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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2화)
제4장 무명(無名)(2)
잠시 후, 화진은 쪼그려 앉아 두 꼬마들과 눈높이를 맞춘 뒤,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너희는 본격적으로 우리 화씨의 무공을 익힐 나이다. 내가 직접 너희를 가르치면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난 휘아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집단의 우두머리이다.”
“……?!”
두 꼬마는 갑작스런 화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동그랗게 떴다.
화진은 다시 두 꼬마를 번갈아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이곳 귀곡엔 이 아비 못지않게 우리 화씨의 무공을 극성까지 연마한 기인이 살고 있다. 비록 사연이 있어 홀로 숨어 살고 있지만, 그라면 분명 이 아비를 대신하여 너희의 훌륭한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그제야 두 꼬마는 오늘의 목적을 알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특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을 멀리 벗어난 적이 없는 화무휘는 울 것처럼 눈물마저 글썽였다.
“집에 돌아가면 안 되나요? 다섯 숙부님이나 다른 훌륭한 사범들도 많이 있잖아요.”
화무휘가 어리광을 부렸지만, 화진은 근엄하게 표정을 바로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휘아야. 만약 네가 내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제자 중의 하나였다면, 너도 다른 제자들처럼 가문 내의 사범들에게 무공을 배워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넌 단순한 화씨 가문의 제자가 아니라, 장차 우리 화씨 가문을 책임져야 할 후계자이다. 그러자면 다른 제자들보다 강한 무공과 정신력은 필수이고, 따라서 다른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수련을 해야만 한다.”
“…….”
“게다가 난 네게 엄한 스승이 될 자신이 없구나. 자상한 아비는 될 자신이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장차 네가 성장하는 데에 방해만 될 것이다.”
“그래도…….”
다시 화무휘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화진은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이번에는 휘영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영이도 마찬가지다. 넌 휘아의 호위이자, 휘아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다. 그리고 휘아가 장차 양지에서 우리 화씨 가문을 이끈다면, 넌 음지에서 휘를 도와야 한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는 불행한 과거는 모두 있고,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수련하여라. 특히 넌 휘아에 비해 조금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하기 때문에, 휘아보다 더욱 각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 화진은 일어난 후 앞장서며 크게 걸음을 옮겼다.
평소의 화진은 무척이나 부드러운 성격이었다.
그러나 한번 뜻을 굳히면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것을 추진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 화진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화무휘였다. 그리고 어차피 휘영은 감히 화진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때문에 두 꼬마는 잠시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지만, 결국 화진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귀곡은 지금부터가 진짜다. 절대 다른 것은 만지지 말거라. 무조건 내 뒤만 그대로 따라와야 될 것이며, 만약 내 말을 어기고 다른 곳으로 갔다간 영원히 짙은 안갯속을 헤매게 될 것이다.”
화진은 앞장서서 걸으며 재차 근엄한 어투로 두 꼬마에게 말했다.
두 꼬마는 깜짝 놀라 더욱 바싹 화진의 뒤를 따라갔다. 과연 화진의 말 대로였다.
얼마 동안 올라가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감각이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감과 방향감, 심지어 시간감마저 조금씩 무뎌졌고, 나중에는 지금 자신들이 어디를,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화진의 뒤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의식만은 더욱 또렷해져, 두 꼬마는 말없이 묵묵히 화진의 뒤만 바싹 따라갔다.
그런데 그렇게 걸으면서 휘영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북망산은 유명하긴 해도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닌데……. 왜 우리는 이렇게 한참 동안 걷고 있는 거지? 게다가 계속 오르막길을 오르면, 우리 같은 아이들은 힘들어서 쓰러지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지금 우린 호흡이 거칠어지긴 했어도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어쩌면 우린 지금 산을 오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린 지금 똑같은 평지를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쓰러지지 않는 것을 비롯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드디어 다 왔구나!”
마침내 화진의 발이 멈춘 것이다.
이어진 광경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화진의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주위의 짙은 안개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안개는 없었던 듯 점점 옅어지는 과정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고, 대신 초봄의 따뜻한 햇살만이 정수리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면에는 세상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절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 장가량의 작은 폭포였다.
폭포수는 연신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진 다음에는 작은 내를 이루어 왼쪽으로 구부정하게 흘러갔다.
그다음은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정자였다.
세심정(洗心亭)!
정자의 중앙, 작은 현판에 새겨진 이름이었다.
팔각형의 지붕이 특히 인상적이었으며, 냇가 바로 곁에 자리 잡고 있어서 폭포를 감상하기에 최적이었다. 게다가 세심정 주변으로는 아직 초봄인데도 불구하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계절을 잊고 만발했고, 심지어는 벌과 나비들마저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폭포와 세심정에서 시선을 우측으로 돌리면, 넓은 앞마당을 지나 작은 모옥이 보였다.
모옥은 흙으로 벽을 만들고 볏가리로 대충 지붕을 얹은 형태였는데, 주위의 그림 같은 절경과 어우러져 초라하기는커녕 고풍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혹시 신선이라도 사는 곳인가?’
두 꼬마는 입을 크게 벌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 작은 감탄사조차 내뱉지 못했다 .
그러나 둘의 생각처럼 귀신이나 신선이 사는 곳은 아니었다.
화진의 말처럼 이곳은 사람이 싫어 귀신을 흉내 내는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잠시 후,
“이제 오셨습니까? 화진 님의 기척을 느끼고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예상대로 혼자가 아니시군요.”
모옥이 열리며 누군가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헉!”
꼬마들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욱 깜짝 놀랐다.
그렇다고 상대에 대한 감탄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둘의 놀라움은 감탄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일단 상대는 화진과 비슷한 체격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회색의 평상복을 입었으며, 검은 머리카락은 산발을 해 조금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그의 얼굴이었는 바, 그는 눈, 코, 입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흰색의 붕대가 아니라, 피와 고름으로 인해 색이 바랜 붕대였다.
귀신보다 더 참혹한 모습!
결국 꼬마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눈을 감아 버렸다.
2.
그것은 정말 일품이었다. 아니, 단순히 훌륭함을 넘어서서 황홀하기까지 했다.
우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다.
봄날의 따사로운 기운은 몸을 나른하게 했고, 주위의 꽃과 나비는 이 나른함에 몽롱함을 더했다.
세심정에서 바라보는 작은 폭포는 언제 보아도 절로 감탄사를 자아냈으며, 특히 가운데에 놓인 작은 술상에는 냄새만으로도 황홀한 죽산홍(竹山紅)이 아예 단지째로 놓여 있었다.
화진은 몇 번이나 터널웃음을 터뜨리며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림 같은 절경을 감상하고,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또한 오랜 친구와 함께하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비록 동행한 두 아이들은 슬며시 술에 코를 가져갔다가, 냄새만으로 머리가 핑 돈다며 멀찌감치 도망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은 한가롭게 벌나비떼를 쫓으며, 초봄의 햇살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화진에게는 아이들의 이런 투정과 장난 또한 소소하면서도 즐거운 일의 하나였다.
화진과 붕대를 맨 괴인은 둘 다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둘은 그저 별다른 안주도 없이 붉은 빛깔이 감도는 죽산홍만 주거니 받거니 할 뿐이었다.
대략 대여섯 잔 정도 술을 들이켠 뒤.
이윽고 화진이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으며 기분 좋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미안하네. 이 아이들 때문에 온 것이지만…… 솔직히 자네의 죽산홍이 생각나서 온 것이기도 하네. 후후후!”
“아닙니다. 이쯤해서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괴인이 약간은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했다.
말을 들어 보니 화진이 괴인보다 신분이 높은 듯했다. 하지만 눈치를 보니 둘은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던 듯했고, 대화 또한 공손하긴 했지만 스스럼이 없었다.
괴인은 술잔에 담긴 찰랑이는 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것을 한 모금에 털어놓고, 화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아이를 데려오신 것이 솔직히 조금 의외였습니다. 정말 두 아이 모두에게 화씨의 무공을 가르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네. 물론 한 아이는 예정에 없었던 것이네만…… 둘 다 총명하고 신체 자질 또한 훌륭하니, 열심히만 노력한다면 장차 우리 화씨의 무공을 대성할 걸세.”
그러면서 화진은 흐뭇한 표정으로 화무휘와 휘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무휘는 상관운의 사건 이후 조금은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외출을 해서인지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다만 휘영은 여전히 나이답지 않게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는데, 어쨌거나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화무휘처럼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괴인은 잠시 복잡한 시선으로 화무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휘 도련님은 여전히 활기가 넘치시는군요.”
“후후! 너무 활기가 넘쳐서 문제라네.”
빙그레 미소를 머금는 화진.
그러나 괴인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두 꼬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저 두 아이들은 정말 정반대로군요. 한 녀석은 성격이 너무 밝고 세상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반면, 다른 한 녀석은 성격이 너무 어둡고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잘 보았네. 허나 어쩌면 그것은 저 두 꼬마들이 운명처럼 묶여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지. 또한 저 두 꼬마들이야말로 장차 우리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걸세.”
화진은 재차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얼떨결에 세심정에서 나오긴 했지만 휘영은 한가롭게 놀 여유가 없었다.
비록 몸은 화무휘와 함께 세심정 옆의 작은 화원에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세심정 안으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저 괴인이 앞으로 우릴 가르칠 사람이겠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위기만 보더라도 뭔가 복잡한 과거가 있는 것 같구나. 대체 저 괴인은 대가주님과 어떤 관계일까? 또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런 곳에 숨어 있는 걸까?’
그는 괴인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며, 귀를 쫑긋 세우고 화진과 괴인의 대화에 집중했다.
주로 말을 하는 쪽은 화진이었다.
괴인은 술을 마시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게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가끔 말을 할 때도 단답형으로 짧았다.
물론 사 장의 거리를 두고 있어 둘의 대화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휘영이 간간이 말을 거는 바람에, 온전히 둘의 대화를 엿듣는 데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둘의 표정이나 분위기, 간간이 들리는 몇 마디 말을 통해 대화의 내용을 대충 어림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괴인은 휘영을 제자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화무휘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휘영에 대해서는 가끔씩 그를 힐끗거리며 어쩐지 조금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화진이 목소리를 낮추고 한참 동안 뭐라 설득하자, 결국 괴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