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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19화)
part 4. 살아남은 대가(5)


“살고 싶어요?”
“그, 그래! 쿨럭, 흐으… 살고 싶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으음, 어쩌죠?”
다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를 들었다.
“난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는데.”
퍼억!
그녀의 몽둥이가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지켜보던 시율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남자는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지며 자신이 흘린 피로 이루어진 피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다, 다인아! 이게 무슨 짓……?!”
사람을 폭행, 그것도 죽기 일보 직전의 남자를 다인이 폭행하는 모습에 시율은 놀라 그녀의 팔을 잡았다.
팔을 잡자 자연스럽게 시율 쪽을 향한 다인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지독히도 차가웠다.
굳은 시율의 모습에 초록빛의 두 눈을 곱게 휘며 웃은 다인은 몽둥이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팔을 잡은 시율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팔이 없기 때문인지 남자는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악! 네가, 네가! 벌레 같은 년이! 네가 감히!”
“‘감히’라니, 그런 꼴로는 안 어울려요.”
느릿하게 다리를 든 다인은 그대로 남자의 배를 후려 찼다. 강한 타격 소리와 함께 남자의 배가 휘었다. 그것에도 만족을 하지 못했는지 다인은 차가운 얼굴로 쉴 새 없이 남자의 배를 걷어찼다.
새하얀 그녀의 다리와 교복에 피가 튀었다.
“다인, 다인아! 이제 그만해!”
결국 보다 못한 시율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듯이 붙잡았다.
“이미 죽었어! 그만… 제발 그만해…….”
남자는 조금 전부터 미동이 없었다. 시율의 말에 다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들어 남자의 코 밑에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싱긋 웃었다.
“아냐. 이들은 끈질기거든. 아직 살아 있어.”
시율은 그 웃음에 소름이 돋았다.
피투성이의 남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정신이 의심될 정도로 폭력적이게 변한 그녀가 무서웠다. 인형 같은 모습은 차라리 나았다.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다인아… 왜… 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까지 변했는지 몰랐다. 냉정하고 무심하게 변했지만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했을 때 잠깐 보였던 천진하기까지 한 미소에 그녀가 많은 것이 변해 보였어도 근본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어째서?
시율의 눈물을 보자 다인이 살며시 웃으며 그의 눈물을 닦아 줬다.
“시율아,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시율아, 변하지 않은 시율아……. 너는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나는…….”
애초에 답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지 시율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르지? 내가 알려 줄게.”
그녀가 등을 세우며 꼿꼿이 섰다.
달빛에 그녀의 모습이 더욱더 하얗게 보였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다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내 친구들을 가지고 놀다 죽였어. 다행히 우리 엄마는 처음에 저 녀석이 강제로 먹인 독을 먹고 죽어서 치욕을 당하는 기간이 그나마 짧았지. 참 다행이지?”
뭐라고.
시율의 눈이 흔들렸다.
다인이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셨다고? 인간에게, 그것도 강제로 독을 먹여서……?
게다가 친구들을 ‘가지고 놀다’ 죽였다니. 다인이는 친구들을 무척 아꼈고, 친구들 또한 그녀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을…….
“시율아, 여성의 인권이 세워진 것은 문명이 발달한 다음부터래. 그래서 그런지 문명이 무너지니까 무척 괴롭더라. 내 친구 사린이 알지? 그 애는 남자친구도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남자들에게 간살당했어. 그 애만이 아냐. 살아남은 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살아남은 대가’를 치러야 했지 뭐야.”
그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 대가를 치러야 했지! 매일 매일! 쉬지 않고! 빌어먹을 대가를!”
쌓이고 쌓여 썩어 버린 아픔과 절망이 그녀의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독을 먹었다면, 그녀의 친구들이 그런 짓을 당했다면… 다인도 예외일 리가 없었다. 절망스럽게 외치는 그녀의 모습.
자신이 그녀를 보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시율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만! 다인아, 그만…….”
“왜? 듣기 싫어? 내가 더러워? 소름 끼쳐?”
다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가 그렇게 느껴도 상관없어. 애초에 저 남자를 죽이기 위해 저 남자가 ‘마을’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따라왔어! 내게는 저자를 죽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어! 지금까지는 기회가 없어서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내가 괴물에게 죽든 살든 아무래도 좋아. 저 남자만큼은! 최소한 내가 죽기 전에 엄마의 원수만큼은……!”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강렬한 증오와 분노를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시율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일그러진 다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참아 왔던 감정이 마치 강을 막던 댐이 터진 것처럼 쏟아내던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짙은 증오로 연두색 눈동자가 짙은 암녹색을 띠며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섬세한 하얀 손가락에 튄 붉은 피가 몽둥이 끝으로 고여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는 시율을 마주서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시율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려야 하나.
저 남자는 그녀에게 입에도 담기 싫은 짓을 벌였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강제로 독을 먹여 살해했다. 그의 머릿속에 다인의 어머니의 부드러운 미소가 스쳐 갔다. 다시는 보지 못할 미소. 다인에게서, 다른 여자들에게서 끝없는 증오와 절망을 준 사람.
시율에게도 여동생과 어머니가 있다. 그녀들도 그런 짓을 당했을까.
머리 한 구석에 서늘하게 칼이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예리한 한기가 그의 뇌리에 박혔다. 그랬다면, 그런 짓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졌다면.
그는 순간 마음이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어둠으로 가득 찬 것을 느꼈다.
그 마음속에서 새하얀 글자가 떠올렸다.
말릴 이유가 있나……?
침묵하는 시율을 뒤로하며 다인은 걸어 나갔다. 남자는 어느새 다시 깨어났는지 다리로 기며 최대한 민다인에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으… 으아아… 살려… 살려 줘… 제, 제발. 잘못했어! 자, 잘못했어… 그러니 제발…….”
남자의 애원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 당한 여자들의 애원에 한 번이라도 그가 응답했다면 그녀는 아주 잠시라도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다인은 다시 한 번 몽둥이로 남자를 내려칠 작정인지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무거운 땅울림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끼끼, 끼기긱.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등 뒤에 들리는 거친 짐승의 숨소리. 시율은 그녀의 뒤에 나타난 ‘그것’을 보며 소리쳤다.
“다인아!”
다급한 시율의 외침은 아무 소용없었다.
‘그것’은 남자의 피일 것이 분명한 붉은 액체로 물든 손을 들어 그녀를 후려 갈겼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힘없이 날아가 나무에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쿨럭, 쿨럭!”
몸통에 맞아 충격이 퍼져 목뼈가 부러져 죽는 불상사는 면했는지 그녀로부터 거친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그녀가 도망 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의 시선이 눈앞의 피투성이의 남자로 향했다.
“으… 으아아아아!”
남자의 비명에 시끄럽다는 듯 남자의 목을 붙잡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반대로 돌아가 버린 남자의 목은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시율은 식칼을 쥔 손을 세게 잡았다. 문지나는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아니면 너무 빨리 잡혀서 오히려 괴물이 이쪽으로 왔거나. 피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니 괴물이 되돌아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진작 도망쳤어야 했는데.’
시율은 그의 키를 훌쩍 넘는 괴물을 보며 긴장했다.
붉은 눈동자와 2m는 되어 보이는 덩치, 갈색 털, 길쭉한 두 팔과 상대적으로 짧은 다리. 그가 동물원에서 가끔 보던 원숭이나 고릴라를 섞어 놓고 위협적으로 늘인다면 이런 모습일까.
다인을 가볍게 날려 버리는 모습을 보니 엄청난 힘을 지닌 것 같았다.
게다가 저 괴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올 동안 전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땅으로 접근한다면 아무리 빨라도 눈치챘을 테니까.
하지만 나무 위라면 말이 달랐다. 저 생김새에 어울리게 원숭이처럼 나무 사이를 타고 온다면?
발견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괴물은 남자를 쓰레기를 버리듯 휙 던져 놓고 어슬렁거리며 쓰러져서 있는 다인에게 다가갔다.
“안 돼!”
시율은 괴물에게 다가가 식칼을 휘둘렀다. 괴물이 움찔거리며 날듯이 뒤로 뛰어올라 물러났다.
“끼이, 끼끼끼!”
그의 행동에 화가 난 듯 위협적으로 울렸다.
다인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 괴물이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시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녀석은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원숭이처럼. 힘도 어마어마하고… 싸워서 도저히 못 이겨.’
무엇보다 저 괴물이 하나라는 법이 없다.
다른 인간을 유인하기 위해 저 모습도 약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독이 있는 녀석일 수도 있겠지. ‘위험하고 영악하다’라는 것 외에 괴물에 대해서 무엇 하나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망이 최우선이었다.
차라리 네발을 쓰는 괴물이라면 나무라도 타고 올라가서 급한 대로 피신할 텐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반 원숭이나 고릴라하고 붙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그 두 배는 돼 보이는 체격과 강력한 힘. 더군다나 그는 다인을 지키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든지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괴물은 그가 태평하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식칼에 위협당한 것이 분한 듯 괴물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끼― 끼이이!”
“큭!”
시율은 두려움에 감기려는 눈을 애써 뜨며 괴물의 동선을 똑바로 보려 노력했다. 달려드는 괴물의 모습에 시율은 몸을 옆으로 굴렸다. 퍽, 땅을 깊게 패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흥분한 괴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른 몸을 일으켜 새운 그는 재빨리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빠르게 주위를 흩었다.
식칼로 공격하기에는 너무 짧았다. 평범한 나무 몽둥이로 상대하기에는 저 괴물의 힘이 너무 강했다. 사람의 목뼈를 한 손으로 가볍게 부러트릴 정도라면 나무 몽둥이 같은 걸로 덤벼 봤자 금방 박살 나 버릴 것이다.
그 후에는 자신도 박살 난 몽둥이와 같은 꼴이 될 터고.
길게 생각 할 시간도 없었다.
시율은 손을 뻗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의 나뭇가지를 주워 괴물에게 던졌다.
“끼이이이!”
‘불’이 무엇인지 모르는지 괴물은 반사적으로 타오르는 나뭇가지를 쳐 냈다가 비명을 질렀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는지 나뭇가지를 쳐 낸 손바닥을 다른 한 손으로 감사며 끙끙거렸다.
그 주변에 불붙은 나뭇가지 파편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서 주위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한 번 데이자 경계심이 생겼는지 괴물이 작은 불씨임에도 불과하고 주변을 경계하자, 시율은 희망을 가졌다. 만약 불을 두려워한다면 불을 이용해 쫓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다시 모닥불에서 붙이 붙은 굵은 나뭇가지를 꺼냈다. 이번에는 던지지 않고 괴물을 향해 휘둘렀다.
“저리 꺼져!”
“끼이― 끼!”
뜨거운 불꽃의 열기가 근처에서 붕붕 휘둘러지자 괴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괴물은 도망치지 않았다.
괴물은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시율은 놀라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휘둘렀지만 괴물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시율의 옆으로 이동한 괴물은 그가 괴물을 향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붕―
커다란 바람 소리와 함께 날려진 괴물의 주먹에 시율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것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것은 적의 공격을 맞겠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찰나 순간적으로 일으킨 방어 본능이었고, 그것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불이 세워지자 움찔한 괴물은 손바닥의 화상을 떠올리며 주춤하며 순간적으로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감히 상처를 입힌 건방진 먹이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주춤해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람 하나를 가볍게 날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시율의 복부를 강타했다.
아니, 복부라고 하기에는 괴물의 주먹이 너무 컸기에 상체 전부를 쳤다고 보는 쪽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