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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무문 1권(19화)
第九章 임자를 만나다(2)
우금향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누구도 명시적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검각은 더더욱 그렇지요. 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 관행처럼 이어져 온 일들이지요. 그런데 마교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그중 일부를 마교에 제공하고 마교를 돕는다면 향후 도화방의 존립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아울러 기녀들의 안전은 마교에서 책임지는 것으로요.”
류한청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이 과연 그와 같은 약속을 지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금향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 그들의 모습은 그 정도의 신뢰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가 우려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많은 방파들이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이지요.”
류한청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대로 된 문파라면 마교를 상대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까닭이 있겠습니까?”
우금향이 역시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과연 그 제대로 된 문파라는 것이 당금 무림에 얼마나 될까요? 물론 형산파처럼 제대로 된 문파도 없지는 않지요. 지금은 지도상에서 사라진 문파지만요.”
류한청은 비로소 우금향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마교는 두 가지 전략을 은밀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항하는 세력은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고 이를 다른 세력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복종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압도적인 힘은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과 함께 전혀 마교답지 않은 조건부 복종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세상이 제대로 마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라는 것이 중요했다.
우금향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둘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더 늦으면 마교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대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고, 그리고 그 대책이라는 것이 바로 역사상 몇 번 발동되지 않은 무림첩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아직 수면 위에 드러나지도 않은 마교를 상대로 한 무림첩이 무림인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우금향 역시도 류한청이 염려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망설이는 류한청을 향해 우금향이 재촉하듯 말했다.
“솔직히 사람들의 호응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이 마교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오히려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금향은 지금 단순히 무림첩을 마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자는 이야기였다.
“허나 과연 상부에서 그런 정도로 무림첩을 사용하려 할지?”
이런 류한청의 말에 우금향은 이제 그녀의 역할은 모두 끝났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저로서는 이 정도가 제가 가진 정보의 모든 것입니다. 제 정보를 믿는 것도,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모두 류 대협의 몫이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호남 땅에서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더 남쪽으로 가신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선택이 되실 것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지금 우금향의 말은 분명 류한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우금향은 더 이상 남쪽으로 간다면 생명이 위험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류한청을 대신해서 서조헌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지만 류한청은 오히려 이를 인정하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 방주의 말처럼 마교가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 진정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분명 저 정도로는 무리겠지요. 하지만 우 방주가 걱정하는 것처럼 마교가 득세하는 세상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검각 역시도 지난 삼백 년간 한시도 마교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우금향이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는 마교와 척을 진 상황, 그녀나 도화방이 마교의 승리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림첩이 발동된다면 저희 도화방은 반드시 거기에 응하도록 하지요.”
류한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조헌 역시도 고통을 참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류한청이 그런 서조헌을 만류하면서 말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일세. 자네는 그냥 이곳에 머물러 주시게.”
그러고는 우금향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서 소협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우금향 역시 승낙의 뜻으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서조헌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두 다리가 멀쩡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는 상처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류한청을 따라나선다면 그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기에 그를 혼자 보내는 것이 서조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 팔로 포권을 취하는 서조헌의 모습에 류한청이 한차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장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이층을 지날 즈음에 지금이 어떤 시국인지도 모르고 참 세월 좋게 술 마시는 얄미운 청년의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착각이었을까?
청년이 소리 없이 재빨리 움직이는 자신을 향해 한순간 피식 미소를 짓는 듯 느껴졌다. 류한청이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결국 조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저 청년 덕분에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청년이 그다지 크게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반면에 소무린은 그야말로 씁쓸한 표정으로 류한청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한바탕 술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만취한 세 사람뿐이었다.
터벅터벅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세 사람, 조금 전 술자리의 여운이 못내 아쉬운 듯 두 부자는 공히 기녀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살폈다.
‘이놈만 없었어도.’
‘아버지만 없었어도.’
하지만 소무린은 재수 없는 류한청을 보아서인지 기녀 대신 자꾸만 유소혜의 얼굴만이 아른거리며 대지를 비추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과 어우러져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이고 두(頭)야.”
생에 최초의 과음, 또한 처음 접하는 그 과음의 후유증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소무린은 뒷골이 지끈지끈 땡기고 속이 매스꺼운 것이 온몸이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았다.
‘가볍게 땀이라도 흘리면 좀 나으려나?’
한바탕 검을 휘두를 생각으로 소무린은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누군가 창고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누가?’
소무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서서 들어오는 상대를 확인했다.
나이는 대략 오십을 넘었을까?
일견하기에 무공을 익힌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노인의 모습은 왠지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생에 처음 대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저, 누구신지?”
어색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 소무린과는 달리 너무나 자연스레 허리를 숙이는 노인의 모습에는 그 나름의 여유가 느껴졌다.
“문주님, 이제 기침하셨습니까?”
처음 대하는 노인의 깍듯한 존대, 소무린은 얼떨결에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아, 네. 그런데 노인장은 대체 누구신지?”
노인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천도무문의 잡일을 관리하는 집사 일을 보게 된 황석옹이라는 늙은이입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짤막한 황석옹의 소개에 소무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황석옹을 바라보았다.
“집사라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비로소 황석옹이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이런, 아무래도 장봉상 군이 문주님께 제대로 말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거참, 필시 어제는 문주님께 이야기를 전할 것이라고 했거늘.”
황석옹이 언급하는 장봉상 군, 아마도 장소팔의 아버지인 장봉상을 의미하는 듯했다.
순간 소무린이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멍청한 표정으로 황석옹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어젯밤 술자리에서 장봉상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일쯤 사람이 한 명 올 거야. 잘 좀 부탁하네.”
그야말로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지나간 말이라 소무린이 그것을 기억하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소무린은 당시 그것을 단순히 지나가는 이야기쯤으로 흘려들었던 것이다.
설마 그것이 눈앞의 황석옹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저 노인장, 무슨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저는 집사를 구한 적이 없습니다만.”
소무린의 말에 황석옹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일단 말씀부터 낮추시지요. 일파의 문주님께서 부리는 아랫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그저 편하게 황노라고 불러 주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황석옹은 고수였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얼굴에 보이지 않는 두꺼운 철면을 뒤집어쓴 채 입가에 만연한 미소로 무장한 그에게 애송이 소무린은 감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소무린은 그저 난감한 표정으로 황석옹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황석옹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듯 담담하게, 그리고 공손하게 소무린을 향해 말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오늘은 공사가 좀 늦어질 듯하니 일단 풍운각에서 식사를 하시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하룻밤 머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만.”
소무린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황석옹을 바라보았다.
“공사라니요. 대체 무슨 공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석옹이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자 기다렸다는 듯 밖에서 망치질 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인장, 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황석옹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주님, 편하게 황노라고 칭하십시오.”
너무나 당당한 황석옹의 태도에 소무린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황노,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황노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다는 듯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이놈 봉상이를 그냥, 아무래도 봉상이가 문주님께 제대로 설명을 드리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니까 집사라는 것은 집안의 잡일을 총괄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요. 소림이나 무당의 경우는 자파의 사람들이 직접 이런 일을 담당하지만 많은 무가들이 집안의 잡일에 자파의 사람들이 아닌 노복들을 두곤 합니다. 으레 그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집사가 필요한 법이지요. 바로 제가 천도무문에서 그런 일을 담당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소무린이 어찌 집사라는 의미를 모르겠는가?
소무린은 지금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무린은 지금 어째서 장봉상이 임의대로 집사를 뽑았는지, 어째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무문의 건물에 손을 대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태연하게 딴소리를 하는 것인지?
소무린은 황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무린을 향해 황노가 웃으면서 말했다.
“공사와 관련된 일은 문주님께서 전혀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노복이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문주님께서는 그저 봉상 군의 객점에 가셔서 요기를 하시고 푹 쉬고 계시면 됩니다. 무문이 봉문을 풀었으니 앞으로는 바빠지지 않겠습니까?”
잠시 멍청하게 서 있는 소무린, 황노는 그런 소무린의 손을 자연스레 잡고 그를 밖으로 이끌면서 얼굴에 후덕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자,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어서 다녀오시지요.”
소무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집 밖으로 쫓겨난 소무린은 한동안 멍하니 공사하는 인부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마치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황노가 후덕한 미소로 손을 흔들면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 이 아저씨를.”
문득 떠오르는 것은 황노의 입에서 언급된 장봉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