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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무문 1권(4화)
第三章 숨바꼭질(2)


유소혜를 비롯한 일행들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천도무문의 사당 뒤쪽에는 외부로 통하는 작은 문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그 문은 장소팔이 주로 이용하는 문이기도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폐장원에 도착한 장소팔은 습관처럼 사당의 뒤에 있는 창고에 식자재를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돌연 미친 사람처럼 텅 빈 창고를 향해 중얼거렸다.
“있으면 좀 도와주지.”
장소팔의 말이 창고를 울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길.”
장소팔이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야야, 이번에는 어제 팔다 남은 흑돼지 찜이랑 아버지 몰래 술도 한 병 가져왔다. 정말 안 도와줄 거냐? 그럼 일 끝내고 그냥 간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반응은 있었다.
장소팔의 등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륵 접근하고 있었다.
장소팔이 들고 온 식자재를 창고 한 칸에 내려놓고 다시 다른 재료를 옮기기 위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이런.”
어느 틈에 나타난 것일까?
그의 뒤에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 청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장소팔 역시 히죽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깜짝이야, 아직도 재밌냐? 숨바꼭질이.”
청년이 배시시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없다.”
청년의 말에 장소팔이 허탈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벌써 백 년째 외상인 건 알고 있냐?”
청년이 다소 쑥스러운 표정으로 장소팔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배달 안 해 줘도 돼.”
장소팔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청년을 바라보았다.
“설마, 일전에 말했던 그 봉문이라는 것이 마침내 풀린 거냐?”
청년이 이를 인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왠지 오늘 술을 꼭 챙겨 오고 싶더라니.”
장소팔의 말에 청년이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장소팔이 말했다.
“잘됐네. 그럼 후딱 돈 벌어서 외상값부터 갚아라.”
청년이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장소팔을 바라보았다.
“누가 장사꾼 아들 아니랄까 봐.”
장소팔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장소팔의 뒤를 청년이 졸졸 따라나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 사이였다.
장사성의 변두리에 위치한 이 일대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때문에 장소팔이 동년배의 친구를 찾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배달을 따라온 이곳 폐장원에서 자기 또래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폐장원을 지키는 다섯 명의 미친 늙은이의 제자 소무린.
그렇게 두 사람의 우정은 이미 십 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장소팔의 입장에서 보면 무림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족속이었다.
그깟 선대의 약속이 무엇이라고 이곳의 사람들은 봉문이라는 글자를 대문에 떡하니 붙여 두고는 일체 외부의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그래서 소무린을 만나려면 장소팔은 언제나 이곳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찾는다고 무조건 들여보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한 달에 하루 식자재를 배달하는 날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러고 보면 꼭 이상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그의 가족 역시 수대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매달 이곳을 찾았다.
심지어 백 년 전부터는 외상으로 식자재를 공급하고 있었다.
남자의 약속이라나. 장사꾼에게 신용은 중요하지만 아마도 이렇게 백 년 동안 외상으로 물건을 대 주는 곳은 대륙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며 매달 투덜거리는 아버지의 푸념도 이미 십 년 이상을 계속되어 왔다.
‘그럴 거면 거래를 끊던가?’
장소팔이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만약 그것이 자신의 대로 이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푸념을 하면서 그의 아들과 함께 이곳에 왕래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믿음의 이유는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굳이 찾는다면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이웃 정도일까?
식자재의 운반이 끝나자 두 사람은 창고에 비치된 식탁 위에 준비된 풍운각이 자랑하는 전통의 통돼지 찜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솔직히 장소팔은 소무린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사부라 불리던 다섯 늙은이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늙은이가 죽은 지 이미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의 마지막 사부가 죽을 당시 소무린의 나이는 열다섯, 이후 소무린은 지금까지 이렇게 홀로 장원을 지키고 있었다.
문 앞에 버려진 자신을 키워 준 은인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로 삼 년을 이곳에 갇혀 지낸다는 것이 장소팔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늙은이들이 죽고 난 이후에도 몇 번을 찾아온 자신을 되돌려 보내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직 한 달에 한 번 식자재를 운반하는 날만 출입을 허락하는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이해를 하자면 개떡 같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까?
풍운각이 유독 통돼지 찜과 소면만을 고집하는 이유하고 비슷한 것일까?
아무튼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 일이었다.
“아무튼 축하한다.”
장소팔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면서 환한 미소로 가지고 온 술병을 꺼내 들었다.
소무린이 피식 웃으면서 기다렸다는 듯 술병을 낚아챘다.
두 사람이 대작을 시작한 것은 이미 다섯 달 전이었다.
정확히 소무린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하면서 장소팔이 그의 아버지 몰래 꼬불쳐 온 술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쓴 것을 왜 마시냐 싶었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술이 없으면 왠지 허전하기까지 했다.
몽롱한 기분, 하지만 오늘은 왠지 이전의 몽롱한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량이 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삽시간에 술병이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새 텅 비어 버리자 장소팔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술이 떨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너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구나.”
소무린이 환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소무린은 장소팔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접해 왔다.
갇혀 지낸 그에게 세상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장소팔이었던 것이다.
물론 장소팔 역시 기껏해야 객점의 재료를 사기 위해 장사성 내부를 몇 번 드나든 것에 불과했지만 객점을 찾는 손님들로부터 전해 듣는 이야기는 다시 이곳으로 흘러들어 와 두 사람에게 그야말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장소팔이 소무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소무린은 자유의 몸인 것이었다.
장봉상이라는 두꺼운 오랏줄에 묶여 있는 자신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몸인 것이다.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소무린의 말에 장소팔이 아버지 장봉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사해야지. 내가 너처럼 한가한 줄 아냐?”
그러고는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야, 일단 청소 좀 해라. 너의 눈에는 저기 쌓인 먼지들이 안 보이냐?”
장소팔의 타박에 소무린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여기가 무슨 객점이냐?”
장소팔이 한심하다는 듯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도 어르신들께 인사는 하고 가야겠지.”
장소팔의 말에 소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장소팔은 그 길로 사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다녀갈 때면 언제든 꼭 사당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이것 역시도 전통이라면 전통일 것이다.
사당에 들러 위패를 향해 가볍게 합장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장소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의 주인이십니까?”
간드러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장소팔이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장소팔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변한 지 오래였다.
아버지 몰래 장사성의 유흥가에 들러 화려하게 치장한 기녀들을 훔쳐본 적이 있었다. 몸을 상품으로 하는 그야말로 아리따운 여인들, 하지만 그런 기녀들조차도 그다지 치장하지 않은 눈앞의 여인처럼 설렘을 주지는 않았다.
장소팔이 살며시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유소혜 역시 다소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장소팔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하룻밤 신세를 졌습니다.”
순간 장소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런데…….”
좀처럼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 환한 빛이 아른거리는 것이 몸이 붕 하고 솟아오르는 듯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너무나 순박한 모습에 유소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음식이라도 조금 얻을 수 있을까요?”
비로소 장소팔은 소무린을 떠올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소무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여인이 검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무림인인 듯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숨어 버린 소무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저, 그것이…….”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귓전으로 소무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행은 저 여인을 포함해 네 명이다.”
장소팔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유소혜를 바라보았다.
그런 장소팔의 행동에 유소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무리한 부탁이라면 거절하셔도.”
유소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장소팔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소팔은 헐레벌떡 사당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황급히 창고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소무린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장소팔의 뒤를 따르면서 유소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소혜가 보기에는 장소팔은 무공이라고는 전혀 익히지 않은 인물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제 보았던 검은 인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제 그 검은 인영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제 사당에 불을 켠 인물은 누구였을까?
족히 백 명은 머무를 수 있을 듯 보이는 드넓은 장원, 하지만 자욱이 쌓인 먼지로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장소팔의 모습은 좀처럼 이 장원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사당에서 보인 그의 경건한 모습으로 보아 그가 이 장원과 관련된 인물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문득 어젯밤의 꿈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입술을 훔치던,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정확히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꾸는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와 입맞춤을 하는 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그런 꿈을 꾼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이미 동이 튼 상황임에도 복도에 불침번을 섰던 진승지가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굳이 그를 깨우지 않고 간단하게나마 소세를 위해 우물을 찾았다. 그때 마침 사당으로 들어가는 장소팔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창고에 도착한 장소팔은 즉시 요리를 시작했다.
창고에는 요리를 위한 도구들이 한쪽에 비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소무린이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기에 요리 기구는 물론 식탁까지 모두 이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장소팔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너무나 자연스레 움직이는 장소팔의 모습에서 유소혜는 그가 이곳의 관계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젯밤의 그는?’
이내 장소팔의 요리가 그런 유소혜의 상념을 깨고 있었다.
장소팔은 언젠가 성내의 번화가에 번듯한 음식점을 낼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지금까지 나름대로 비장의 음식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오늘 그 비장의 음식들을 이곳에서 선보일 작정이었다.
장소팔의 민첩한 칼질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고, 그 냄새는 자연스레 유소혜의 입에 군침이 고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유소혜의 말에 황급히 장소팔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의당 주인이 손님을 대접해야죠. 헤.”
헤벌레, 헤픈 웃음을 짓는 장소팔을 향해 유소혜가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가서 일행들이나 모셔오도록 하시지요.”
장소팔의 말에 유소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창고를 벗어나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일행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유소혜는 진승지 등을 깨우기 위해 장원의 본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유소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누군가가 장소팔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재밌냐? 숨바꼭질.”
장소팔의 말에 소무린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거 못 보던 요리다.”
장소팔이 화들짝 놀라면서 살짝 얼굴을 붉혔다.
“무슨 소리냐, 이건 분명 전에 네게 해 줬던 요리와 똑같은 건데.”
소무린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냐, 어찌 되었건 내 몫까지 남겨 둬라.”
장소팔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소무린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그의 목소리가 장소팔의 귓전을 두드렸다.
“왔다.”
소무린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 창고의 문이 열렸다.
장소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준비된 요리를 식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