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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8화)
part 4. 살아남은 대가(4)


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인도 주변을 살피며 시율의 뒤를 따라 걸었다.
숲은 인간들이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활기가 넘쳤다.
햇빛에 싱그럽게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지저귀는 맑은 새소리, 벌레들의 사각거림. 약간 우거진 숲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금빛의 빛줄기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도시 근처에서는 워낙 오염되어서 사라져 버렸다는 다람쥐나 청설모가 나무를 타고 기어 다니며 오랜만에 숲에 들어온 인간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숲을 걸어가면서 보이는 나물들은 기회가 되는 대로 캐내서 챙겼다.
봉투도 많겠다, 흙이 좀 묻어 있기는 해도 털고 그 안에 넣었다. 식량이 언제 부족해질지 모르는 판에 나물은 가능한 많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이런 것도 정말 먹을 수 있는 거야?”
시율의 물음에 다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래 씹으면 단맛도 나서 먹을 만해. 먹어서 별로 위험하진 않아.”
그는 조금 떨떠름한 시선으로 손에 들린 나물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나물로 다인이 알려 준 것이다.
선명한 보라색 줄기와 그와 대조되는 노란 꽃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잎 색은 줄기와 전혀 다른 색, 검게 보일 만큼 짙은 녹색이었다. 꽃, 줄기, 잎 색이 이렇게 전부 확연히 다르게 차이가 났다.
‘이런 나물이 있었던가?’
가게에서 반찬 재료를 살 때도 간혹 식물도감을 살필 때도 본 적 없는 식물이었다. 이렇게 특이한 식물이라면 스쳐 봤더라도 희미하게 기억은 할 텐데.
의문이 들었지만 다인의 말을 믿고 일단 챙겼다.
그 뒤로도 다인은 간혹 전혀 본적 없던 나물들을 캐왔다. 공책을 펼치며 나물들을 찾으며 확인해 보니 다인이 그려줬던 공책에도 1/4 정도가 그런 나물이었다.
먹을 수 있는 나물이야 많이 알수록 좋은 거라 생각했기에 시율은 그것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식물이야 모양새가 특이한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열대지방과 그가 살고 있는 식물을 비교하면 전혀 다른 것처럼 식물의 생김새 정도는 특별히 신경 쓸 이유가 되지 못했다.
숲과 산에서의 해는 일찍 진다.
시율은 그의 아버지와 등산하면서 자주 야영을 해 봤기에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시율은 하늘이 불그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돌기 시작할 때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이만 걷자. 숲은 빠르게 어두워지니까 지금 잠자리를 준비해야 해.”
“그래. 불은 내가 준비할게.”
다인은 전에 있던 일행들과 있었을 때 인형처럼 표정도 없이 가만히 있던 것과 달리 그와 행동할 때는 먼저 말하고 행동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타기 좋은 나무들과 나뭇잎을 찾고 교과서의 종이 몇 장을 찢어서 불을 붙였다.
불은 금방 활활 타올랐다.
그 사이 시율은 주변을 살피며 위험한 것이 있나 없나, 모닥불이 피워진 지점에서 반경 30m 정도를 돌아다녔다.
다행스럽게도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돌아온 후 그는 주변을 정리해서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통조림을 까기로 했다. 나물을 데쳐 먹기에는 물을 끊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물은 아끼는 편이 좋았다. 나물을 데친 후 남은 물을 다시 담을 수도 있으나, 그 물은 씁쓸하기에 목이 마를 때 마시기는 좋지 않았다.
그 외에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라도 만약을 위한 깨끗한 생수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꺼낸 통조림은 가지고 있는 식칼을 이용해서 힘겹게 열었다. 식칼을 이런 식으로 다뤄 본 적이 없어서 실수로 손을 베일 뻔했지만 무사히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여기.”
“고마워.”
통조림을 받은 다인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받은 통조림은 닭고기 통조림으로 양념까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수저나 젓가락이 없기에 그녀는 그냥 손으로 닭고기를 조금 찢어서 입에 넣었다.
“맛있네.”
맛있었다. 무척 맛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조리된 음식일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무런 뜻 없는, 그저 기분 좋아서 흘러나오는 웃음. 그 모습에 시율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렇게 순수하게 웃는 모습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끔 이렇게 먹는 것도 좋겠어.’
평화로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차분하게 시작한 식사는 어둑해지기 시작했을 때쯤 끝났다. 평소 먹는 것처럼 먹는다면 시간은 훨씬 적게 들었겠지만, 다인이 한 입 먹을 때마다 잘게 변할 때까지 씹는 것을 보고 시율도 따라했기 때문이다.
음식을 잘게 씹어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포만감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고 그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통조림 한 개는 한 끼로는 부족한 양이야. 먹는 양은 계속 적을 텐데 포만감을 느낄 수 있게 앞으로 꼭꼭 씹어 먹어야 되겠어.’
깨끗하게 빈 통조림을 내려놓은 그는 다인을 쳐다보았다. 다인은 이미 먹은 통조림을 치우고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고 있었다. 불이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다.
다인을 바라보던 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알려 줄 수 없어?”
“…….”
그녀는 눈이 시율을 향했다. 그의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다시 고개를 모닥불로 고정시키며 침묵했다. 다인의 모습에 쓰게 웃으며 시율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미안.”
한참 후에 들려온 다인의 사과에 그는 그냥 짧게 웃음으로 답했다.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과 동행하는 것을 선택한 것을 보면 적어도 그녀는 자신 만큼은 적으로,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다 알려 주기는 싫다고 했지.’
그 ‘전부’는 그녀가 겪었던 경험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남으면서 알게 된, 겪게 된, 보게 된 것들.
왜 그녀가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고 할지라도 괴물에게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다.
익숙하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사람의 죽음을 응시하는 다인을 보며 알게 되어 버렸다. 평범한 통조림 맛에 무척 기쁜 듯 처음으로 순수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알아 버렸다.
‘내가 다인에게 말해달라는 것은… 그녀가 겪은 지옥을 상기시키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어.’
타인에게 경험을 말할 때는 좋든 싫든 그때를 떠올리기 된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그들이 어떻게 죽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시율은 입을 다물 것이다. 말하기 싫으니까. 그때 느꼈던 무력감, 공포, 안타까움, 허망함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인간의 죽음에 너무나 익숙해져 무감각해져 버린다면 모를까 그에게는 무리였다.
앞으로 살아나간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도저히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인간의 죽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물과 섞여 흐리게 번지는 아이러니하게도 고운 빛깔을 보이던 붉은 피. 살점이 씹히고, 뼈가 조각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애처롭게 뻗었던 팔의 추락, 절망스럽게 공중을 올리는 비명…….
시율은 씁쓸해지는 머릿속에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잊을 수 없겠지.’
최초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잔혹하고 덧없는 죽음을 그는 앞으로 계속 기억할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 그를 힐끗 보던 다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먼저 자. 내가 불침번을 할 테니까.”
혼자라면 어쩔 수 없이 불침번 없이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자야 하지만, 둘이 된 이상 한 사람은 불침번을 해서 주변을 경계할 수 있었다.
그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고마워. 피곤하면 깨워 줘. 바로 일어날 테니까.”
시율은 그렇게 말하며 미리 정리해 둔 잠자리로 가서 자리에 누웠다.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피로했기에 눈꺼풀은 금방 무거워졌다.
시율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며 완전히 잠에 빠져들려고 했을 때.
고요한 평화를 찢는 비명이 울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잠이 싹 달아났다.
시율이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위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바로 옆에 둔 식칼을 잡았다. 다인 또한 옆에 놓아 두었던 나무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으… 아아아…… 으아아!”
다시 한 번 고통 가득한 괴성이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확실한 사람의 비명이었다. 시율은 긴장으로 인해 마른침을 삼켰다. 꿈에서도 듣기 싫은 고통 어린 절규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역시 사람의 목소리야! 방금 들었어?!”
“응. 그런데 이 목소리는…….”
다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단순히 갑작스런 인간의 비명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물을 새가 없었다.
누군가, 아마도 그 비명을 질렀단 자로 예정되는 존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긴장을 하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 나뭇잎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수풀을 뚫고 한 물체가 나타났다.
처음 그것을 봤을 때 시율은 순간적으로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인간이라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명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붉은 털로 뒤덮인 괴물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존재가 절박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야 간신히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율은 멍하니 피투성이의 남자를 보았다.
“살… 헉, 헉… 려줘… 살려… 살려 줘어어어!”
살려달라는 말만 중얼거리는 남자는 어디로 보나 정상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공포에 찌든 목소리에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아 부들부들 떠는 그 모습은 누구라도 동정을 느낄 법했지만 시율은 그럴 수 없었다.
혐오와 두려움을 먼저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는 한 쪽 눈과 두 팔이 없었다.
마치 강한 힘으로 강제로 찢겨진 것처럼 남아 있는 팔의 흔적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쪽 눈은 무언가로 후벼 판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피 웅덩이가 금세 만들어질 정도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쇼크로 죽지 않는 것이 더 의아할 지경이었다.
“으… 허헉. 으아아… 사, 살려 줘…….”
남자가 팔꿈치까지만 남아 있는 팔을 애처롭게 뻗었다. 뻗어진 팔에 너덜너덜한 살점이 보였다. 하얀 뼈는 핏물에 번져 보이지 않았다.
처참한 모습에 멍하니 있던 시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렇게 많은 양의 피를 보는 것도, 강제로 찢겨진 잔인한 상처를 눈앞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에 머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에라도 속을 게워 내고 싶은데 머리가 어지러워 그럴 수도 없었다.
시율이 주춤거리며 조금이라도 지독한 피 냄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다인이 앞으로 나온 모양새가 되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두 다리로 엉금엉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피가 땅에 질퍽질퍽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살려… 흐… 헉, 살려 줘! 민, 민다인 살려… 줘!”
‘다인이를 알고 있어? 설마 이 남자!’
시율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문지나와 같이 숲으로 도망쳤던 청년. 바로 그였다. 숲에 들어간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이런 모습이 되다니.
문지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죽어 버린 걸까, 아니면 이 남자를 미끼로 도망 친 걸까.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 쪽이든 괴물이 나타나서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흔적이니 괴물이 틀림없었다.
“당신… 괴물은 어디 있죠?”
“몰, 몰라! 그년을 따라갔다고! 나, 나는 겨우 도망쳤는데 결국 그, 그, 그 괴물이이! 으, 컥…….”
그녀가 오히려 미끼가 된 건가. 이 남자가 이렇게 될 정도라면 지금쯤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그럼 그 괴물이 다시 이쪽으로 오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제외한 짐승은 보통 자신의 먹이를 구한 다음에 다른 사냥감에 손을 대지는 않으니까. 아니, 자신이 영역이라고 정한 곳에 들어올 때는 예외던가.
어느 쪽이든 문제다.
그녀가 무사히 도망쳤다고 친다면 죽어 가는 다른 사냥감이라도 얻기 위해 되돌아올 수도 있다.
이곳이 괴물의 영역인 경우에도 자신들이 ‘침입자’가 되어 버리니 마찬가지로 괴물이 올 것이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이 남자를 두고 가야 하겠군.’
어차피 곧 죽을 남자였다. 이 정도의 출혈과 상처라면 오래가지 못하리라.
시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에 냉정하게 행동하자고 결심했지만 이처럼 금방 그런 상황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다인을 향했다. 이 남자를 버리고 가자고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피투성이의 남자가 더 빨랐다.
“너, 너! 빠, 빨리 살려 줘, 살려 줘! 어떻게든……!”
남자가 다인에게 외치며 애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다인의 붉은 입술이 휘어져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