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천도무문 1권(11화)
第六章 근묵자흑(近墨者黑)(2)
“우리 모두가 합공을 펼쳤다면 과연 승산이 있었을까?”
이것은 위지겸의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이진중은 이런 위지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진중의 모습을 확인한 위지겸이 이에 동의라도 하듯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그렇겠지. 설사 교주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합공을 감당할 수 있다고는 쉽게 자신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정면대결을 피하고 달아나려 했다면 상황은 어떠했을까? 과연 우리가 그를 그곳에서 제거할 수 있었을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위지겸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어느새 이진중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비로소 어느 정도 위지겸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진정 교주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고수라면, 그런 인물이 정면대결을 피하고 달아나려 한다면 아마 지금의 두 배의 전력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를 제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가 그곳에서 우리의 바람대로 정면으로 승부해 주었을까? 그곳에는 그를 제외한 아무도 없는데 말일세.”
위지겸의 회의적인 반응과 마찬가지로 이진중의 생각 역시도 회의적이었다.
그곳에서 그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사당의 위패가 전부였다.
과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의 위험마저 감수하려 했을까?
적어도 이진중의 잣대로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진중은 어째서 위지겸이 그에게 봉마패를 전했는지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이진중의 마음을 알고나 있다는 듯 위지겸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봉마패는 언제고 다시 내게 돌아올 것이네. 그것이 빠르든 늦든 반드시.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네. 만약 그것이 내게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최강의 적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지.”
이진중이 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위지겸을 바라보았다. 이진중의 이런 태도에 아랑곳없이 위지겸이 계속해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과연 한 문파를 재건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갑작스런 위지겸의 질문에 이진중이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지겸이 한심하다는 듯 이진중을 쳐다보았다.
“답답한 사람, 지금 천도무문에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네. 그렇다면 그의 당면과제는 바로 천도무문의 재건이 아니겠는가?”
이진중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고수를 기르고 문파를 정비하려면 십 년,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위지겸이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겠지. 그것이 지금 그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겠지. 그런데 말일세. 그 시간이 지나면 본교의 대업은 과연 얼마만큼 진행되어 있을까?”
위지겸은 굳이 지금 천도무문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이진중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봉마패를 그에게 전한 것은?”
위지겸이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앞으로 발행될 무림첩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라고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교의 출현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무림첩이 발동되고 무림맹이 결성되겠지. 하지만 과연 봉마패를 받아 든 그가 무림맹에 참가할까?”
이진중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지도…….”
위지겸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겠지, 때문에 그에게 호남성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일세. 일단은 천도무문의 재건을 우선으로 하라는 뜻에서.”
이진중이 그래도 여전히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가 무림맹에 가입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봉마패의 권위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위지겸이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그가 무림맹에 가입한다면 아마도 봉마패는 이미 내 손으로 돌아와 있을 것이네. 그는 삼백 년의 신의를 지킨 천도무문의 문주, 그런 그가 우리를 적대시하게 된다면 돌려주겠다고 약속한 봉마패를 돌려주지 않고 우리를 대항하는 데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이진중이 담담한 표정으로 위지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가 천도무문의 문주이기에 봉마패를 내줄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위지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위지겸의 모습을 이진중이 감탄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이자의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일까?’
어이해 교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만장일치로 위지겸을 군사의 위치에 임명했는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이진중을 향해 위지겸이 힘주어 말했다.
“또한 봉마패가 돌아오는 바로 그날이 천도무문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진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위지겸을 향해 말했다.
“허나 결국 끝까지 봉마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위지겸이 허탈한 표정으로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어리석기는, 고작해야 호남 땅을 천도무문에게 내어주고 천하를 얻는다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인가? 삼백 년 신의를 지켜 준 그들에게 본교 역시 그만한 신의는 지켜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진중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위지겸이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봉마패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야. 그리고 그 봉마패가 언제 내 손에 돌아오는지가 앞으로 전 무림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야.”
위지겸의 중얼거림에 이진중이 무심코 그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일 뿐입니다. 군사께서 그에게 너무 과중한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지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삼백 년 전 마교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진정 몰라서 하는 말인가? 당시 교주셨던 척계광 님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 천하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고는 다시 한 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진중을 바라보았다.
“혼자라니, 터무니없는. 그가 무림맹에 합류했을 때도 과연 자네는 그를 혼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잊지 마시게. 앞으로의 싸움은 마교와 천도무문의 싸움이 아닌 마교와 천하의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싸움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위지겸의 말이 끝나자 이진중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진중의 모습을 바라보는 위지겸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는 못했다.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승부는 마교 내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라는 것을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향후 네가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면 내 그 즉시 너를 참할 것이니 이 점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겨 두게.”
이진중이 다시 한 번 위지겸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이미 위지겸을 향한 이진중의 눈빛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물론 천도무문으로 이동할 당시와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상대에게 승복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총단으로 돌아가 교주님을 뵐 것이니 자네는 내가 떠나는 즉시 호남성에 주둔한 본교의 전력을 호남성 밖으로 즉시 퇴각시키도록 하게. 나는 자네가 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 주리라고 믿겠네.”
이진중이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허리를 숙였다.
“복명.”
이렇게 두 사람이 천하운명을 좌우할 변수라고 언급한 천도무문의 젊은 문주는 그 시각 뜻밖에 찾아온 횡재를 감상하면서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일단은 외상값부터 갚고. 흐흐흐.”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소무린은 먼저 마교도들이 남기고 간 궤짝부터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도 좋을까?
아침부터 실없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흐흐흐, 우선 아침 식사부터 해야겠군.”
궤짝을 어깨에 훌쩍 짊어지고 소무린은 보무도 당당하게 풍운각으로 향했다.
그날 소무린의 친구 장소팔은 새벽부터 손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 뭐가 그리 바쁜지 어젯밤 이층에서 묵었던 손님들이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이 주인장, 주인장 하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잠에서 깨어난 장소팔은 그때부터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음식을 나르고, 식탁을 치우고, 손님들이 떠나고 난 이후에 그들의 방을 정리하고, 그렇게 마지막 손님의 방을 정리한 이후에 다시 못다 이룬 잠을 청하려는 찰나였다.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팔아. 소팔아.”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장소팔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나도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떤 놈이 대체 저딴씩으로 남의 이름을 함부로 처부르는 거야. 아, 진짜.”
장소팔은 아버지가 아니라면 오전에 가끔씩 찾아오는 단골 아저씨쯤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불만 가득한 얼굴로 털레털레 식당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너냐? 왔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자신을 반기기는커녕 시큰둥한 장소팔의 반응에 소무린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은 무슨 일, 밥 먹으러 왔지.”
장소팔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아∼함. 그래, 뭐 좀 줄까?”
하품까지 하면서 무성의하게 말하는 장소팔의 모습에 소무린이 참았던 화를 터트렸다.
“야야, 너 지금 손님한테 뭐 하는 짓이냐?”
장소팔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손님은 무슨 손님, 그런 이야기는 울 아버지한테나 하지 그러냐?”
장소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의 주먹이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놈, 지금 손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어느새 주방 정리를 끝내고 달려 나온 장봉상이 장소팔을 향해 두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장소팔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 노골적으로 아버지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에이 씨, 다 큰 아들을 친구 앞에서 아무렇게나 대하지 좀 마세요.”
장봉상이 어이없다는 듯 장소팔을 바라보았다.
“다 큰 아들 좋아하네.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나 객점 안에서는 모두 손님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느냐?”
장소팔이 기다렸다는 듯 장봉상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러는 아버지는 진씨 아저씨가 오시면 그냥 막 대하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요.”
장봉상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장소팔에게 말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야, 이제 보니 잘하면 이 늙은 애비랑 맞먹으려고 드시겠네요. 아드님.”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에 소무린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 보아도 그야말로 정겨운 부자지간이었다.
“저, 아저씨.”
소무린이 자신을 부르자 장봉상이 재빨리 표정을 바꾸면서 대답했다.
“아, 예. 말씀하시지요, 손님.”
장봉상의 지나치게 친절한 모습에 소무린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다소 껄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 일단 먹을 것 좀 내주세요.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밀린 외상값을 좀 정리할까 하는데요.”
장봉상은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한 듯 입가에 쾌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어제 천도무문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면서 막연하게나마 어쩌면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돈 냄새 하면 장봉상, 장봉상 하면 돈 냄새, 그야말로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장봉상이었다.
반면에 장소팔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야, 네가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났냐? 아악!”
괜스레 방해만 되는 장소팔을 향해 장봉상이 다시 일격을 가했다. 순간 소무린이 바닥에 있던 궤짝을 탁자 위로 올리면서 말했다.
“백 년 외상값이 이 정도면 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소무린이 궤짝의 문을 열자 티격태격하던 장씨 부자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야, 야, 야, 너 대체 이거 어디서 났냐? 훔쳤냐?”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장소팔과는 달리 장봉상은 단지 처음에 조금 놀랐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무린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훔치기는. 내가 무슨 도둑놈이냐, 이깟 것이나 훔치게.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외상값도 청산했으니 우선 밥이나 먹어야겠다. 계산은 나중에 하고 아저씨도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순간 장봉상이 궤짝을 통째로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무슨 말씀을, 일단 계산부터 하시지요. 손님, 그런데 계산을 하고 남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소무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음, 글쎄요. 뭐 남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의 식대로 해 주세요.”
장봉상이 활짝 웃으면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네, 알겠습니다. 손님.”
장소팔이 화들짝 놀라면서 아버지 장봉상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순간 장봉상이 화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 아들의 머리를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나 친구를 위해 이 정도의 고통은 충분히 각오한 장소팔이었다. 장소팔은 고통을 참으면서 아버지 장봉상을 노려봤다.
“아버지, 그걸 다 챙기려고 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백 년간의 외상값, 물론 좀 되긴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궤짝에서 보였던 보석 한두 개, 혹은 금자의 일부라면 충분히 그 대금을 치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설사 나머지를 추후의 식대로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아마 소무린이 평생을 이곳 풍운각에서만 먹고 마셔도, 아니 오대, 아니 십대는 먹고 마셔도 충분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장봉상은 괜히 다른 말이 나올까 걱정스러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궤짝을 들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장소팔이 허무한 표정으로 소무린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야, 너 미쳤냐?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소무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장소팔을 바라보았다.
장소팔은 마치 자신의 돈이라도 되는 양 분통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야,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기로서니 그걸 다 그냥 주면 어떻게 하냐?”
소무린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장소팔을 향해 말했다.
“왜, 모자란다고 생각하느냐?”
장소팔이 말할 가치도 없다는 투덜거렸다.
“아휴, 진짜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동안 내가 이걸 친구라고. 그런데 혹시 뭐 좀 남겨 둔 건 없냐?”
소무린이 정색을 하고 장소팔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따위 말을 하는 거냐?”
장소팔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너한테 그런 머리나 있겠냐. 그걸 다 주다니. 아마도 저 구두쇠가 죽기 전까지는 저 돈 구경하기는 틀렸구나. 하다못해 조금만 남겨 뒀더라도 기루에서 그럴싸한 기녀들과 술 한 잔은 질펀하게 걸칠 수 있었을 텐데. 제길.”
정작 궤짝의 주인인 소무린보다도 장소팔이 그것을 더 아까워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구두쇠 주인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팔아, 뭐 하냐. 냉큼 손님 음식 갖다 드려야지.”
장소팔이 잔뜩 인상을 찡그리면서 주방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짜증나는군.’
아버지의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태어나서 가장 짜증나게 들리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음식을 기다리는 친구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런 아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환한 친구의 미소와 그의 손에 들린 가죽 주머니가 음식을 나르는 장소팔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죽 주머니에서 들리는 금자 부딪히는 소리가 장소팔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동시에 음식을 나르는 장소팔의 움직임이 한결 빨라졌다.
“친구야, 술이라도 한잔할래?”
소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뭐, 아침부터?”
장소팔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지고 마셨냐?”
장소팔은 재빨리 주방을 달려가 외쳤다.
“아버지, 천도무문의 문주님께서 외상값을 청산하신 기념으로 술 한잔 하시고 싶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 장봉상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얼 망설이느냐? 냉큼 어제 못 드시고 간 소홍주를 내드리지 않고.”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에 장소팔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술을 가지러 밖으로 나가면서 소무린에게 당부의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손님, 그거 잊어버리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소무린이 피식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소무린은 술병을 들고 온 장소팔과 함께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사이 장봉상은 주방에서 오늘 쓸 식자재들을 부지런히 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