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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3화)
제4장 무명(無名)(3)


휘영은 무슨 말로 화진이 괴인을 설득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화진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중얼거리듯 작게 한 말은 들을 수 있었다.
“저 아이……. 그림자 무공의 계승자가 될 것…….”
워낙 은밀한 말이어서 정확히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화진은 분명 몇 번이나 ‘그림자 무공’이란 단어를 힘주어 강조했다.
‘그림자 무공? 그게 뭘까?’
휘영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화무휘의 말에 따르면, 화씨의 무공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그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무십이검(天武十二劍)’이었다.
그 외에도 내공심법인 천무심결, 경공인 잔영신법이나 환영신법이 유명했다.
그러나 ‘그림자 무공’이란 것은 없었으며, 때문에 휘영은 그 이름조차 생소했다.
그의 생각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야! 왜 불러도 대답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곁에서 나비를 쫓으며 놀던 화무휘가 어느새 그를 보며 볼멘 목소리로 채근했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결국 휘영은 화무휘의 놀이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화진과 괴인의 대화, 그리고 괴인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 등은 모두 잠시 접어 둔 채.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도 아직은 삼월이었다.
게다가 산중은 해가 더욱 짧기 때문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하늘이 붉은색으로 곱게 물들었다.
두 꼬마들 또한 슬슬 지치고 피곤해졌을 무렵.
“휘아야, 영아! 이제 그만 올라오너라!”
화진은 큰 소리로 둘을 불렀다. 그리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둘로 하여금 정좌하고 있는 괴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도록 했다.
그 자신은 뒷짐을 진 채 세심정 한 켠에 우두커니 선 채로.
“아버지! 왜 내가 저 사람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죠?”
당연히 화무휘가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화진은 전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오히려 화무휘를 꾸짖었다.
“저 사람이라니? 저분이 바로 오늘부터 네 스승님이시다! 당장 스승을 대하는 예를 갖추지 못할까?”
그는 서슬이 퍼럴 정도로 단호했다.
‘역시 대가주님도 화를 내면 무섭구나!’
어찌나 무섭던지 곁에 있던 휘영도 크게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화진은 화무휘에게 언제나 자상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모습은 더욱 뜻밖이었다.
결국 화무휘는 다시 입을 삐죽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어서 휘영도 눈치를 살피다가 화무휘를 따라서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이제 스승을 대하는 삼배(三拜)를 올리도록 해라!”
잠시 후, 화진이 다시 근엄하게 말했다.
아니, 단순히 위엄이 넘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말속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제자 화무휘,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화무휘가 먼저 시키는 대로 절을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자 휘영, 스승님께 인사드립니다!”
이어서 휘영이 화무휘를 곁눈질하며 절을 올리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괴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정좌를 하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그는 새로운 제자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휘영의 마지막 삼배가 끝난 다음에야, 그는 실눈을 뜨고 가볍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평소의 화무휘였다면 상대의 이런 태도에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그는 낙양 제일가문의 후계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먼저 무릎을 꿇거나 예를 올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곁에서 화진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괴인은 벙어리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괴인이 가래가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화진 님께 이미 말은 들었을 터. 지금부터 과거에 너희가 누구였는지는 잊어라. 강호는 순간에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잔인한 곳이니……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너희는 누구보다 가혹한 수련을 극복해야만 한다.”
“제자 휘영, 명심하겠습니다!”
휘영은 재차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이미 화진에게 들은 말이었지만, 새로운 스승이 직접 말하니 그 느낌 또한 새로웠다.
물론 화무휘는 여전히 심통난 표정으로 대꾸가 없었다.
하지만 휘영은 난생처음 스승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화무휘가 여전히 뒷짐을 지고 곁에 선 채 근엄하게 덧붙였다.
“너희는 이곳에서 생활을 하여라. 이제부터는 저분이 너희의 스승이자 책임자이시다.”
“네? 이런 곳에서 살라고요? 얼마 동안이나요? 설마 일 년?”
그 말을 들은 화무휘가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화진은 무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화무휘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그럼 삼 년?”
“…….”
“그럼 오 년?”
“…….”
“그럼 칠 년?”
화무휘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때마다 화진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 설마 십 년?”
화무휘는 주룩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그제야 화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십 년! 앞으로 십 년 동안, 너흰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한다. 그러나 성취가 예상보다 늦을 경우에는 십 년 이상을 수련해야 하며, 만약 최악의 경우에는 평생 이곳에서 수련만 해야 될 것이다.”
“으아아앙!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나 집에 돌아갈래!”
결국 화무휘는 발버둥을 치며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화무휘는 기가 막혔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금세 범벅이 됐고, 목이 찢어져라 통곡이 터졌다.
생각만으로도 서러웠으며, 심지어는 난생처음으로 부친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화진은 여전히 근엄했다.
“너도 언제까지 아이가 아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실력과 책임감을 가져야하는 법! 이곳에서 그 실력과 책임감을 갖추어라!”
그리곤 화진은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세심정 밖으로 차갑게 몸을 돌렸다.
“싫어! 그런 게 어딨어? 나 집에 갈 거야!”
화무휘는 급히 아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려 했지만, 화진은 그마저도 뿌리치고 냉랭히 돌아섰다.
그리고 뭔가 번쩍였다고 느낀 순간, 화진은 어느새 경공을 펼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사도 없었다. 특별한 당부도 없었다.
화진은 말도 없이 우는 아들을 그 자리에 두고, 갑자기 도망치듯 바람처럼 사라졌다.
“으아아아앙! 나도 집에 갈래!”
화무휘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만이 메아리처럼 길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휘영은 오히려 그런 화무휘가 부러웠다.
‘아마 화진 님도 마음이 아플 거야.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떠난 것이 그 증거겠지? 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들었다. 아마 화진 님은 엄격하게 휘를 가르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휘를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을 거야.’
게다가 휘영은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
짐을 단단히 챙겨 산에 오를 때부터 당분간 화검장에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짐작했던 것이다.
다만 그 기간이 십 년이나 되는 것이나, 스승이라는 사람이 다소 특이하다는 점은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휘영은 괴인을 향해 공손히 물었다. 이때까지도 괴인은 석상처럼 단정히 그 자리에 정좌해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어르신을 스승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의 존함은 어찌 되십니까?”
그동안 화무휘에게 배운 어른들의 공손한 말투였다.
그제야 괴인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에 이채를 띠고 되물었다.
“호오! 넌 내가 무섭지 않느냐? 또 앞으로 이곳에서 어떤 혹독한 수련을 하게 될지 두렵지 않느냐?”
“어차피 제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라 대가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힘들겠지만 결코 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휘영은 전혀 동요됨이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을 물었느냐? 난 이름이 없다.”
“원래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잊은 것입니까?”
휘영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공손히 물었다.
‘저 녀석이 정말 시장의 거렁뱅이란 말인가? 오히려 진짜인 화무휘보다 더 침착하지 않은가?’
괴인은 내심 감탄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이어서 특유의 가래가 섞인 목소리로 담담히 대답했다.
“둘 다라고 하지. 그래도 굳이 내 이름을 부르고 싶거든 그냥 무명(無名)이라 불러라.”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잠시 후 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옥으로 들어갔고,
휘영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화무휘가 울음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화무휘의 그림자 역할인 휘영!
그리고 그림자처럼 이름이 없는 스승!
음지의 운명을 지닌 둘은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