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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무문 1권(20화)
第九章 임자를 만나다(3)
황노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는 장봉상과 관련된 인물임이 분명했다.
이대로 황노와 이야기해 봐야 도무지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 일단 풍운각에 가서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확인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무린이 황석옹을 자연스레 황노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미 소무린은 더 이상 황석옹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부리나케 풍운각으로 달려간 소무린, 아직 이른 시각이라 풍운각에 그를 제외한 다른 손님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인근에서 풍운각까지 아침 식사를 하러 올 만한 사람이라고는 소무린밖에는 없었으니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어, 왔냐? 꺼억.”
장소팔이 소무린을 신트림으로 환영하면서 반겼다.
“속은 괜찮나?”
계속해서 인사를 건네는 장소팔을 소무린은 무시하듯 스치고 지나가 주방 앞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잠깐 나와 보세요.”
장봉상이 주방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 무슨 일이십니까?”
소무린이 장봉상의 능글맞은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노도 그렇지만 장봉상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저씨,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마음대로 벌이신 겁니까?”
갑자기 장봉상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단순히 손님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이웃에 있는 천도무문의 문주님으로 찾아오신 것이로군요.”
소무린이 이를 인정하듯 결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석옹, 아니 황노와 무문을 공사하는 인부들은 대체 뭡니까? 황노의 말로는 아저씨가 보내셨다고 하던데.”
장봉상이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그러던가요?”
소무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노가 그러던데, 아닌가요?”
장봉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황 집사님이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소무린은 장봉상이 황노를 황 집사님이라고 칭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장봉상을 노려보았다.
순간 장봉상이 지금까지 한 번도 대하지 못했던,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너무나 진중한 표정으로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장봉상의 모습에 소무린이 흠칫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장봉상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황 집사님을 초빙한 것은 내가 아니라 돌아가신 자네의 다섯 사부님들이라네.”
소무린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장봉상을 바라보았다.
그의 죽은 다섯 사부들 중 누구에게서도 황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럴 리가요. 금시초문입니다.”
장봉상이 계속해서 진지한 모습으로 소무린을 향해 말했다.
“대저 구파일방과 같은 명문이 어떻게 탄생한 것 같은가?”
소무린이 장봉상의 진지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고분고분 대답했다.
“글쎄요. 뛰어난 무공이 아니겠습니까?”
장봉상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과연 무공만이 전부일까? 그렇다면 무공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마교의 경우는 어째서 명문이 되지 못했을까?”
소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글쎄요, 워낙 잔인하고 또 뭐…….”
장봉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은 덕(德)이고 협(俠)이며 신(信)이라네. 천도무문이 지난 삼백 년 세월을 봉문한 까닭도 바로 이 신의를 지키는 것이 명문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장봉상이 무문의 삼백 년 세월을 언급하자 소무린도 일단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치고요. 대체 그것과 황노는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그리고 마음대로 무문의 건물을 수리하는 것은 대체 무슨 짓입니까?”
장봉상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황 집사님은 천도무문의 협과 덕의 상징이라네.”
소무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협과 덕의 상징?”
장봉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 집사님의 가문은 무문이 최초로 세워질 당시부터 무문이 봉문을 할 당시까지 무문의 살림을 맡아 왔던 가문일세. 무문이 봉문할 당시 무문의 원로들은 그들을 무문 밖으로 내쳤네. 어차피 무림인이 아닌 그들이었기에 함께 세상을 등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집사님의 가문은 이곳 장사에서 삼백 년 동안 무문의 부활을 기다려 왔네. 실제로 지금까지 무문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세. 삼백 년을 기다려 온 황씨 가문의 염원을 무문의 문주인 자네가 진정 저버릴 생각인가?”
왠지 그럴듯한, 그리고 다소 장황한 장봉상의 설명에 소무린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그것과 협과 덕의 상징은 또 무슨 관계입니까?”
장봉상이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황씨 가문은 무엇 때문에 삼백 년 세월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는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황씨 가문은 무문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하니 이는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한 무문의 협이요, 또한 이후 무문이 그들을 덕으로 대했기에 지난 삼백 년 세월 동안 무문을 잊지 않고 기다려 온 것이 아니겠는가? 명문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지속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니 무문이 황 집사님을 보듬어 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무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장봉상을 바라보았다.
왠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뭔가 이상했다.
“진정 이유는 그것뿐입니까?”
이번에는 장봉상이 흠칫 놀라며 소무린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이미 자네의 사부들과 이야기가 끝난 일이니 어쩌겠는가? 자네가 사부님들의 유명을 따르지 않겠다면 나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어차피 모든 결정은 무문의 문주인 자네가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무린이 씁쓸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일단 돌아가신 사부님들의 뜻이라니 따를 밖에요. 시장하니 식사나 준비해 주시지요.”
장봉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방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소무린은 무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장봉상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최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신 것인지. 아직도 무문을 명문으로 만들겠다는 허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들 계시다는 것인가? 명문이란 억지로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진정 모르시는 것인가?”
생에 처음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진중한 모습 때문에 감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가만히 옆에 서 있었던 장소팔이 소무린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냐?”
소무린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 난들 알겠냐?”
장소팔 역시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하루면 끝난다던 공사가 한 달간 지속되었다.
본관을 뜯어고치고 연무장을 새로 만들고 담을 높이고 현판을 보수했다.
들어간 돈이 적지 않았겠지만 그 정도는 장봉상이 외상값을 제하고 남은 금액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천도무문에 사람이 늘면 자연히 손님도 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천도무문의 새 단장에 맞추어 풍운각 역시 대대적인 확장 보수에 들어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황노와 장봉상, 두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죽이 참 잘 맞았고 부족한 기자재를 서로가 보충해 가면서 그야말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장봉상의 말에 황노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에 집만큼 편안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삼백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 더없이 편할밖에.”
황노의 대답에 장봉상이 믿기 힘들다는 듯 의심의 눈초리로 황노를 바라보았다.
“제가 보기에는 이전에 지내시던 곳과 너무 달라 무척 불편하실 듯합니다만.”
황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장봉상을 불렀다.
“이 사람 봉상이.”
장봉상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어르신. 말씀하시지요.”
황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자네는 내 어릴 적 꿈이 무언 줄 아는가? 믿기 힘들겠지만 바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네. 어디 그것이 나 혼자만의 꿈이었겠는가? 내 조부님과 아버지, 그리고 선대 어르신들의 꿈도 바로 이것이었다네. 어떤가? 자네라면 이해할 법도 하건만.”
장봉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글쎄요, 대체 어르신이 무엇 때문에 자청해서 이곳으로 돌아오셨는지 솔직히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황노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봉상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뚜렷한 목적도 없이 평생을 이곳에서 무문의 사람들과 함께한 자네는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장봉상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황노를 바라보았다.
황노 황석옹, 그는 대륙 삼대 상단의 하나로 손꼽히는 황가장의 가주였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랑 휘하 노복 십여 명을 거느리고 이곳 천도무문의 집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장봉상이 확인하듯 다시 묻자 황노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후회라니, 당치않네. 이곳은 우리 황씨 가문의 마음의 고향, 어쩌면 성역과도 같은 곳이라네. 내 선친께서는 언제나 어린 내게 역경이 닥칠 때면 이곳을 떠올리며 어려움을 이겨 내셨다고 말씀하셨지. 그리고 나 역시도 역경이 닥칠 때면 몇 번이고 이곳을 떠올렸다네. 그리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는 이곳으로 돌아왔네.”
황노의 마음을 어쩌면 장봉상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마음의 성역이라.’
하지만 실상 황노의 마음의 성역인 이곳을 장봉상은 몇 번이고 떠나려고 마음먹었었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실제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도무문에 식자재를 전하기 위해 무문에 들르고 나면 언제나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었고 그렇게 다시 한 달을 후회로 버텨 왔다.
그러기를 어언 이십여 년, 터무니없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황노가 돌아온 것도 그런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장봉상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는 황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마음의 고향으로만 그냥 남겨 두지 그러셨습니까?”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천도무문, 남겨진 것이라고는 철부지 청년 하나밖에는 없었다. 그런 천도무문의 모습에 황노가 적지 않게 실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황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주님을 직접 대하기 전까지는 적지 않게 실망한 것이 사실일세. 왜 아니 그렇겠는가? 삼백 년 세월 동안 무문에 오직 한 명의 무인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허나 지금은 그 한 명으로도 무문이 삼백 년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는 생각이 드네.”
장봉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삼백 년의 약속?”
황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 있다네.”
황노의 흐뭇한 모습에 장봉상이 뒤에서 재잘거리며 장소팔과 이야기하는 소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출중한 아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요.”
황노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이시지.”
황노가 소무린을 언급하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존칭을 취하자 장봉상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황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분은 오백 년 무문의 역사에 정점이 될 분이시라네.”
이렇게 말하는 황노의 표정에는 어느 정도 자신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장봉상이 차분한 표정으로 소무린을 다시 한 번 살폈다.
‘과연 그럴까?’
황노는 이미 상계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이었다.
그 정도의 연륜이라면 그야말로 황노의 식견은 탁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분명 소무린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무인임을 장봉상 역시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이곳을 찾았던 마교도들을 통해서 그것이 어느 정도 증명은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황들보다도 황노의 지금 이 말 한마디가 삼백 년 장씨 집안의 터무니없는 노고에 더없는 위로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르신의 말씀이라면 아마도 틀림이 없겠지요.”
황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지켜보건대 자네 아들의 그릇 역시도 결코 작지는 않아 보이는군. 정말 잘 어울리는 친구들이 아닌가?”
장봉상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난 아들놈을 칭찬해 주시는 것은 고마우신 말씀이나 그저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황노가 강하게 이를 부인하며 말했다.
“때로는 밖에서 지켜보는 눈이 더 정확할 때도 있는 법이라네.”
장봉상이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어르신의 말씀이라도 그다지 믿음이 가지는 않는군요.”
황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란 항상 못 미덥고 걱정스러운 법이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대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항상 생각처럼 되지 않으니 말일세.”
황노의 말에 장봉상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에 새롭게 단장된 본관 천도무문의 문주실이 조용히 열렸다.
이미 삼경을 넘긴 깊은 밤, 소무린은 조심스레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뒷문으로 향했다.