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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7화)
제6장 환골탈태(1)
1.
훗날, 누군가가 휘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렸을 때 왜 귀곡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천무십이검의 총론을 전수받은 뒤, 귀곡에서 도망쳤으면 화무휘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휘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귀곡에 온지 사 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전 실제로 귀곡에서의 탈출을 시도했었습니다.”
“역시! 그렇다면 어째서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습니까? 귀곡을 둘러싼 진법 때문이었습니까?”
휘영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은 후회와 미련에 잠긴 표정으로.
그러다가 잠시 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차라리 진법때이었으면 제가 그토록 오랫동안 화무휘의 그림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귀곡에 들어와 무공을 익힌 순간부터, 제 목숨은 이미 화무휘의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
준비는 끝났다!
휘영은 몇 차례나 계획을 속으로 점검해 보았다.
때는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이월 말. 그가 귀곡에 온 지도 벌써 사 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 돈은 화무휘의 작은 팔찌 하나를 슬쩍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아이들이 장신구로 차는 작은 팔찌였지만, 금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면 몇 달은 돈 걱정 없이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도 이제 예전의 그 힘없는 거지 꼬마가 아니었다. 지난 사 년 동안 키와 골격도 예전보다 훨씬 커졌고, 기초적인 무공이지만 열심히 수련한 덕분에 자신감도 많이 붙은 상태였다.
‘여기서 계속 무공을 배우고 싶지만…… 여기에 끝까지 남아 있으면, 난 아마 영원히 화무휘의 그림자로 살아갈 것이다. 뭐, 화무휘의 그림자로 지내면 먹고살 걱정은 없겠지만…… 그것은 내 앞날과 모든 꿈을 그에게 뺏긴 대가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인생을 찾아 도망가자!’
그는 이렇게 결심하고 지난 몇 주 동안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했다.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에게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만으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계획도 이미 짜 있었다.
‘일단 화무휘의 장신구를 팔아 옷과 식량을 준비하고, 어디 먼 산속에 숨어서 혼자 수련을 계속하자. 그리고 그동안 익힌 무공을 계속 수련하면 일정 수준 이상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하산하여 지방의 어느 부유한 집안의 호위무사라도 하던지, 아니면 작은 무도관이라도 하나 차려 조용히 지내자. 비록 화검장에 남은 것보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훨씬 좋은 거 아닐까?’
어떻게 보면 야망이나 야심은 전혀 없는 소시민적인 삶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 년이 넘게 화무휘의 대역으로 생활하면서, 그는 사람이 자신만의 인생을 갖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무명 스승이었다. 그에게 있어 무명은 단순히 무공을 가르쳐 준 스승 이상이었다. 그에게 무공은 물론, 학문을 가르쳐 주었고,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비록 언제나 차갑게 그를 대했지만, 그 차가움 속에 담긴 배려를 모를 만큼 눈치가 없는 그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무명 스승에게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동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경악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그는 무명 스승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나도 스승님께 화씨의 다른 무공을 배우고 싶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미뤘다간 영원히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약간의 고민 끝에, 결국 그는 결심을 굳힌 한편, 실행에 옮기기 위해 슬며시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작은 모옥 안.
우선 방의 가장 오른편에 누운 화무휘는 낮의 고단한 수련 때문인지 낮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누운 스승은 별다른 기척이 없었는데, 이따금씩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로 잠이 든 것이 확실했다.
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옷을 비롯한 다른 준비물들은 이미 바깥에 몰래 놔뒀고, 심지어 며칠 노숙할 것을 대비하여 육포 등의 비상식량까지 챙겨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가 막 모옥의 방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너라면 아마 그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낮지만 분명한 말투가 그의 귓전에 들렸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스승은 여전히 눈을 감고 별다른 기척이 없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화무휘도 그대로였고, 때문에 언뜻 듣기에는 스승이 잠꼬대라도 한 것 같았다.
‘분명 내게 한 경고다!’
휘영은 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잠시 망설였다.
스승이 여전히 자는 척하는 것으로 보아 그를 제지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승이 잠꼬대처럼 한 말은 분명 그를 향한 경고였고,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
끼이이익!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맑았고,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밤새들의 울음소리 또한 그대로였다. 그러나 스승의 경고 때문인지 자꾸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심호흡과 함께 잠시 크게 도리질을 쳤다. 그리곤 이어 짐짓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옥의 옆에 흐르는 개울가로 갔다.
‘밖으로 나가는 데 있어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이 안개다. 아마도 스승님이 진법을 펼쳐 놓은 것이겠지. 그러나 진법은 결국 환상! 그러니 환상에 속지 않고 이 흐르는 개울만 따라가면 곧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개울을 따라 걸어갔다.
처음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안개가 조금씩 짙어진 했지만, 개울에 의지하여 걸어가니 방향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겨우 반 각 후.
그는 개울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간다는 자신의 꾀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를 절감해야만 했다.
***
“여긴 어디지?”
휘영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공간감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 걷기만 할 뿐, 자신이 어디로 얼마나 걸었는지 또한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 개울을 따라 걸은 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황당하게도 곁에 있어야 될 개울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지금껏 따라왔던 개울 또한 어느새 안갯속에 파묻혔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지평선!
전후좌우를 비롯해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하얀색 안개가 전부였다.
‘내 준비가 소홀했구나! 좀 더 단단히 준비를 했어야 됐는데……. 아무리 환각이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제야 그는 스승의 경고를 떠올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마나 안갯속을 정처 없이 헤맸을까? 마침내 서서히 힘이 빠지고 지치기 시작했다. 다리는 천근처럼 무거워졌고,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으며, 전신은 이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뭔가 이상하다. 어째서 평소보다 체력이 빨리 떨어지는 것 같지? 혹시 이것도 진법의 영향인가?’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있었다. 등에 맨 봇짐에는 약간의 식량과 물도 있었고, 날이 밝아지면 양기의 영향으로 인해 진법이 약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두근! 두근!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가슴이 왜 이러지?’
더욱 당황한 휘영.
그러나 심장의 이상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어서 뒷머리를 때리는 격렬한 두통이 찾아왔고, 두통은 신경을 타고 사지로 뻗어 나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발전했다. 이와 동시에 수천 개의 바늘이 전신을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으며, 당연히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는 사방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으아아악!”
결국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처음 고통이 찾아오고 불과 몇 초 남짓한 시간!
혹시라도 운기를 해서 속을 진정시킬 여유도 없었다. 고통은 너무도 갑자기, 그리고 너무도 심하게 그의 전신을 엄습했다.
“사, 사람 살려…….”
신음을 토해 내며 안개를 향해 헛되이 손을 뻗어 봤지만, 너무도 격렬한 고통으로 인해 신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는가?’
결국 그는 한계를 뛰어넘은 고통에 시달린 끝에,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그는 저 멀리 안갯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 같은 환영을 보았다. 아니, 환영을 본 것 같았다.
이곳에 익숙한 듯 안개를 헤치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너무나도 괴로운 고통으로 인해 그 그림자가 실제 사람인지도 자신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무명 스승의 그림자 같았다.
***
휘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온몸이 상쾌함을 느꼈다.
처음엔 정신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잠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지금 자신의 처지와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은은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지금 그는 귀곡의 폭포 옆 세심정에 정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등의 혈도를 타고 부드러운 내력이 흘러오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자신의 운기를 도와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만 외부의 진기는 미약하고, 또 자신의 운기를 도와주는 것이 조금 어설펐는데, 아마도 무명 스승의 아니라 화무휘가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랬지! 갑자기 이상한 통증이 와서 바닥을 뒹굴었지!’
이윽고 그는 어느 정도 정황이 파악됐다. 그렇다. 그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환각이 아닌, 진짜 무명 스승의 그림자였다.
그 때, 그의 귀에 누군가의 전음이 들렸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미친 망아지처럼 혈맥을 날뛰고 있는 진기가 아직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카랑카랑한 쇳소리 같은 목소리. 볼 것도 없이 무명 스승의 것이었다.
약간은 비웃는 듯한 무명 스승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네가 속성으로 익힌 천무심결은 정통에 비해 여러 장점이 있다. 일단 익히기 쉽고, 내공의 성취 또한 빠르다. 그러나 기본을 무시하고 성취에만 집중을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때때로 내공이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나 미친 듯이 날뛰는 부작용이 있다. 이 고통은 앞으로 천무심결의 성취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심해질 터!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정통의 천무심결을 익힌 자가 지금처럼 운기를 도와주거나, 혹은 화씨 가문의 비전인 천룡단(天龍丹)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것뿐이다!”
‘……!’
망연자실!
휘영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의식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다.
‘이미 늦은 건가? 이제 난 영원히 화무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비록 운기 중이어서 억지로 감정을 자제했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크게 울고 싶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시 스승의 전음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어리석구나! 참으로 어리석구나, 휘영아! 설마 화진이 아무런 생각이 없이 널 여기에 맡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네가 앞으로 성장하여 머리가 커지고, 또 무공에 자신이 생기면 언제든 도망칠 생각을 할 텐데…… 설마 화씨 가문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
“화씨 가문을 우습게 보지 마라. 여기서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순간부터…… 넌 이미 영원한 화씨 가문의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러한 금제(禁制)는 비단 천무심결만이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이중, 삼중으로 널 옭아맬 것이다!”
‘아아!’
휘영은 더욱 절망했다. 섣불리 화무휘를 따라나선 경솔한 선택을 후회했고, 앞으로도 선택의 여지가 없음에 기가 막혔다.
그런데 문득, 그 충격의 와중에서 휘영은 돌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스승님은 왜 자신이 직접 내 운기를 도와주지 않고, 자고 있는 화무휘를 깨워 내 운기를 돕도록 했을까? 게다가 화무휘는 아직 누군가의 운기를 도와주기에 조금 어설프지 않은가? 어쩌면 혹시…….’
그는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무명 스승의 행동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
‘혹시 스승님도 나처럼 천무심결을 속성으로 익힌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