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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4화)
제5장 화씨의 무공(1)
1.
언젠가 화진이 지나가는 말처럼 화무휘에게 물었다.
“아들아. 귀곡에서 무명 스승과 고된 수련을 할 당시, 만약 휘영이 없었다면 어땠을 것 같느냐? 수련에 따른 인내와 고통, 산중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십 대에는 누구나 겪는 방황까지……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네가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발전할 수 있었을 것 같느냐?”
어떻게 보면 화무휘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화무휘는 잠시 고민 끝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휘영 덕분입니다. 물론 무명 스승님의 가르침도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제게 자극이 되었던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는 휘영의 필사적인 자세였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의 화무휘와 휘영은 그 출발선이 전혀 달랐다.
먼저 화무휘는 어려서부터 각종 영약을 복용하고, 기초적인 좌공을 통해 내공의 토대를 단단히 마련한 상태였다.
삼재검법 등 기초가 되는 무공도 제법 훌륭히 익힌 상태였으며, 그 외에도 훌륭한 사범들의 지도까지 받은 덕분에, 낙양 일대의 또래 중에서는 당해 낼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반면 휘영은 무공의 무자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었다. 오히려 영양이 부족하여 근골도 허약한 편이었다.
또한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기초를 시작하기에 조금 늦은 나이였고, 심지어는 내공이란 무엇인지 등 무공의 기본적인 개념마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화무휘는 수련을 함에 있어 자칫 나태해질 수 있었다. 특히 기초를 다잡는 초기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까지 더해져, 화무휘는 더욱 수련을 게을리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를 일으킨 것은 무명 스승의 엄한 가르침이 아닌, 필사의 각오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휘영이었다.
휘영의 하루는 정말 길었는데, 일단 새벽에 눈을 떠서 세심정에서 좌공(坐攻)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화씨 가문의 내공심법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무심결(天武心結)이라는 내공심법이다. 그러나 좌공의 기본자세조차 갖추지 못한 네가 당장 천무심결을 익히는 것은 어림없다. 먼저 태극기공(太極氣孔)을 익힌 후, 천무심결을 배우도록 하겠다.”
태극기공.
이름은 제법 그럴싸하지만, 사실 그것은 강호의 무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류 내공심법이었다.
물론 대단한 위력이나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배우기 쉽고, 천하의 모든 내공심법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에 내공심법의 입문으로는 적격이었다.
좌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좌공을 한 뒤, 오전에는 본격적으로 체력과 근력을 수련했다. 다만 휘영은 출발이 너무 늦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체력과 무공의 기초 자세를 병행하여 수련했다.
방법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무식했다.
마보부터 시작해 기초적인 자세를 배우되, 사지에 각각 한 근의 모래주머니를 찼고 수련한 것이다.
“단순히 내공이 높다고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법이나 외공은 안정되고 정확한 자세가 필수적인 바, 그것은 바위처럼 단단한 근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무명 스승은 내공 못지않게 체력과 근력을 강조했다.
처음엔 당연히 힘들고 불편했다. 게다가 휘영은 또래보다 근골이 약했기 때문에, 도합 네 근의 무게도 버거웠다.
그러나 무명 스승은 내공을 수련하는 오전을 제외하곤 언제나 모래주머니를 차도록 했고, 그 무게 또한 익숙해질 때쯤이면 조금씩 증가했다.
그래도 오후에는 힘들지만 재미있는 수련이 이어졌다. 바로 본격적인 무공의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삼재검법 같은 기초적인 무공들만 배웠지만, 처음 무공을 접하는 휘영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다시 한 시진 동안 태극기공을 연마했고, 그다음에는 모옥에서 불을 밝히고 자정까지 글공부를 했다.
“무사는 단순히 무공만 익혔다고 다 무사가 아니다. 오히려 무공은 본질적인 수단이 아니라, 정신의 수양을 위한 일종의 보조적인 수단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무학의 총본산이라 일컬어지는 소림사만 하더라도, 무공은 스님들이 수양 도중 흐트러질 수 있는 몸을 단련하기 위한 수단에서 출발했다. 즉, 무사는 그에 맞는 학식과 품격을 갖춰야만 진정한 무사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 스승의 무사에 대한 철학이었다.
휘영은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냈다. 물론 하루가 다 모자랄 지경이고, 심신은 늘 피곤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불평도 없이 묵묵히 스승의 모든 가르침을 흡수했다. 힘들기는커녕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늘 배움에 목말랐던 그에게 있어, 이런 고달픔은 눈물이 날 정도의 행복이었던 것이다.
화무휘에게는 이 모든 게 큰 충격이었다. 화검장에서 사람들의 시중만 받으며 귀하게 자란 그에게 있어, 이런 필사의 수련은 충격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저놈은 수련이 힘들지도 않은가?’
솔직히 화무휘는 휘영이 인간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화무휘는 자존심이 강하고 누군가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그는 휘영이 자신의 소유물이자 부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휘영에게 지는 것을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휘영에게는 질 수 없다! 저놈이 한다면, 나도 한다!’
화무휘는 휘영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휘영이 빠르게 변하는 것과 맞추어, 그 또한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고 진지하게 수련에 임했다.
선의의 경쟁!
비록 화진이나 무명 스승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화무휘와 휘영도 서로를 의식하며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선의의 경쟁은 좋은 자극제가 되어, 두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해 갔다.
2.
무명 스승은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매일 갈았음에도 붕대는 고름으로 범벅이 되었고, 때론 심한 기침과 함께 각혈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약도 소용이 없는 듯 증상은 갈수록 심해졌고, 그 횟수 또한 더욱 잦아졌다.
그러나 무명 스승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꼿꼿하게 두 제자들을 대했고, 게다가 가르치는 틈틈이 살림을 책임지면서도 조금의 소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려는 듯, 두 제자들보다 더욱 열의를 보였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무명 스승은 본격적인 화씨 무공의 전수에 돌입했다.
불과 몇 달이 지났지만, 화무휘와 휘영은 처음 귀곡에 왔을 때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키와 골격이 커지고, 전체적으로 더욱 늠름해졌다.
눈에서도 날카로운 안광이 조금씩 서리기 시작했고, 어쩐지 제법 강호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무사의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구월 첫째 날의 이른 아침.
무명 스승은 폭포 옆의 세심정에서 앉아 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너희가 이 귀곡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나 되었구나. 우선 휘아는 워낙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기초를 닦은 덕분에 앞으로의 진도가 조금 수월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칭찬을 받은 화무휘는 기분이 좋아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무명 스승은 휘영에 이르러서는 화무휘와 다른 평을 내렸다.
“하지만 영이는 솔직히 아직 본격적인 화씨 무공을 익히기에 조금 무리이다. 휘아와는 기초적인 출발이 워낙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비록 시간이 부족하여 이쯤에서 기초를 접고 본격적인 무공의 수련을 시작할 것이다만…… 이 부족한 기초는 앞으로도 계속 영이의 발목을 잡을 것이고, 따라서 앞으로 영이가 휘아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몇 배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칭찬보다 채찍에 가까운 말을 들은 휘영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휘영이 스승의 말에 거부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도 자신보다 화무휘가 뛰어남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둘이 비무를 하면 언제나 압도적으로 이기는 쪽은 화무휘였다.
싱글거리며 만족하는 화무휘.
반면 굳어진 표정으로 열의를 불사르는 휘영.
무명 스승은 이 상반된 두 제자들을 둘러본 후, 잠시 후에야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선 너희가 익힐 첫 번째는 모든 화씨 무공의 근간을 이루는 내공심법, 바로 천무심결이다! 지금까지 너희가 수련한 태극기공은 이 천무심결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다만 태극기공은 천하에서 가장 안정되고 쉬운 내공심법인 바. 때문에 본격적으로 천무심결에 들어가기에 앞서 기초적인 기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에는 탁월한 효능이 있다.”
그 말을 듣자, 두 제자는 금세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으며, 넘치는 격앙으로 인해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천무심결(天武心結)!
스승의 말처럼 화씨의 모든 무공의 근원이자, 화씨 가문의 무사들 중에서도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비전(秘傳)이다. 현재 화씨 가문에서 이 천무심결을 익힌 자는 대가주 화진이나 오대검협, 그리고 소수의 일대 제자들뿐이며, 이 천무심결을 익혀야만 비로소 진정한 화씨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고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런 제자들의 심정을 아는지, 무명 스승은 다시 약간의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천하의 상승 무공들은 대부분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북해 빙궁의 전설로 내려오는 빙백신공은 얼음보다 한랭한 기운으로 유명하지. 천무심결 또한 이러한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천무심결의 장점은 다른 내공심공에 비해 내력의 출수와 수발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자유자재로 운기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어째서 이런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내공심법이 필요한지는 이다음부터 익히게 될 화씨 가문의 진짜 무공들과 관계가 깊다.”
스승은 기력이 부족한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 천무심결을 익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기초가 탄탄한 휘아는 정통의 방식대로 수련을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기초가 부족한 영이는 약간은 속성의 방식으로 수련을 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화무휘는 대번 고개를 갸웃했다.
“속성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왜 영이만 속성의 방법으로 수련을 합니까?”
그러자 스승은 알 듯 말 듯한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상누각이란 말이 괜히 나온 줄 아느냐? 물론 속성은 정도보다 성취가 조금 더 빠르다. 따라서 언뜻 보기엔 속성이 정도를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기초를 생략하고 성취에만 집중하면 당연히 사상누각처럼 부실해질 수밖에 없는 바, 필연적으로 속성은 정도에 비해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단점이란 또 무엇입니까?”
화무휘의 물음은 계속되었지만, 무명 스승의 대답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속성의 치명적인 결함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며 더 이상의 대답을 회피했다.
속성의 당사자인 휘영 또한 의문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치명적인 결함이라?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평범한 약점은 아니겠지? 그런데도 왜 스승님은 내게 속성을 익히라고 하신 걸까?’
그러나 휘영은 이런 의문을 내색하지 않았다. 일단 출발이 늦은 그로서는 화무휘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속성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한 무명 스승이 속성을 가르친다면…… 그는 거기에 반드시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