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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전설 1권(18화)
제6장 환골탈태(2)
2.
세월유수.
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갔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거스를 수도 없었다.
화무휘와 휘영.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귀곡이었지만, 두 명의 소년도 이러한 시간의 강물 속에서 예외 없이 떠내려갔다.
물론 한창 혈기가 왕성한 십 대를 귀곡에서만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소년도 한창 예민해지는 사춘기를 당연히 겪어야만 했고, 오히려 외로운 산중의 수련으로 인해 더욱 고뇌에 찬 사춘기를 보냈다.
아아, 그렇다고 두 소년이 남들보다 특별한 사춘기를 보낸 건 아니었다. 비록 말은 질풍노도라고 거창했고, 당시에 생각해 보면 너무도 진지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이 일탈들이었고, 먼 훗날에 이르러서는 절로 미소가 머금어지는 잔잔한 추억들이었다.
사춘기의 두 소년도 다른 또래들처럼 여자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으로 인해 뜬눈을 밤을 지새웠다. 때론 자유가 그리워 몰래 귀곡을 빠져나가 낙양의 밤거리를 주유하기도 했고, 때론 스승이 담가 놓은 술을 몰래 훔쳐 마시다가 사고를 치기도 했다. 때론 말도 안 되는 사소한 논쟁을 벌이다가 심각하게 다투기도 했고, 자신들의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성장통이었다. 방황의 끝은 새로운 성장의 시작이었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두 소년은 아픔을 통해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갔다.
***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귀곡이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아주 특별한 날이 있었다.
무명 스승이나 화무휘의 생일은 아니었다. 설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도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는 날도 아니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은 더더욱 아니었다.
삼월의 첫째 날.
화무휘와 휘영이 귀곡에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날이자, 무명 스승이 매년 정기적으로 둘의 성취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이 날의 평가로 인해 그들의 일 년간 성과가 평가되었고, 그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인지가 정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삼월의 첫째 날은 그들이 십 대의 마지막이 되는 해였다.
단지 십 대의 마지막 시험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혹은 오랜만에 화진이 직접 평가를 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날은 천무십이검의 최종적인 성취를 점검하는 날이자, 그들의 하산 여부를 결정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겨울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쌀쌀한 정오 무렵.
화진은 한 손에 목검을 든 채 귀곡의 공터에 서 있었다. 무명 스승이 공터의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언제나처럼 애써 감정을 숨기고 최대한 냉정한 표정으로.
약 삼 장의 거리를 두고, 그의 맞은편에는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소년이 서 있었다. 아니, 둘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이젠 청년이라 부르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일단 키만 보더라도 육 척 가량의 큰 키였다. 약간 마른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체형이었고, 어쩐지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는 것 같았다.
비단 체격만이 아니었다. 얼굴은 보자면 확 눈에 띌 정도로 미남형은 아니었는데,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부드러운 미소로 인해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가운데서도 눈빛은 차분하게 빛났고, 오랜 산중의 수행으로 인해 날카로운 기색도 눈빛 깊숙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물론 두 청년은 귀곡에서 모든 십 대를 바친 아이들, 바로 화무휘와 휘영이었다.
화진은 한참 동안이나 두 청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십 년 동안 많이 컸구나!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다!’
비록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그가 아이들을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말이 좋아 산중의 수련이지, 가장 혈기왕성하고 호기심이 강한 십 대를 적막한 산중에서 보내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에 약간의 일탈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일탈로 인해 아이들은 오히려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칭찬은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아직은 칭찬을 하기에 조금 일렀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화진이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제부터 지금까지 너희가 이룩한 모든 성취를 시험해 볼 것이다.”
평소보다 더욱 차가운 어투.
꿀꺽!
두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화진은 잠시 둘을 교대로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시험은 간단하다. 이제부터 둘이 전력을 다해 내게 도전하여라. 물론 너희가 날 꺾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너희가 훌륭한 협공을 한다 해도…… 아직까지는 날 넘어서기에 조금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평가할 것은 너희가 그동안 얼마나 수련에 전력을 다했느냐 하는 과정이지, 너희가 수련을 통해 얼마나 큰 성취를 이뤘는가 하는 결과가 아니다.”
즉, 수련의 결과보다는 그동안 그들이 흘린 땀과 그 진정성을 평가하겠다는 뜻이었다.
두 청년은 이미 무명 스승을 통해 시험에 대해 전해들은 상태였다. 때문에 둘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후 수중의 목검을 고쳐 잡고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이심전심!
‘영! 이제부터 어디 한 번 신나게 놀아 볼까?’
‘좋습니다! 저분께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드립시다!’
하루, 이틀 함께 수련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둘은 간단히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뜻이 통했다.
다만 똑같은 외모와 달리, 둘의 자세는 완전히 상반됐다.
먼저 좌측의 화무휘는 공격 위주의 자세를 취했다.
그는 가볍게 구부린 왼발에 무게중심을 싣고 앞으로 내밀어, 언제든 앞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수중의 목검 또한 화진의 가슴을 겨누는 공격 형태였고, 눈빛은 화진의 빈틈을 찾기 위해 번뜩였다.
반면 휘영은 화무휘를 보조하면서 조금은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화무휘처럼 왼발을 구부리고 앞으로 내밀었으나, 무게중심은 오른발에 두어 나무의 뿌리처럼 근본을 단단히 했다. 수중의 목검 또한 수직으로 치켜들어 방어를 하는 형태였고, 시야는 화진의 목검에 집중하여 언제든 상대의 출수에 대비했다.
그 모습을 본 화진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들, 제법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군. 우선은 공격과 수비로 역할을 분담한 건가? 아마도 초반엔 탐색전을 벌이겠다는 의도겠지?’
그는 자세 하나만으로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하지만 별다른 자세는 취하지 않고, 그저 오른손으로 목검을 쥐고 축 늘어뜨린 자연스러운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때 화진과 두 청년의 거리는 약 삼 장가량.
두근! 두근!
둘은 평소 스승과 비무를 할 때보다 심장이 더욱 크고 빠르게 고동쳤다.
화진의 시선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입안은 가뭄처럼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묘한 대치를 하길 얼마.
“그럼 선수를 양보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먼저 손을 쓰겠습니다!”
마침내 화무휘가 큰 소리로 외치며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화진을 향해 돌진해서 불과 몇 발자국만으로 단숨에 이 장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곤 이어서 찰나적으로 그의 움직임이 정지된 것 같더니, 돌연 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영신법인가? 제법이군!’
화진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제부터였다.
잠시 후, 화무휘가 다시 나타난 곳은 화진의 우측이었다. 그리곤 바닥을 쓸 듯 신형을 잔뜩 웅크린 뒤, 화진의 겨드랑이를 향해 마구 검을 찔러 갔다.
―천무십이검 제이식, 은하횡천!
순간적으로 그의 검영이 수십 개로 불어나더니 화진의 측면을 까맣게 뒤덮었다.
“흥! 너무 속이 보이는구나!”
화진은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손목을 빙글 돌려, 수중의 목검으로 측면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천무십이검 제육식, 암천수월(暗天囚月)!
화진은 언뜻 보기에 무심코 장난처럼 목검을 돌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측면에 심연처럼 깊은 검은색의 장막이 생기더니, 화무휘가 발출한 수많은 검기들을 그대로 흡수했다.
“헉!”
당황한 화무휘가 짧은 단발마를 내뱉었다. 그러나 화진의 목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닌, 이어서 독사처럼 교묘하게 휘어지며 화무휘의 목을 찔러 갔다.
독사탐와(毒蛇貪蛙)!
그 이름은 거창하지만 무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삼류 수법이었다.
하지만 화진이 시기적절하게 독사탐와의 수법을 펼치자, 그의 목검에서 뻗어 나온 검기가 실제로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화무휘의 목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이렇게 쉽게 끝인가?’
화진은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조금 이른 판단이었다.
그가 출수를 함과 동시에, 뒤에 있던 휘영도 마침내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휘영은 잔영신법을 통해 무수히 많은 그림자로 상대를 혼란시키며 접근했다. 그리곤 이어,
―천무십이검 제육식, 암천수월!
휘영은 목검을 길게 뻗어 화무휘와 화진의 중간을 향해 작은 원을 그렸다.
화르르르!
화진의 검기가 휘영의 검막에 닿자 눈 녹듯 허무하게 사라졌다. 단순히 검을 휘둘러 자신의 주위의 검막을 형성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검막을 일종의 검기처럼 출수하여 화무휘를 보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