 내장에 있는 기생충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내장을 먹어도 되는 생선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장의 쓴맛 때문에 대부분 손질을 한다.
그는 쓴맛은 둘째치더라도 제대로 된 의사도 만날 수 없고 약도 없는 상황에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냥 굶을까. 안 먹으면 체력이 문제될 텐데. 생으로 먹었다가 아프면 더 문제고…….’
시율이 고민하는 사이 다인이 다가왔다.
“저거 먹으려고?”
“구하기 쉬우니까. 숲에 들어가서 식량을 구하는 것은 위험하고. 근데 칼이 없어서 손질을 못하니까 좀 고민 중이었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시율의 모습에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지금까지 저 생선들 먹은 적 있니?”
“아니, 아직. 이 강가에 도착한 지 별로 안 돼서. 왜?”
“시율아.”
다인이 조금 웃었다.
“이 미친 세상에서 아주 약간이라도 수상한 느낌이 드는 것들은 먹으면 안 돼.”
“……!”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것은 충고다.
저 생선은 위험하다고, 먹지 말라고 하는 충고.
‘저 생선에 무슨 독이라도 있는 걸까. 저들이 이상할 정도로 태평한 것은 분명 뭔가 원인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저 생선 탓?’
그는 다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심술로 생선을 못 먹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미련 없이 생선을 포기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그것을 왜 자신에게만 말하는 것인가. 저들은 그냥 저렇게 두어도 괜찮은 건가? 분명 그들은 한 사람을 잔혹하게 버렸다. 그래도… 그렇다고 독이 있을지도 모르는 생선을 먹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생선을 잡고 있는 무리들로 향하자 다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은 살 가치가 없어. 네가 신경 쓰지 마. 아무튼 숲 속으로 가서 식량을 구하자. 너무 깊게만 안 들어가면 별문제 없을 거야. 어제만 해도 먹을 만한 것들을 구해 그걸 먹었거든.”
가치가 없다. 시율은 다인의 말에 씁쓸함을 느꼈다.
사람의 가치는 함부로 정해서는 안 된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지금도 옳은 말일까. 그는 저들이 다인에게 한 짓을 모른다. 그들이 해왔던 잔혹한 행동들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그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다인의 마음도.
아무것도 알 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도덕적으로 틀렸다고 반박하는 것은 그야 말로 ‘타인’이기에 가능한 지적밖에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들이 사람을 미끼로 버리고 왔다고 느낀 순간, 아주 순간이지만…….’
죽어 마땅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