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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1권(20화)
part 4. 살아남은 대가(6)


“커헉!”
시율은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뿔이 달린 늑대에게 물렸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동차에 부딪힌 것이 이런 느낌일까. 그 아찔한 고통에 정신을 놓을 뻔했으나 지금 정신을 놓으면 그야말로 죽음뿐이라는 사실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일어… 빨리, 빨리 일어나야… 큭. 이대로 있으면… 죽을 거야!’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도 벅찬 고통에 육체는 정신을 무시했다. 몸에 충격이 큰 듯 경련이 나듯 몸이 떨렸다. 겨우 눈을 뜨자 괴물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흐윽…….”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몸을 비실비실 일으켜 세운 그는 식칼을 움켜잡았다.
주먹으로 맞아 날아가는 와중에서도 무기가 될 수 있는 식칼을 생명줄처럼 잡고 있었기에 식칼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하나 식칼이 손에 있어 봤자 몸이 겨우 설 정도라면 소용이 없을 거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누워 죽음만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난 살 거야!’
죽기 싫다는 생명체로서의 당연한 의지 아래 그는 필사적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뚝, 하고 떨어졌다.
비실거리며 일어난 그가 가소로웠는지 괴물에게서 비웃음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먹잇감의 마지막 발악을 즐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괴물이 느릿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괴물의 발을 감히 잡은 존재가 나타나면서 괴물은 우뚝 멈춰 섰다.
“시…율아, 도망… 가.”
다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피로 물든 하얀 손으로 굵은 괴물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기어온 자리에는 피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다, 다인아! 당장 떨어져!”
자살행위였다. 저 괴물에게 직접 닿다니! 게다가 저런 상태로……?!
거기까지 생각하던 시율은 괴물이 다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가만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붉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무, 무슨?”
시율의 의문에 다인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 만약을 대비해서 마비 가루, 잔뜩… 가지고 있거든. 인간에게만… 사용되는 것만 봐서 괴물에게 통할지 몰랐는데… 다행히… 괴물에게도 효력이 있나… 보네.”
마비 가루라니, 그런 것을 다인이 가지고 있던가? 저 정도로 즉효성이라면 굉장한 효과인데 그것을 어떻게 다인이?
아니,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와 도망치는 일이었다.
언제 저 마비가 풀릴지 모른다!
“다인아, 일어날 수 있었어? 못 일어나면 부축해 줄게, 빨리 도망쳐야 해!”
“……난 못 가. 너만 가.”
다인이 힘없이 대답했다.
“뭐? 당연히 너도 가야지, 무슨 말을……!”
“온몸에… 힘이 없어. 기어온 것도 간신히 온 거야.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더는 무리야. 인간에게는… 마비가 하루도 더 가긴 했지만 괴물은 몰라. 저 괴물이 무리를 이룬 녀석일 수도 있고. 그래도 먹이 둘이 이곳에 있다면 너까지 쫓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빨리 가.”
그녀의 말에 한순간, 아주 잠깐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이리라.
그러나…….
시율은 입술을 깨물며 쥐고 있는 식칼에 힘을 주었다.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그의 식칼이 움직일 수 없는 괴물의 목에 박혔다.
콱!
소름 끼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가죽을 꿰뚫고, 살을 가르며 피를 유영하는 철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식칼을 찔렀는지 식칼의 끝이 괴물의 목에 살짝 삐져나왔다.
“끼흐… 끼이이…….”
붉고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그 피는 고스란히 앞에 있던 시율의 몸에 뿌려졌다.
뺨에도 뜨끈한 액체가 느껴지는 것이 뺨에도 튀긴 모양이었다. 마비로 인해 소리도 거의 내지 못하고 괴물은 식칼이 목이 꿰인 채로 부들부들 떨어댔다.
마침내 괴물은 거대한 몸을 땅에 눕혔다. 괴물의 피로 이루어진 고랑이 팔에서 찰박거렸다.
“시율아?”
“다른 사람이 그런 말하면 도망쳤을 거야.”
차라리 이름만 아는 타인, 반 친구, 선생님, 이웃사촌이나 다른 사람이라면 후에 괴롭더라도 도망쳤을 거다. 제발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해도 냉정히 고개를 돌리고 짐을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을 것이다.
그는 살고 싶었고 자신의 목숨을 도덕심을 위해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다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은 어릴 때부터 항상 옆에 있고 같이 자라고…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사촌이자 친구.
“다시는 도망가라고 하지 마. 너는 나한테 있어서 버릴 수 없는 존재니까.”
시율은 깊이 박힌 식칼을 힘을 줘서 빼냈다.
피가 역할 정도로 솟구쳤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넘치는 피를 건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괴물을 죽이지 못했다면 저 피는 자신에게서 흘러나왔겠지.
처음으로 느낀 생생하고 소름끼치는 감각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는 가라앉은 눈을 괴물의 피에서 떼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일이다.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잠시 괴물의 시체를 바라보던 그는 곧 뽑아 낸 식칼을 챙긴 뒤 비틀거리며 짐 가방으로 다가갔다.
다인의 책가방과 그의 가방을 가져온 그는 지친 눈빛으로 시체를 보다가 다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걸을 수 없다면 가방만이라도 메 줄래? 업어야 하는데 가방을 메면 힘들어.”
“……나는 그냥 버리고 가. 복수할 놈도 죽어 버렸고… 이제는…….”
“싫어.”
그가 다인의 말을 단호히 잘랐다.
“난 널 못 버려. 다른 사람이면 버렸을 테지만, 넌 안 돼. 그러니까 가방 메고 업히기나 해.”
다인은 시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은색의 가느다란 달빛으로 창백하게 빛나는 시율의 모습이 들어왔다.
죽어 버린 원수의 시체와 커다란 괴물의 시체의 피 웅덩이 위에서 시율은 살아남아 서 있었다. 그는 죽지 않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픔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로 젖은 눈동자로 나직하게 웃었다. 주섬주섬 가방들을 양쪽 어깨에 걸친 것처럼 멘 그녀가 시율을 올려다보았다.
“업을 수 있겠어? 너도 힘들어 보이는데.”
“……너한테는 말 안 해 줬지만, 몸이 이상하게 변했거든. 그래서 금방 나아. 힘도 좀 세졌고.”
실제로 아까 정신을 놓을 것 같은 고통은 잔재만 남아 욱신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슬쩍 옷을 들어보니 시커멓게 변해 있는 것이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어쨌건 당장 쓰러져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시율의 말에 다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시율에게 업혔다.
강해진 힘은 그녀의 무게와 가방의 무게까지 전부 다 감당했다.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나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고통이 온몸을 울렸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고통에도 불과하고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 고통보다도 피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몸의 고통과 등의 무게에 시율의 걸음은 느렸으나 다행히 더 이상 괴물은 등장하지 않았다.
검게 물든 숲 속은 새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바람결에 서로 부딪히며 쏴아아― 제멋대로 연주를 하는 나뭇잎들의 소리만이 숲에서 울렸다. 괴물이 날뛰어서 대부분 도망간 모양이었다.
고요한 침묵을 깬 것은 다인의 목소리였다.
“시율아. 아까 그 마비 가루… 내가 왜 가지고 있는지 안 궁금해?”
“조금.”
“으응, 사실 그 마비 가루 ‘그자들’에게 훔친 거야.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제거했다고 믿어서 훔치는 건 쉬웠거든. 나도 어떻게 만드는 건지는 몰라.”
“그자들이 누군지 물어도 돼?”
뒤에서 낮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물론이지. 이젠 상관없어. 음, 그자들은 있지… 악마 새끼들이야. 괴물들보다 더 해. 솔직히 괴물이 아닐까 생각도 하고. 바위를 공깃돌처럼 들었다 놓거든. ……아니, 사실 육체적으로 강해진 것은… 그들보다는 못한 것 같아도 너도 그러니까 괜찮은데… 나도 어느 정도 그렇고. 근데, 근데…….”
그녀가 고개를 시율의 어깨에 묻었다.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에 작은 흐느낌이 섞였다.
“……머릿속이 괴물이야.”
다인의 말을 끝으로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율은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면 좋을지 몰라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갑자기 다인이 시율의 어깨를 꽉 붙잡고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율아, 뛰어.”
“다인아?”
“괴물들 소리가 들려. 아까 그 괴물들이랑 같은 소리야. 거칠어. 아직 멀지만… 어서 뛰어!”
“……!”
시율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으나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는 지친 다리를 놀리며 빠르게 앞으로 걸었다.
사람은 목숨이 위험할 때는 없던 힘도 나오게 마련인가. 조금 힘겨웠던 걸음이 보통 달리기와 비슷한 속도로 변했다. 하지만 이 속도라면 곧 잡힐 것이다.
괴물들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어디 숨을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적어도 들켜도 저 덩치 큰 녀석들은 들어오지 못할, 그런 장소.
‘이런 숲에서 그런 곳을 어떻게 찾지?’
찾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그는 초조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이곳은 도시 근처의 숲이다. 간혹 숲 속에 별장이나 다른 용도의 건물을 만들었을 테니, 그런 건물을 찾을 수 있다면?
간절한 그의 소원을 누군가가 들어준 것일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그의 눈에 낡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저기로!”
다인도 그를 재촉했다.
숲에 있어 봤자 괴물들에게 죽을 뿐이다. 마땅히 숨을 것도 없는 이곳에서 뭘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운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해도 엄폐물이 있고, 운이 좋다면 지하실을 발견해 안전히 숨을 수 있는 곳이 나았다.
“끼이이이이―”
괴물의 포효가 들려왔다. 동족을 죽인 먹이에 대한 분노가 어려 있는 매서운 외침이었다.
‘소리가 들릴 정도라면 가까워. 빨리, 더 빨리!’
순간 다인이 그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놀라 그녀를 향해 돌아보자 그녀는 살짝 웃고는 시율의 가방을 도로 그에게 던져 주고 같이 뛰기 시작했다.
“너?”
“아까 말했잖아. 나도 어느 정도 몸이 변했다고. 어지간한 것은 금방 괜찮아져. 혼자서 뛸 정도는 돼.”
확실히 그리 부담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다인이 내려오니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건물에 도착한 다인과 시율은 빠르게 건물을 살폈다.
2층으로 된 예쁜 집이었다. 낡고 관리가 오랫동안 안 되었는지 조금씩 허물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별장 용도로 쓴 모양이었다.
“저런 집에 지하실이 있을까?”
그저 방에 문을 잠그고 있는 것만으로는 무리였다.
피 냄새나 자신들의 냄새를 쫓아 문을 부셔서라도 노릴 것이다. 시율의 걱정 가득한 말에 다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이곳이라니.
그녀는 아릿하게 떠오르려고 하는 추억을 밀어내며 시율에게 소리쳤다.
“있어. 이쪽으로 와!”
다인은 건물 뒤편으로 달려갔다.
시율도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건물 뒤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나무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다인은 그중 몇 개를 옮겼다.
그러자 바닥에 새까만 철로 만들어진 문이 나타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문을 열고 재빨리 시율에게 손짓했다.
“빨리!”
다인의 목소리에 그는 힐끔 고개를 들려 희미하게 형체가 보이는 괴물들을 보았다가 황급히 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인도 지체하지 않고 시율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문을 잡아당겼다.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다.
“후, 후우. 저놈들이라고 해도 철문은 쉽게 못 부술 거야. 우리 냄새도 지하고 하니까 잘못 맡을 테고… 조용히만 있자.”
다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벽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지하실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어두운 공간. 들어오기 직전 스치듯 방 한 칸 정도의 크기에 각종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는 것을 봤던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벽과 주변을 더듬어 확실히 안전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야 긴장을 풀었다.
그에 비해서 다인은 이상하게 익숙해 보였다.
그녀는 지하실에 들어온 후부터 조금의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실이 있다는 것과 그 위치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
“다인아, 이 건물에 와 본 적 있었어?”
“예전에… 엄마랑 아빠랑 여행 와서 묵었던 건물이야.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네.”
씁쓸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율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다가 가방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건전지가 아깝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물론 양초도 있으나 양초를 꺼냈다가는 위험했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여기 있을 지도 모르는데 사방이 박힌 지하실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산소도 부족해지고 연기도 문제이니.
시율이 손전등을 꺼내자 다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하실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하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작았는데 3평 남짓 할 것 같았고 삽이나 작은 철 수레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창고로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율은 손전등을 적당한 위치에 두며 그녀에게 물었다.
“상처는 정말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